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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냥 변덕인가? (4/84)


4화. 그냥 변덕인가?
2022.10.14.



 
그의 지시에 나영은 경악했다.

얼굴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나영은 서둘러 두 손으로 마스크를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이러스 때문에 안 됩니다!”

그녀의 거센 저항이 태혁은 오히려 거슬렸다.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져 있는 환자 앞에서 그러면 이해하겠지만, 그는 그냥 봐도 면역력에 문제없는 성인 남자였다.

그러니 그녀의 말은 그의 앞에서 핑계일 뿐이었다.

태혁은 그가 직접 마스크를 벗기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최태혁 교수의 손이 다가오자 나영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도망쳐 버렸다.

우선 살고 보자 하는 마음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가 버렸다.

그녀가 갑자기 도망치는 걸 보고 최태혁 교수는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입을 쩍 벌리며 놀랐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최 교수의 바로 옆에 서 있던 남호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잡아 올까요?”

최태혁 교수는 도망간 문나영 대신 남호진을 매서운 눈빛으로 갈겼다.

***

최태혁 교수를 피해 도망친 나영은 그 길로 바로 과장실로 찾아갔다.


“과장님. 저 전공 과를 옮기고 싶습니다.”

이제 고작 이틀 되었을 뿐인 레지던트 1년 차가 찾아와서 그리 말하니 박 과장은 어이없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 적성에 안 맞는다고 판단하기에는 짧아도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우선 한 달은 해보고 결정하지 않겠나?”

문나영은 인턴이었을 때도 성실했기에 박 과장은 가능한 한 그녀를 외과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제가 그러고 싶어도 최 교수님이!”

나영은 중간에 말을 멈추었다.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기에.

과장님을 찾아와서 대놓고 지도교수 탓을 하다니. 병원에서 이만큼 미친 짓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나영은 서둘러 과장실에서도 도망쳐 나왔다.

그녀의 레지던트 생활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정말 모르게 되어버렸다.

***

태혁은 연구실로 돌아오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로 외과 레지던트들의 인사기록을 찾아보았다.

정확히 그 레지던트가 그 여자가 맞다고 믿는 건 아니었지만,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어서 제대로 확인을 해야만 했다.

빠르게 클릭하며 인사기록을 넘기던 그의 손이 한순간 멈추었다.

태혁은 모니터에 더 가까이 다가가 인사기록에 있는 사진을 뚫어지게 보았다.

이 깨끗하고 고운 얼굴은 아무리 봐도 분명 그녀였다.

그는 인사기록에 나온 이름을 보았다.


“문나영.”

이렇게 빨리 이런 식으로 찾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기에 태혁은 호텔에서 사라진 여자를 찾았다는 기쁨보다 황당함이 더 컸다.

그녀가 그와 같은 의사일 줄은 몰랐고, 더욱이 고작 레지던트 1년 차일 줄은…….

귀걸이 한 짝의 주인을 찾기만 하면 해피엔딩일 줄 알았건만, 막상 찾고 나니 장르가 로맨스에서 극한직업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연구실 전화가 울렸다.

태혁은 손을 뻗어 전화기를 들었다.


“네, 간담췌 외과 최태혁입니다.”

[최 교수. 지금 당장 과장실로 와.]

과장님의 호출이었다.

급하게 부르기에 그가 맡아야 할 중요한 환자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태혁은 바로 과장실로 향했다.


“왔나.”

그를 보는 박 과장의 얼굴은 심각했다.

태혁은 박 과장이 왜 그런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박 과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 때문에 레지던트가 전공과를 바꾸고 싶다더군.”

그를 피해 도망가던 여자의 뒷모습이 떠오르며 박 과장이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짐작이 되었다.


“내가 최 교수 실력 좋은 거야 너무 잘 알지. 하지만 혼자서 일하는 게 아니잖아. 좀 살살 해. 요즘 레지던트들은 자네 때만큼 빡세게 일하지 않는다고. 오죽하면 법으로 100일 당직도 못 하게 막겠어.”

박 과장이 너무 레지던트들을 잡지 말라고 그를 구슬리는 동안 태혁은 문나영이 보여주었던 태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그녀는 그를 처음부터 알아봤을 거다.

마스크를 쓴 게 아파서가 아니라 그한테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쓴 거라는 걸 깨달았다.

전공과까지 바꾸려고 했던 걸 보니 필사적으로 그를 피하고 싶었나 보다.

레지던트 1년 차가 어떤 시기인지는 그도 그 시기를 지내봤기에 그녀가 그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지는 건 전혀 아니었다.

태혁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찾아가서 왜 호텔에서 도망쳤는지, 왜 병원에서는 그를 피해 전과까지 하려고 했는지 따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 그가 애써 그녀를 찾으려고 했던 의미는 퇴색되어 사라졌다.

태혁은 그녀한테 따지고 싶어서 다시 만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그는 단지…….

태혁은 우선 감정을 내려놓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그의 행동에 따라 그녀의 레지던트 1년 차 생활이 결정될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지도교수였으니 그의 영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마음 돌려놓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최태혁이 직접 레지던트를 설득하겠다고 하자 박 과장은 진지하게 충고했다.


“절대 협박하면 안 돼.”

태혁은 쓴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보니 그의 실제 모습을 알게 되어서 정떨어진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실을 나온 태혁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가 웬일로 먼저 전화를 다 했어?]

그가 전화한 사람은 대학 동기인 정형외과 오승준 조교수였다.


“네 여동생 우리 학교 의대 다닌다고 했던 거 같은데, 지금은 레지던트야?”

[내 여동생?]

최태혁이 갑자기 전화해서 뜬금없이 여동생에 관해 묻는 말에 오승준은 좀 무서워졌다.

***

나영은 오래 최태혁 교수를 피할 수 없었다.

아직 간담췌 외과 레지던트인 이상 최태혁 교수와 어떻게든 부딪히게 되어 있었다.

머리로는 그리 생각했지만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아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

분명 그녀한테 빨리 오라는 전화일 거라 나영은 무거운 마음으로 핸드폰을 보았다.

그런데 전화한 사람은 친구 승희였다.


“여보세요.”

[너 회진 때 사고 쳤다면서?]

승희까지 알게 된 것을 보니 온 병원에 소문이 났나 보다.

그녀가 최태혁 교수 앞에서 꽁무니 빠지게 도망친 게.

차분한 그녀의 이미지가 최태혁이 이 병원에 등장하고 이틀 만에 제대로 망가졌다.


[괜찮아?]

그녀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친구의 목소리에 나영은 울컥했다.


“나 이제 어떡하지?”

[최태혁 교수도 그 정도로 크게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야. 네가 환자한테 해를 끼친 게 아니잖아.]

그녀는 그 일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레지던트 생활을 한탄하는 것이었다.

이젠 그 하룻밤이 너무나 후회되었다.

좀만 참을걸.

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굴어서 이 사단을 만들었는지.

절망스럽기만 한데 승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최태혁 교수님 너무 무서워하지 마. 우리 오빠한테 들으니까 그 사람도 막 완벽한 건 아니더라.]

승희의 오빠는 정형외과의 오승준 교수였다.


[병원 출근 전날 클럽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필름 끊겨서 하마터면 첫날부터 지각할 뻔했다잖아.]

출근 전날이면 최태혁이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낸 그날이었기에 나영은 눈이 커진 채 굳었다.


“뭐? 필름이 끊겨?”

[응. 술 마시고 자기가 뭘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 못 한대. 술 마시면 허당 되나 봐. 킥킥.]

나영은 멍해졌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그도 모든 걸 기억할 줄 알았다.

그런데 기억을 못 한다고?

***

최태혁 교수의 수술을 보고 배우라고 과장님이 친히 지시를 내렸기에 수술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레지던트들도 수술실을 볼 수 있는 모니터 앞에 모였다.

나영은 일부러 가장 뒤에 섰다.

그의 수술 실력이 끝내준다는 말만 들어봤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직 수술실에 최태혁 교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취과 스태프가 먼저 들어와 환자의 전신 마취를 진행했다.

드륵.

문이 열리며 마지막으로 주인공처럼 집도의인 최태혁 교수가 들어왔다.

집도의 자리에 선 그의 시선이 수술대에 누워 있는 환자한테 향했다.

그 모습은 꼭 생명 앞에 유일한 구원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록 그가 하룻밤을 같이 보낸 여자를 기억도 못 하는 무책임한 남자라고 해도 모든 걸 나쁘게 볼 생각은 없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최태혁 교수는 시작이 언제나 정중했다.

하지만 수술이 진행되면 독사 같은 그의 본모습이 나올 거라는 걸 이젠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간암 환자의 간절제술은 4시간이 걸려서 끝이 났다.

그녀의 눈으로 직접 본 최태혁 교수의 수술 실력은 의학 교과서라고 느껴질 정도로 정확하고 깔끔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수술에 참여해야 그녀는 그와 같은 수준에 오를 수 있을지 지금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수술이 끝난 뒤 나영은 먼저 최태혁 교수를 찾아갔다.

오늘 그를 만나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최 교수님!”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혼자 걸어가던 최태혁 교수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가 돌아보자 나영은 손을 올려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심장이 한 번 크게 울렸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고도 담담한 그의 시선과 마주치니 그녀의 심장 박동도 곧 정상 수치로 돌아왔다.

정말 기억 못 하는구나. 진짜로…….


  
서운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나영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침에는 제가 무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의 앞에서 도망친 일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다.

그날 아침 호텔에서 도망친 건 전혀 미안하지 않지만, 교수 앞에서 멋대로 도망친 레지던트는 분명 잘못한 것이기에.

이제 그가 뭐라고 험한 말을 해도 꾹 참을 각오를 했는데.


“문나영 선생.”

의외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나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그대로인가?”

그녀한테 그런 마음이 생기게 만든 장본인이 그런 질문을 하니, 그녀의 가슴에 강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 닥쳤다.

그건 클럽에서 마주쳤던 그한테 강렬하게 느낀 끌림과는 또 다른 결의 파장이었다.

그녀가 느낀 감정은 저항력이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최태혁 교수는 그녀 앞에 놓인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문나영이 진정한 의사가 되려면 저 산을 반드시 넘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니 그를 피해 도망친다는 말을 나영이 쉽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최태혁 교수는 팔짱을 끼더니 말투도 더 이상 정중하지 않았다.


“자신 없어서 떠나는 거면 가능한 한 빨리 가. 괜히 여기 남아서 다른 의사들까지 방해하지 말고.”

완전히 독사 교수로 돌아온 그의 비난에 나영은 피가 끓어올랐다.


“그런 거 아닙니다!”

나영은 강하게 부정했다.


“그럼 왜 바꾸겠다는 건데? 그냥 변덕인가?”

점점 그녀를 변변찮은 인간으로 몰아가는 그의 말에 나영은 발끈해서 외쳤다.


“다른 과로 옮길 마음 없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마치 선전포고하듯이 말하며 꾸벅 고개 숙여 예의까지 갖추었다.

그녀는 몸을 바로 세우자마자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태혁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택시를 타고 다시 그에게 돌아왔던 것처럼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알았다.

호텔 방에서 눈을 떠 그녀가 아무런 메시지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나버린 걸 알았을 때, 태혁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면 절대 바보처럼 그의 눈앞에서 놓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었다.


“…….”

그런데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어서도 저리 가버리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야 했다.

마음에 구멍이 뚫려서 그가 그녀를 통해 느꼈던 감정들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술이 고팠다. 아주 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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