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벗어 봐 (3/84)


3화. 벗어 봐
2022.10.10.



“너 뭐해?”

승희는 나영이 갑자기 그녀의 등 뒤로 얼굴을 숨기자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나영은 승희의 등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은 마음을 부여잡았다.


“나 어떡해. 승희야.”

“왜?”

레지던트 생활을 잘 해내려고 남자를 호텔 방에 혼자 남겨두고 병원으로 왔건만,

그 남자가 그녀의 지도교수가 되어 병원에 나타났다.

아무래도 그녀가 남자의 동의도 없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서 이런 식으로 벌을 받나 보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

그한테 배정된 연구실로 온 태혁은 소파에 앉으며 긴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의사 가운을 입은 엘리트는 순식간에 탕아처럼 변했다.

태혁은 머리를 벽에 기대며 눈을 나른하게 감았다.

병원 근무는 그한테 익숙한 일상이었는데, 시차가 아직은 몸에 적응이 안 되어서 별로 한 것도 없는데도 피곤했다.

아니, 솔직히 아직 지난밤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여자를 만났고, 그의 하룻밤이 그 여자로 가득 채워졌다.

모든 게 좋았다.

그가 잠든 사이 그녀가 도망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름도 말해주지 않던 그녀가 그렇게 떠날 수도 있었다는 걸 짐작했어야 했는데, 잠만 쿨쿨 잔 자신한테 화가 났다.

태혁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안에 넣어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쉽게 잃어버릴 것처럼 작고 반짝이는 물건은 여자 귀걸이 한 짝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는 여자는 귀걸이 한 짝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태혁은 귀걸이를 바라보며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차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사람 좀 찾아줘.”

-내가 흥신소냐?

“어제 말한 여자.”

차현도 자신을 두 번 버림받게 한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기에 태혁에게 물었다.


-이름이 뭔데?

“몰라.”

-뭐? 그럼 그 여자에 대해 아는 게 뭔데?

“나도 꼭 알고 싶으니까 찾아달라고.”

-그런 말은 산타클로스한테나 해.

차현은 짜증 내며 전화를 끊어버렸지만, 그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전국 각지로 사람을 많이 만나러 다니는 영화감독이었기에 그보다 사람 찾는 건 능숙했다.

그리고 태혁은 당장 병원 일에 집중해야 해서 그녀를 찾으러 다닐 시간이 없었다.

태혁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만날 운명이라면 반드시 또 볼 수 있을 거라 믿으며.

***



“엣취!”

나영은 일부러 기침을 크게 했다.

그래야 그녀가 마스크를 쓴 게 어색하지 않을 테니까.

평소와 많이 달라 보이는 그녀에게 동료들의 시선이 몰렸다.


“문 선생. 원래 안경 안 끼지 않았나?”

그녀는 못생겨지는 걸 개의치 않고 아주 두꺼운 뿔테 안경도 썼다.

나영은 손으로 뿔테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요즘 눈이 나빠져서요.”

“그럼 좀 예쁜 안경으로 쓰지. 문 선생한테 안 어울리는데.”

선배가 뭐라고 해도 나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최태혁 교수한테 안 들키려고 변장한 거니까.

일할 때 불편하지 않게 항상 단정하게 하나로 묶었던 머리도 풀어서 가능한 한 얼굴을 가렸다.

어떻게든 최태혁 교수한테 그녀의 정체를 숨기려고 용을 썼다.

어제 대회의실에서는 똑같은 가운 입은 의사가 엄청 많았기에 그녀를 못 봤겠지만, 회진 때는 피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제 곧 최태혁 교수를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오! 주여! 부처님! 알라신님!

무신론자인 나영은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빌었다.

제발 최태혁 교수가 그녀를 못 알아보게 해달라고.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그녀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최태혁 교수에 대해 들은 소문을 공유하며 그가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이미 타고난 외모만으로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거기에 뛰어난 실력까지 받쳐준다고 하니 레지던트들에게는 영웅의 등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전 회진이 시작되는 7시 50분이 되자 칼같이 최태혁 교수가 등장했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그녀의 눈 안에서 클로즈업되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잠시 심장이 멈춘 듯이 얼었다가 다시 급격하게 빨라지며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제발!

들키지 않기를.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돌아서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런웨이를 걷듯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걸어온 최태혁 교수가 레지던트들 앞에 멈추어 서자 모두 긴장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원래 교수님은 존경하며 우러러봐야 할 존재이기는 한데, 최 교수는 키가 너무 커서 자연스럽게 우러러 올려다보게 되었다.

나영만 얼굴을 들킬까 봐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더 눈에 띄었지만 태혁은 마스크까지 쓴 레지던트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모두를 아울러 보며 짧게 말했다.


“회진 시작하죠.”

한국에 돌아와서 그가 맡게 될 환자들을 처음 대면하는 회진이었기에 그의 관심은 오로지 환자에게 가 있었다.

그래서 환자 외의 것에는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영이 아침부터 불안에 떨며 숨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수많은 환자를 정해진 시간 안에 모두 살펴보아야 했기에 회진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오늘 신임 교수를 처음 보는 환자들도 신기한 눈으로 그를 관찰하였다.

의사치고는 너무 화려한 외모를 가져서 그의 실력이 의심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풍기는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감히 바로 앞에서 실력 있는 의사 맞냐고 물어볼 용자는 없었다.


“간 절제술을 받게 될 간암 환자입니다.”

치프인 동건이 환자의 상태와 하루 사이의 변화를 상세히 최 교수에게 브리핑했다.

레지던트 1년 차인 나영은 열심히 회진 내용을 기록해야 했지만, 최 교수 눈치를 보느라 오늘은 제대로 적은 게 거의 없었다.

최태혁 교수는 첫날이라고 대충 넘기지 않았다.


“환자 CBC(혈액검사) 수치는?”

최 교수가 더 상세히 물어오자 치프 동건이 자연스럽게 그녀 쪽을 보았다.

나영이 담당하고 있는 환자였다.

평소였다면 그녀가 바로 수치를 읊었을 테지만, 지금은 최태혁 교수의 베일 듯한 시선이 그녀를 향하자 그야말로 냉동 상태의 동태가 되어버렸다.

눈이 정면으로 마주쳐 버렸다. 마치 클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쿵쾅거리던 음악 소리 대신 지금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녀의 몸을 정신없이 때려대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모두의 시선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문 선생. CBC 수치.”

동건이 그녀에게 다시 알려주며 재촉하였다.

하지만 찌푸려지는 최태혁 교수의 표정이 그녀의 눈에 더 크게 다가왔다.

머릿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 버렸다.


“아파서 마스크하고 있는 건가?”

결국 최 교수가 그녀의 상태를 물어오자 2년 차 남호진이 그녀 대신 재빠르게 설명했다.


“네, 지금 열이 펄펄 끓고 있는데도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겁니다.”

평소의 습관대로 과장을 엄청나게 섞어서.

그런 거짓말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나영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바로 앞에서 최태혁 교수가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지만 않았으면 바로 사실대로 말했을 거다.

최태혁 교수는 그녀가 진짜 열이 펄펄 나는지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프다는 그녀를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시간 낭비하지 않고 그녀를 치워버리려고 했다.


“가 봐. 여기서는 쓸모없는 거 같으니.”

그녀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쓸모없다는 말에 큰 충격에 빠졌다.

내가 왜 쓸모없어?

내가 왜!

모범생 문나영에게 일탈이란 걸 처음 알게 해 준 남자가 하루 사이에 모범생 문나영에게 무능까지 가르쳐 주고 있었다.

과연 이건 악연인가, 인연인가.

그날 하루가 지났을 때 미국에서 날아온 전설의 교수님 최태혁은 레지던트와 인턴들 사이에서 걸리면 큰일 나는 독사 교수가 되어 있었다.

바빴던 하루를 마치고 한자리에 모인 레지던트들은 입을 모아 새로 온 교수의 악랄함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치 모험담을 늘어놓듯이.


“이야! 나 수술실에서 얻어맞는 줄 알았다. 디버를 놓친 것도 아니고, 살짝 힘이 빠진 거뿐이었는데 얼마나 사람을 잡는지.”

“치프는 타이 느리게 한다고, 천 번 연습하라잖아. 우리 앞에서 치프 제대로 체면 구겼어.”

“간호사들한테도 얄짤없더라. 투약 오더대로 안 했다고 사람을 반쯤 죽여 놓더라고. 아마 그 간호사 지금도 울고 있을걸.”

모두가 하루 만에 깨달았다.

새로 온 교수님이 아주 지랄 맞은 분이라는 걸.


“…….”

그녀는 구석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정말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이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남호진이 대화에 끼지 않고 혼자 있는 그녀를 돌아보며 한마디 던졌다.


“그나마 문 선생이 제일 나았어. 그게 챙겨준 거더라고.”

회진 도중 쫓겨난 그녀를 부러워하는 동료들의 시선에 나영은 실소만 나왔다.

그와의 만남을 영화 같은 하룻밤으로 추억하며 레지던트 생활을 열심히 보내려고 했건만.

그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 최태혁이라는 이름 석 자를 말한 순간 그러는 게 불가능해졌다.

그게 챙겨준 거라고?

허 참.

영화 같은 하룻밤은 개뿔.

그 밤에 더없이 완벽했던 남자는 이제 성격 나쁜 교수님이 되었을 뿐이다.

***

나영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침 회진에 나갔다.

여전히 마스크와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어제처럼 얼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바보가 되지 말자고 다짐에 또 다짐했다.

그녀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병원에서 꼭 필요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런 소리는 또 듣기 싫었다.

오늘도 7시 50분이 되자 최태혁 교수가 정확하게 등장했다.

회진을 위해 모여 있는 의사들은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진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회진 시작하죠.”

정상적인 말을 하는 그를 오히려 거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조금의 실수라도 보이면 분명 저 입에서 신랄한 비난과 욕이 튀어나올 게 뻔했으니까.

최태혁 교수는 반듯하고 잘생긴 외모로 지랄 맞은 성격을 잘 포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걸리면 큰일 나니 조심하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리 생각하며 최태혁 교수의 뒤를 따라 병실 복도를 행진했다.


“ESR 수치는 18이고, 환자가 지난밤에 피버(fever:열)가 있어 30분 단위로 바이탈사인 체크했습니다. 지금은 삼십칠 도까지 떨어졌습니다.”

나영은 마음먹은 대로 최태혁 교수 앞에서 벙어리가 되지 않고 제대로 환자 상태를 브리핑했다.

태혁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절로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목소리가, ……익숙했다.

하지만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얼굴은 정확히 볼 수는 없었다.

태혁은 자신이 너무 그 여자에 대해 많이 생각해서 비슷한 목소리를 듣고도 반응하는 거라고 치부했다.

그날 밤의 여자가 이 병원에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것도 그의 밑에서 일하는 레지던트라고?

말도 안 되었다.

태혁은 바로 시선을 돌리고 계속 회진을 돌았다.


“오늘 내 수술방 들어올 어시 누구지?”

무사히 회진을 끝냈더니 다음 난관이 나왔다.

그녀의 담당 환자가 수술을 받았기에 나영은 오늘 최태혁 교수의 수술방에 들어가야 했다.

나영은 할 수 없이 손을 들었다.

최태혁 교수가 가까이 오라고 손가락질했다.

가능한 한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던 나영은 그의 부름에도 발이 안 떨어졌다.

그녀가 안 움직이자 다른 레지던트들이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곧 최태혁 교수의 불호령이 떨어질 거 같았으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최태혁 교수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가 직접 움직였다.

뚜벅뚜벅.

최태혁 교수가 그녀 쪽으로 점점 다가오자 나영은 다시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이러다 곧 부정맥 올 거 같았다.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우뚝.

그녀의 바로 앞에 멈추어 선 최태혁 교수는 팔짱을 끼고 거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아직도 열이 있나?”

나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프다고 하면 수술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할 거 같았으니까.

그건 그녀의 손해였다.


“내가 물으면 대답을 해!”

기어코 최태혁 교수의 목소리가 거칠어지자 주위에 있던 레지던트들이 더 긴장했다.

항상 똘똘하게 굴던 모범생 문나영이 최태혁 교수 앞에서는 저리 움츠러드는 것도 의아한 일이었다.


“그게…….”

그녀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자 태혁은 고개를 숙였다가 그녀의 정수리에서 풍겨오는 향기를 맡고 멈칫했다.

이 허브 향기.

분명 그날 밤 그 여자한테서 맡았던 향기였다.

샴푸는 얼마든지 같은 걸 쓸 수 있다고 하지만, 아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느꼈던 기시감 때문에 태혁은 더 예민해졌다.

그는 충동적으로 명령했다.


“마스크 벗어 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