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하룻밤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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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하룻밤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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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하룻밤의 남자
2022.10.07.
키스하고 싶다는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나영은 지독한 현기증을 느꼈다.
아무래도 취할 정도로 마신 술 탓인 거 같았다.
절대 이 남자 때문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전 그만 집에 가봐야 할 거 같아요.”
불안해지니까 저절로 회귀본능이 살아났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몸이 심하게 휘청였다.
이렇게 몸이 말을 안 들을 정도로 취했을 줄은 몰랐던 나영은 크게 당황했다.
그녀의 팔을 어느새 그의 손이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방금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기에 나영은 놔달라는 말을 못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주 선 남자는 마주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런 사람을 보고 빛바랜 사진첩처럼 희미해진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같은 사람일 리 없다. 같은 사람이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건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너무 대단한 인연이 되어 버리니까.
오늘 만나서 오늘 헤어지는 사이였으니 나영은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거다.
“진짜 지금 갈 거예요?”
“네, 내일이 첫 근무라 늦으면 안 돼요.”
태혁도 내일이 첫 출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이름조차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도 고집스럽게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졌다.
“내 이름 안 궁금해요?”
그의 질문에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하지만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없이 가뿐하게.
그게 그의 자존심을 제대로 할퀴었다.
그 역시 간다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건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태혁은 그녀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바로 놓았다.
“알았어요. 그럼 잘 있어요.”
태혁은 여자보다 먼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원래 있어야 했던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생각해 보면 오늘 차현이 데려온 여자들이 오히려 더 예쁘고, 놀 줄도 알았다.
그한테 어떠한 감정도 느끼게 하지 못했다는 것만 빼면 훨씬 괜찮다.
그렇게 억지로 자기 합리화를 하며 계단을 올라가려고 했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본 태혁은 그를 쫓아온 그녀를 보고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는 그를 붙잡고 싶어서 쫓아온 건 아니었다.
“아까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났어요.”
그녀가 가리킨 쪽을 보니 정말 아까 그놈이 무리와 함께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와 그녀가 떨어지기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나 보다.
그녀의 안전을 먼저 책임진다고 말한 건 그였다. 그리고 태혁은 지금도 같은 마음이었기에 몸을 돌려 계단에서 내려왔다.
“가요.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태혁은 그녀를 데리고 클럽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심장을 때려대던 음악 소리가 사라지고 도시의 소음이 깔렸다.
태혁은 그녀가 탈 택시까지 직접 잡아주었다.
결국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듣게 된 말은 감사 인사였다.
“고맙습니다.”
태혁은 그 말이 썩 달갑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영도 그와 눈을 똑바로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안 갈 거냐고 택시 기사가 재촉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서로 말도 없이 마주 서서 한참을 있었을 거다.
탁.
그가 택시 문을 닫아주자 택시는 곧 출발했다.
태혁은 멀어지는 택시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차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10분 내로 온다고 했으면서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알아?
전화를 받자마자 차현은 그를 구박했다.
익숙한 차현의 목소리를 들으니, 여자를 만났던 일이 꼭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어떻게 꼬시는 거야?”
여자는 이미 떠나버렸는데, 태혁은 이제라도 자신의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서 차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
“너 그거 잘하잖아.”
오늘 그가 못한 건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인 거 같았다.
-내가 알려주면 꼬실 여자는 있어?
“있었는데 갔어.”
-하하하하하하.
그의 대실패를 듣고 차현은 시원하게 웃었다.
그가 생각해도 웃겼다. 차현한테 이런 소리나 하는 자신이. 여자한테 차인 최태혁이.
-어디야? 내가 갈게.
“클럽 앞.”
떠난 여자 대신 오랜 친구를 기다리며 서울의 야경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택시 한 대가 길 건너편에 멈추어 섰다.
택시에서 내리는 여자를 보고 태혁은 천천히 몸을 세웠다.
아직은 봄보다는 겨울에 더 가까운 쌀쌀한 밤이었는데, 길을 건너 그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여자를 보고 있으려니 몸 안에 열감이 퍼졌다.
오늘 태혁은 그녀를 통해 많은 감정을 느꼈는데, 이 순간의 감정에는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하는 건지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기쁜데,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더 깊고, 더 다채로운 마음이 그의 안에서 요동쳤다.
우뚝.
그의 앞에 멈추어 선 그녀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설마 제가 다시 올 줄 알고 기다린 거예요?”
나영은 택시 안에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더 이상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녀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가 끝까지 그녀를 붙잡았다면 오히려 그녀는 거리낌 없이 떠날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가 전혀 그러지 않아서 나영은 더욱 미련이 남아 버렸다.
어차피 이제 그녀의 자유는 몇 시간도 안 남았는데, 아직 그녀의 자유가 끝나지 않아서 나영은 충동을 이기기 힘들었다.
결국 그녀는 차를 돌려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병원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
4년 동안 이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을 때 후회가 남지 않게.
***
따사로운 3월의 아침 햇살이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지자 나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낯선 호텔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나영은 잠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나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보았다.
그곳에는 남자가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은 남자의 몸은 밝은 곳에서 보니 더 탄력이 넘치고 아름다운 다비드 조각상 같았다.
나영은 그가 깨지 않게 숨을 죽이고 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약 택시를 타고 그대로 병원으로 돌아갔으면 보지 못했을 얼굴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젯밤 두 사람은 조용한 장소로 자리를 옮겨 2차로 술을 마셨다.
취할수록 그녀는 웃음이 많아졌고, 남자가 점점 잘생겨 보였다.
아니, 착시현상이 아니라 정말 잘생긴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작정하고 그녀를 유혹하는데, 남자에게 면역력이 없는 그녀가 어떻게 끝까지 체면을 유지하며 버틸 수 있었겠나.
드문드문 기억이 끊긴 부분도 있어서 나영은 정말 그녀에게 벌어진 일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침대 위에서 헐벗고 누워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부정할 수 없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어제 처음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 버렸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어젯밤 자제력을 잃을 만큼 취했고, 서로의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다.
누구의 책임이냐고 따지는 것도 무의미한 일탈이었다.
오늘부터 지옥의 레지던트 생활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연애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니 일탈은 여기까지만.
이 남자와도 여기서 작별해야 했다.
설령 이 순간이 그를 보는 마지막이 된다고 해도 나영은 다른 선택이 없었다.
“만약 4년 뒤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내 이름 가르쳐 줄게요.”
자고 있어서 듣지 못하는 남자에게 일방적인 약속을 하고 나영은 옷을 챙겨 입고 호텔을 떠났다.
이제 병원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오늘 한강대학교 병원은 레지던트 1년 차들의 근무가 시작되는 것보다 더 떠들썩하고 대단한 일이 있었다.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 인정받은 외과 의사가 모교인 한강대학교 병원으로 금의환향했다.
레지던트 시절부터 이름을 날린 전설이라고 하는데, 이제 막 레지던트를 시작한 나영은 믿기 힘들었다.
실수만 안 해도 다행인 게 레지던트였다.
인턴 딱지 떼자마자 완벽한 의사가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한 명의 의사를 길러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기에, 처음부터 잘나가는 의사였다는 신임 교수가 나영은 반쯤은 사기꾼처럼 느껴졌다.
분명 부풀려진 소문일 거다.
“내가 너 남자랑 같이 있는 거 보고 바로 자리 피해준 거잖아. 잘 됐어?”
어제 클럽에서 먼저 사라진 승희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자마자 그 남자에 관해 물었다.
나영은 잠시 심장이 크게 울렸지만 바로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아무 일 없었어.”
그녀 인생에서 가장 큰 사고를 쳤지만, 절친인 승희한테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승희까지 알게 되면 더더욱 잊기 힘들 거 같았으니까.
그녀의 자유는 이제 끝났다.
그러니 이름도 모르는 남자 생각은 여기서 멈추어야만 했다.
“진짜? 엄청 괜찮은 남자 같던데.”
승희는 안경테를 손으로 밀어 올리며, 어제 안경을 안 껴서 남자 얼굴을 제대로 못 본 게 정말 아쉽다고 했다.
나영은 그냥 웃어넘겼다.
다행히 승희도 더 이상 클럽의 남자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병원 동료 의사들 사이의 연애 이야기로 관심을 돌렸다.
승희가 그녀의 팔을 툭 치며 앞자리에 앉아 있는 미모의 여의사를 손으로 가리켰다.
“오늘 오는 신임 교수님 윤이나 교수랑 유명한 CC였대. 윤 교수님 오늘 좀 들떠 보이지 않아?”
훌륭한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 연애까지 하셨다고?
나영은 오늘 병원에 오면서 포기해야 했던 근사한 남자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며 괜히 기분이 안 좋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전설의 교수님과 달리 레지던트 생활과 연애를 동시에 잘할 그릇이 못 되었다.
둘 다 엉망진창이 될 거다.
그러니 이름도 모르고 헤어진 건 정말 잘한 거라고 스스로 또 한 번 더 말했다.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었으면 이미 헤어졌겠지.”
나영은 시니컬하게 받았다.
그녀가 현실을 받아들여서 멋진 남자를 놓친 것처럼 저들도 비슷했을 거라고.
“그러니까 오랜만에 만나면 더 애틋하지 않을까? 와! 완전 드라마잖아.”
승희는 이미 남의 연애에 푹 빠져서 혼자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남의 연애 이야기만으로도 행복해 보이는 승희가 좀 부러워졌다.
나영은 밤잠이 부족해서 의자에 몸을 기대며 잠시 눈을 감았다.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술렁이던 대회의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자 나영은 전설의 교수님이 등장한 거라는 걸 청각으로 먼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까만 어둠이 걷히며 대회의실의 전경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강단에 외과 과장 박인호가 서 있었고, 그의 옆에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 날아온 젊은 신임 교수였다.
그 누구한테든 선한 인상을 주는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위압적인 포스는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신임 교수는 꼭 이 병원에 사람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 이 병원을 정복하려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만만한 신임 교수의 수려한 얼굴을 본 순간, 나영은 가파르게 동공이 조여들었다.
처음엔 그녀가 눈을 뜬 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했다.
이게 현실이라면 나영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남자였다.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4년 뒤를 기약하며 쿨하게 헤어졌건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이렇게 병원에서 딱 마주치다니.
그것도 하늘 같은 교수님이 되어 그녀의 앞에 뚝 떨어졌다.
이건 운명적 만남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앞으로 내 몸을 다 본 저 남자 밑에서 전공의 수련을 해야 한다고?
나영은 낯빛이 창백해지며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었다.
“전공의들은 처음 봤을 테니까, 정식으로 자기 소개하지.”
앉은 자리에서 하얗게 재가 되어가고 있는 그녀와는 상관없이 신임 교수의 소개가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그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긋했던 어젯밤과는 달리 절대 굽히지 않는 권위가 담긴 당당한 목소리로.
“앞으로 간담췌 외과에서 일하게 될 최태혁입니다.”
끝까지 묻지 않은 이름이었는데, 모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 이름이었는데, 이젠 그의 이름까지 알게 되니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룻밤의 남자가 허락도 없이 그녀의 일상 속으로 침범해 와서 확인 사살을 하고 있었다.
너 망했다고.
“봐봐. 최 교수님 나타난 순간부터 윤이나 교수님 표정이 확 바뀌었어.”
승희는 여전히 교수님들의 사랑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나 나영은 승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당장 그녀 코가 석 자였다.
어떻게 해야 병원에서 최태혁 교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을지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전과해야 하나?
그런데 다른 과로 옮긴다고 해도 외과 교수와 마주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났다.
결국 그녀가 이 병원을 떠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들키게 되어 있다.
러시안 룰렛처럼.
나영은 어제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에게 제일 처음 물을 거다.
직업이 뭐냐고.
의사라는 것만 알았어도 뒤도 안 돌아보고 튀었을 텐데.
순간 대회의실을 둘러보던 최태혁 교수의 시선이 그녀가 앉아 있는 쪽을 향하자 나영은 숨이 안 쉬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