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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키스하고 싶은데 (1/84)


1화. 키스하고 싶은데
2022.10.03.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쿵 쿵 쿵 심장을 때려댔다.

그녀는 원래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차분한 성격이었지만, 오늘만은 클럽에 가자는 승희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매일 사방이 하얀 벽으로 꽉 막힌 병원 생활을 하다 보니 그녀도 하루쯤은 해방감을 느끼고 싶었나 보다.

내일부터는 지옥의 레지던트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럼 앞으로 4년은 자유가 없다고 보아야 했다.

그러니 오늘 하루쯤은 병원을 뛰쳐나와 마지막 자유를 마음껏 만끽해야 앞으로의 4년을 버틸 힘이 생길 거 같았다.


“1시간 동안 벌써 세 번이나 거절했어. 너 오늘 기록 세우겠다.”

승희는 합석하자는 제안을 거절당하고 돌아가는 남자를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영은 개의치 않고 술을 마셨다.

그녀는 오늘 그냥 기분 좋게 술만 마실 생각이었다.

남자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내일부터 레지던트 시작하면 연애할 시간은 커녕 잠잘 시간도 없는데 여기서 굳이 새로운 만남을 가져보았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녀는 낯선 사람과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우리 벌써 스물일곱이야. 레지던트 끝나면 서른이 넘는다고. 어쩌면 오늘이 네가 20대에 제대로 남자를 만날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는데 진짜 관심 없다고?”

“그래서 클럽이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확실하긴 해?”

“내 눈에는 잘생긴 남자, 잘 노는 남자, 돈 많은 남자 다 여기 모여 있는 거 같은데. 내가 너처럼 예뻤으면 내 마음에 드는 남자한테 바로 다가가서 춤추자고 했을 거야.”

평소 로맨스 소설 읽는 게 유일한 취미인 승희는 분명 낭만적인 만남을 꿈꾸며 오늘 클럽에 온 거 같았기에 나영은 웃으며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승희가 주위의 남자들을 구경하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녀의 어깨를 빠르게 손으로 두드렸다.


“어머, 어머, 웬일이야!”

그녀의 손이 꽤 매웠기에 나영은 살짝 한쪽 눈을 찌푸리며 승희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나 저 남자 알아. 영화감독 차현이잖아! 세상에. 옆에 있는 여자들도 엄청 예뻐. 설마 배우들인가?”

영화감독 차현이라면 그녀도 미디어를 통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단 두 편의 영화로 천재 감독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젊은 영화감독이었다.

나영은 승희가 손으로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높은 곳에 유리 벽이 세워진 룸이 있었다.

룸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세련되고 패셔너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영화감독 차현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남자였다.

그녀의 자리에서는 뒷모습밖에 안 보였지만, 바로 그 모습이 그녀에게 아주 오래도록 잊고 있던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호랑이탈을 벗고 땀 흘리던 남학생의 뒷모습.

그를 부르려고 애를 썼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그 답답함까지.

벌써 17년 전이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건 처음이라서 나영은 멍하니 남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쿵쿵쿵.

음악의 비트에 맞추어 뛰던 심장이 또 다른 진동으로 그녀의 몸을 울렸다.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돌리며 승희에게 빠르게 말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같이 갈까?”

“아냐.”

나영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고, 승희는 SNS에 영화감독 차현을 봤다는 자랑 글을 올리는데 정신이 팔렸다.


***

태혁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3년 만에 돌아온 한국이었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되어서 밤이 낮 같기도 하고, 낮이 밤 같기도 했다.

20년 지기 친구 차현이 귀국 축하를 해주겠다고 불러내지 않았다면 집에서 잠이나 자고 있었을 거다.

안 그래도 골이 울리는데 이런 시끄러운 클럽으로 데리고 오다니.

투덜거리는 그의 시선에 사람들 사이를 뚫고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평범한 흰색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오히려 클럽의 화려한 조명만큼이나 튀게 입은 여자들보다 더 눈에 잘 띄었다.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뻗은 길고 가는 목은 발레리나처럼 우아했고, 가냘프면서 굴곡 있는 몸은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도 단정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있었다.

얼굴은…….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주위의 사내놈들이 시선을 못 떼는 걸 보니 아마도 예쁜가 보다.

혹시라도 여자가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태혁은 계속 쳐다보았다.

큰 기대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선을 쉽게 뗄 수가 없었다.


“뭘 보는 거야?”

차현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그의 팔을 꾹 찔렀다.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온 그를 위해 일부러 마련한 자리였다.

요즘 가장 핫한 클럽이었고, 그가 부른 여자들은 미모와 유명세를 전부 갖춘 셀럽들이었다.

태혁을 위해 즐기며 놀 수 있는 분위기를 제대로 만들어 주었건만, 정작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인 태혁은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차현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감독님 친구분은 과묵한 성격이신가 봐요?”

태혁이 말이 없으니 여자들은 차현을 통해서 그에 관해 물었다.

그것부터 이미 망한 것이라 차현은 못마땅한 눈으로 태혁을 쳐다보았다.

클럽에서 그냥 재미있게 놀라는 게 그리 어려운 요구란 말인가.


“나 화장실 간다.”

태혁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고 하자 차현은 당부했다.


“10분 내로 돌아와.”

대답 없이 떠나는 태혁의 뒷모습을 차현은 불안한 눈으로 좇았다.

설마 이대로 튀려는 건 아니겠지?

그가 초대한 다른 사람만 없었어도 차현은 태혁을 쫓아 화장실까지 갔을 거다.

***

하필 클럽에 있을 때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 와서 나영은 크게 당황했다.

집에서는 모범생 장녀 이미지였기에, 부모님은 그녀가 클럽에 다닐 거라고 전혀 생각도 못 하실 거다.

특히나 아버지가 아시는 날에는 큰일 났다.

나영은 과감히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지금은 전화를 안 받는 게 효도하는 거 같았기에.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던 나영은 이쪽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또 보네요.”

첫 번째로 합석을 거절했던 남자였다.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어쩐지 일부러 그녀의 뒤를 쫓아온 거 같아서 거슬렸다.


“합석도 계속 거절하고 춤도 안 추던데. 그럼 클럽 무슨 재미로 와요?”

나영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남자를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팔이 붙잡혔다.


“이거 놔요.”

그녀는 바로 얼굴이 차갑게 굳으며 거부의 말을 했지만, 남자는 웃으며 그녀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자꾸 그러면 나도 화나요. 그냥 대화하자는 건데 왜 이리 예민한데.”

힘을 주어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 좀 반반하다고 사람 무시하지 마. 너 같은 여자들은 꼭 힘을 써야 말을 듣더라고.”

도를 넘는 남자의 야만적인 태도에 나영은 속이 울렁거리며 구역질이 올라왔다.

승희를 따라 그녀의 발로 클럽에 온 게 지독하게 후회되는 순간.


“너 같은 놈들도 꼭 힘을 써야 말을 듣던데.”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며 그녀를 붙잡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힘을 주어 움켜잡았다.

그제야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남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태혁에게 버럭 화를 냈다.


“이거 놔!”

하지만 태혁이 손에 더 힘을 주자 남자는 신음을 흘리며 사정했다.


“아악! 자, 잘못했어요. 제발 놔주세요!”

나영은 놀란 눈으로 갑자기 나타난 태혁을 쳐다보았다.

그가 입고 있는 짙은 푸른색 슈트는 분명 조금 전 영화감독 차현 옆에 있던 남자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뒷모습에 시선이 갔던 남자는 오히려 앞모습이 더욱 수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매끈하게 뻗은 눈썹 아래 길고 선명한 눈매는 우아했고, 그 안에 자리 잡은 암갈색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오뚝한 콧날과 날렵한 턱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그의 얼굴에서는 남성미가 흘러넘쳤다.

보기 드문 미남자였다.

그러나 그의 뒷모습을 봤을 때처럼 그녀의 마음이 요동치지는 않았다.

그의 얼굴은 그녀에게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태혁이 손을 놓자마자 남자는 작게 욕설을 하며 도망쳤다.

도망치는 남자를 바라보던 태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자 나영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

“…….”

태혁은 짧게 입꼬리를 올렸다.

뒷모습만 보았던 여자는 역시나 얼굴이 예뻤다.

새하얀 피부는 도자기처럼 반질거렸고, 큰 눈 안에 박혀 있는 까만 눈동자는 청량하게 맑았다.

버선코처럼 뻗은 콧날과 동그란 얼굴은 동양 미인의 단아함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기 힘든 성격을 가진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꽤 희한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바로 친근함이었다.

언제 봤다고.


“그 남자 일행 데리고 올지도 몰라요.”

나영은 도망친 남자의 일행을 떠올리며 태혁에게 알려주었다.


“나도 일행 있어요.”

“하지만 유명인이 이런 곳에서 싸우게 되면…….”

그의 일행이 영화감독 차현인 걸 아는 나영은 말하다가 ‘아차’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그를 몰래 쳐다봤던 걸 그녀의 입으로 까발린 셈이었다.

태혁도 그녀가 그의 일행을 이미 알고 있는 걸 깨닫고 눈빛이 가늘어졌다.

차현은 그와 달리 사교적인 성격이라 어릴 때부터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기는 했다.

그게 부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갑자기 그게 왜 짜증이 나는 건지.


“저는 친구가 걱정되어서 가봐야겠어요.”

나영은 서둘러 그를 피해 복도를 걸어갔다.

그런데 누군가 쫓아오는 기분이 들어서 옆을 보니 그가 바로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먼저 가세요.”

그는 그의 일행에게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나 그쪽 따라가는 건데.”

“네? 왜요?”

나영은 당황해서 눈이 커졌다.

남자의 차분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마치 그녀가 별 거 아닌 일로 놀란다는 듯이.


“남의 일에 개입했으니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게 맞는 거 같아서.”

지금 이 남자가 날 책임지겠다고 하는 거야?

만난 지 5분도 안 된 남자의 입에서 듣게 된 말이 나영을 멘붕에 빠트렸다.

태혁의 시선은 아까 나영에게 치근대던 남자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남자가 또 나타나 그녀를 괴롭힐 수 있으니 곁에 있겠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이 클럽을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승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영은 서둘러 승희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다가 메인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는 승희를 발견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이 즐거워 보였기에 나영은 승희가 춤을 다 추고 들어올 때까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고개를 돌리던 나영은 어느새 승희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움찔했다.

그는 그곳이 처음부터 자기 자리였다는 듯이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영은 힐긋 그가 원래 있었던 룸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현은 안 와요.”

그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던 나영은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태혁이 짧게 입꼬리를 올리며 놀리듯이 말했다.


“실망한 얼굴인데.”

나영은 별 대꾸 없이 맥주를 그의 앞에 있는 잔에 가득 따라주었다.


“아까 도와준 거 이 술로 갚을게요.”

“그런 거라면 맥주로는 부족한데.”

그의 말에 나영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직 월급을 못 받아서 돈이 별로 없어요.”

“걱정 마요. 나한테 돈 많은 친구가 있으니까.”

라고 한 뒤 웨이터를 부른 그는 정말 비싼 양주를 주문했다.

쪼르르르르.

술잔에 차오르는 호박색 술을 쳐다보던 나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술 마시러 여기 오긴 했지만, 설마 이런 럭셔리한 술을 마시게 될 줄은 몰랐다.

태혁이 술잔을 그녀의 앞으로 밀었다.


“마셔봐요.”

나영은 술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가 술 마시기를 주저하자 태혁은 자신의 술잔을 들어서 먼저 마셨다.


“술에 뭐 안 탔어요.”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그녀를 해칠 사람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의 뒷모습이 17년 전 그 오빠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일까.

그의 시선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고, 그의 목소리에 안정감을 느꼈다.

언제나 경계심을 세우고 뾰족하게 세워져 있던 가시들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기분이었다.

나영은 두 손으로 술잔을 잡고 들어 올렸다.

술을 마시기 직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매끄럽게 휘어지는 남자의 눈웃음이 그녀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식도를 타고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간 도수 높은 술이 그녀의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제야 그녀는 진정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자유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12시간이 남아 있었다.

***

술에 취한다는 건 생각보다 불쾌하지 않았고, 오히려 몸과 마음에 긴장감이 사라졌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가 타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얼굴을 보고 산 동료들보다 오늘 처음 본 그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게 참 황당하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이름도 몰랐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서 일부러 묻지 않았고, 그녀의 이름 역시 일부러 가르쳐 주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함께 마시는 술이 만족스러우면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 그녀의 자유 시간은 10시간이 남아 있었다.


“만약 10시간 뒤에 지구 종말이 온다면 지금 뭘 할 거예요?”

그녀의 세기말적 질문에 남자는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제 질문이 유치해요?”

“아니, 귀엽네요.”

그가 놀린다고 생각했기에 나영은 그를 외면하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이대로 작별 인사만 하고 헤어지기 아쉬워서 물어본 것이었다.

그래, 적당히 하자.

오늘 만나서 오늘 헤어지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안 되었다.


“난 키스하고 싶은데.”

멈칫.

술잔을 입에 대던 나영은 눈동자만 움직여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턱을 괴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랑.”

처음엔 호기심을, 그다음엔 보호본능을, 그리고 친근함을, 본능적으로 욕망을.

그녀로 인해 생겨난 다양한 감정들이 태혁의 무감각한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녀는 꼭, 그의 마음에 함부로 던져진 불씨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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