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너를 대신할 무언가 (63/63)


#62화. 너를 대신할 무언가
2023.08.04.


잠들기까지 몇 번의 키스를 더 나누었다.

딱 그뿐이었다.

도한은 사랑에게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침대에서 서로를 안은 채 잠이 들었고, 사랑이 먼저 아침을 맞았다.

윤재의 강요에 6시면 운동하러 나가다 보니 습관처럼 눈이 떠졌다.

사랑은 제 머리 아래로 팔을 내어 준 채 곤히 자고 있는 도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세수를 하고, 그가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아 둔 블라우스로 갈아입었다.

지난밤 도한이 티셔츠를 빌려준 덕에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었다.

블라우스 단추를 채운 사랑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지우가 보낸 메시지가 열 개도 넘었다.

정말 남자랑 같이 있냐, 설마 지도한이냐, 너 미쳤냐…… 등등.

딸이 남자 친구와 외박하는 걸 알아 버린 엄마처럼 걱정이 흘러넘쳤다.

뭐라 답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침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벌써 일어났어.”

대학교 때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그를 위해 모닝콜을 해 줬었는데, 아침잠이 많은 건 여전했다.

사랑은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넣고 침대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집에 가려고요.”

“지금?”

“네. 혼자 갈 테니까 더 자요.”

일찍 들어가기라도 해야 지우의 잔소리가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다.

남자하고 같이 있다고 했으니 밤새 오만가지 상상을 펼쳤을 거다.

사랑이 그만 일어나려는데 도한이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 힘에 이끌려 도로 침대에 눕게 된 사랑이 그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데려다줄게.”

데려다주겠다는 사람이 일어날 생각은 않고 자신을 더 꽉 끌어안고 있자 사랑은 웃음이 나왔다.


“언제요?”

“오늘 안에.”

“네?”

그냥 지금 혼자 가고 말겠다며 그녀가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잠은 잘 잤어?”

다정한 목소리에 사랑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와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건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옆에서 과연 잠을 잘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졸음이 쏟아졌고 눈이 감겼다.

남자의 가슴에 안겨 잠든다는 게 이토록 따뜻하고 포근한 기분인지 미처 몰랐다.

비록 어젯밤엔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느낌이 들었다.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사랑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가 손에 힘을 풀었다.

시선이 마주하자 사랑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사귀는 거예요?”

“뭐?”

“내가 오빠 여자 친구가 되는 건가 싶어서요.”

그녀에겐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스무 살 때 그와 사귄 기간은 고작 두 달이었다.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라서, 정말 도한과 연애한 게 맞는지 헤어진 후에 끊임없이 의심했다.

그래서 그를 다시 만난 지금 꼭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연애를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인지.

그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야 또다시 헤어지더라도 상처를 덜 받을 테니까.

이미 한 번 크게 다친 가슴은 제 주인인 그녀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당연한 걸 뭘 물어. 네가 나 책임져야지.”

“……책임질 일은 안 했는데요.”

“손 주면 다 준 거지. 안 그래?”

도한이 사랑의 손에 깍지를 끼고 보란 듯이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도 들은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 그런데요.”

“나는 그래. 아무한테나 내 손 허락 안 하거든.”

“그건 좀, 억지 아니에요?”

“억지 아니고 사실이야. 1분 이상 손 잡은 여자는 네가 처음이니까.”

도한은 여자 친구와 팔짱을 낀 적은 있어도 손을 잡은 적은 없었다.

여자 친구가 잡더라도 그가 곧바로 놓아 버렸으니까.

맞잡은 손의 느낌이 낯설어서 싫었다.

손바닥을 통해 서로의 온기를 나눈다는 게 어쩐지 불편했다.

키스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어도 손을 잡는 건 어려웠다.

키스는 몸을 뜨겁게 하지만 손을 잡는 건 가슴을 따뜻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을 주는 연애는 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것만큼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사랑은 달랐다.

그녀의 작은 손만 보면 도한이 먼저 제 손을 뻗었다.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꼭 붙잡고 싶어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릴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그걸 누가 믿어요?”

“안 믿으면 할 수 없고.”

“……정말이에요?”

도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전 여자 친구들이 왜 그와 헤어질 때 지독하다는 말을 남겼는지 알 만했다.


“그런데 저는 왜…….”

사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부터 그가 제 손을 잡을 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못 믿을 수밖에.


“말했잖아. 아무한테나 허락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는 건, 그에게 나는 특별한 존재였다는 의미인가.

가슴이 벅차오른 듯 사랑의 두 눈에 물기가 조금 번졌다.


“이래 놓고 나랑 안 사귀겠다고?”

다시 한번 그가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리며 투정을 부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사랑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런 얼굴은 또 처음이었다.

이젠 그가 학교 선배일 때처럼 마냥 어렵지만은 않았다.

조금 더 편하고, 가끔은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가 일부러 놀려 보려고 대답하지 않자 도한이 몸을 일으켜 침대를 내려갔다.

그가 책상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사랑에게 돌아왔다.

그러곤 그녀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도한의 손바닥 위에는 반지가 놓여 있었다.

얼마 전 그가 그녀에게 준 생일 선물과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


“내가 네 남자 친구라는 증거를 남겨야겠어.”

사랑은 멀뚱히 반지를 내려다봤다.

정말 커플링이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반지엔 Do Han, 그의 손에 있는 반지엔 Love가 각인되어 있었다.

나랑 헤어지고 맞췄다고 했던가. 서로의 이름을 새겨서.

오랫동안 끼고 다녔지만 내가 또 오해할까 봐 무서워서 빼놓았다고.


“네가 직접 끼워 줘.”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사랑이 도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가 왼손을 손등이 보이게 내밀고 있었다.


“이걸 정말 끼고 다니겠다고요?”

“내 손까지 잡았으면서 나랑 연애할 생각은 없다고 발뺌할까 봐.”

그건 내가 할 말인데.

한 침대에서 잠까지 자 놓고 사귀는 건 아니라고 할까 봐 불안했는데.

사랑은 도한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그런 건 언제나 내 몫이었으니까.

지독한 지도한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회사에서는 어쩌려고요. 갑자기 반지 끼고 나타나면 사람들이 여자 친구 생겼냐고 물어볼 텐데. 안 그래도 지도한 씨가 보고 싶다는 그 여자가 누군지 다들 궁금해하는데 뭐라 그럴 거예요?”

“그 여자가 너라는 거, 이제는 밝혀도 되잖아.”

“그건 싫어요.”

사랑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한과 헤어지고 혼자 학교에 남았을 때 주위의 시선들이 불편했다.

‘지도한이랑 사귀었던 신입생’이라는 꼬리표를 졸업할 때까지 달고 다녔다.

회사에 다닌 후에야 겨우 벗어났는데, 또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직장에서만큼은 개인적인 일로 관심받고 싶지 않았다.

특히 연애 문제라면 더욱더.


“그럼 계속 비밀로 하겠다고?”

“네.”

“언제까지.”

도한은 고개를 내린 사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감쌌다.


“나 너랑 안 헤어져.”

이별 후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싶어 그녀가 놀란 눈으로 도한을 바라보았다.


“네가 싫다면 얘기 안 할게. 그런데 반지는 끼워 줘. 늘 끼고 있던 거라 없으니까 허전해.”

“정말 늘 끼고 다녔어요? 5년을?”

“너를 대신할 게 뭐라도 있어야 했으니까. 근데 네가 이 반지 때문에 오해하게 될 줄은 몰랐어. 네가 커플링이냐고 물었을 때, 어쨌든 너하고의 커플링은 맞으니까 아니라는 대답을 못 했던 것뿐인데.”

“당연히 오해할 수밖에요. 남자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유학을 떠나게 됐다고 사라져 버렸는데 버젓이 손에 반지를 끼고 나타났잖아요. 그것도 커플링을. 어느 여자가 오해를 안 해요? 다른 여자가 생겨서 거짓말까지 해 가며 헤어졌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사랑은 5년 전 호텔에서 도한을 마주했을 때가 떠올라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그날 로비에서 수호를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도한을 미워하는 대신 그리워하기만 했을까.

어느 쪽이 더 좋았을지 생각하던 사랑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도 나한테 다른 여자는 없어.”

사랑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을 깜빡였다.

나랑 헤어지고 아무도 안 만났다고 하더니 진짜였나.

불현듯 어제 그가 사랑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또한 진심이었나.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건가.

뒤늦게 사랑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도한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반지, 어서 끼워 달라고.

사랑은 머뭇머뭇 손을 뻗어 반지를 집었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늘 끼고 있었다는 말을 증명하듯 반지는 꼭 맞아 들어갔다.


 
반지를 끼고 있는 지도한의 손이라니.

그것도 저와의 커플링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랑은 순간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가가 붉어졌다.


“나는, 나는…….”

사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아무래도 반지를 낄 수 없을 것 같다고.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는 걸 모두에게 알릴 자신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반지를 끼고 있는 그의 손 앞에서는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를 도한이 안아 주었다.


“너는 나중에. 나중에 껴도 돼.”

이 또한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마음속으로 읊조린 그가 애정이 담긴 손길로 사랑의 등을 쓸어내렸다.

* * *

오전 11시 30분.

도한의 차를 타고 집 앞에 도착한 사랑이 시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찍 출발하려고 했는데 그가 한참을 안고 놔주지 않는 바람에 이제야 오고 말았다.

그사이 핸드폰은 바쁘게 울려 댔다.

지우가 언제 들어올 거냐고 수없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사랑은 자신도 알 수가 없으니 제대로 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 도한을 실망시킨 일이 미안해서 그가 보내 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그랬더니 9시가 넘어서야 놓아주고선 아침 식사를 하러 가자며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지우한테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그녀가 더 크게 한숨을 내쉬자 도한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강지우가 네 언니도 아닌데 뭘 그렇게 무서워해.”

“무서운 게 아니라 민망하잖아요.”

“뭐가.”

“남자랑 같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오해하고 있을 거 아니에요.”

“무슨 오해.”

“……그, 남자랑 잤다고.”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직설적으로 말하자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도 민망하긴 마찬가지라 사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강지우한테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닐걸.”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같이 사는 친구 얼굴을 어떻게 보나 싶어 풀이 죽은 그녀가 슬며시 시선을 들었다.


“그 남자가 나라는 거. 강지우가 싫어하는.”

“……아, 그렇네.”

너무 쉽게 인정하는 그녀의 대답에 도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확인받고 나니 기분이 씁쓸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해서.

그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뒤늦게 본 사랑은 수습에 나섰다.


“오빠를 싫어한다기보다 내가 힘들어하는 거 옆에서 다 지켜봐서 그래요. 내가 첫사랑 못 잊는 거…….”

“많이, 힘들었어?”

기분을 풀어 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그의 얼굴에 더 그늘이 내려앉았다.

당황한 사랑은 어쩔 줄을 몰라 대답하지 않았다.

힘들었다고 하면 더 미안해할 테니.


“나, 못 잊었었어?”

질문 하나를 피했더니 더 곤란한 물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못 잊었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인간은 생각도 안 날 거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다른 남자를 만나면 내가 언제 그런 인간을 좋아했었나 희미해질 거라는 말도 거짓이었다.

언젠가는 마음속에서 지워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더니 모두 틀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그리웠고, 가슴에 새겨진 첫사랑은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심장의 절반을 그가 가져갔음에도 나머지 반쪽에 그의 그림자는 남아 있었다.


“잊을 수가 없었어요.”

사랑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제 다 지난 일이라고, 그러니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나한테는 오빠가 첫사랑이었잖아요.”

다른 사람들도 첫사랑은 아팠을까.

그렇다면 이 남자 역시 가슴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여자가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사랑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꿀 겸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지우한테 쫓겨나면 어쩌죠? 남자 친구까지 빌려 줬는데 일이 이렇게 돼 버렸으니.”

“그럼 더 좋고.”

“네?”

“내가 너 데려가게.”

같이 살자는 말로 들려서 사랑의 얼굴이 붉어졌다.

도한과 한집에서 산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졌다.

서둘러 인사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 들어가 볼게요. 내일 봐요.”

“그래.”

도한은 차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사랑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조금 전 그녀의 말 중에 한 부분이 마음에 얹혔다.


‘첫사랑이었잖아요.’

사랑이 저로 인해 힘들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그녀에게 과거형이 되어 버렸다는 게 더 가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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