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밤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62/63)


#61화. 밤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2023.07.31.



 
도한은 사랑과 입술을 맞물린 채 고개를 조금 비틀었다.

그러다 상처가 건드려져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깜짝 놀란 그녀가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 미안해요.”

사랑은 그새 잊고 있었다.

그와 입을 맞추는 게 오랜만이라 입술에 난 상처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팠을 텐데.

제 잘못으로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어쩔 줄을 몰랐다.


“네가 왜.”

괜찮다고 도한이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사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실은, 윤재하고 사귄다는 것 말고 거짓말한 거 또 있어요.”

그가 손을 멈췄다.

무슨 거짓말인지 듣기가 두려운 눈빛이었다.

정윤재가 남자 친구라는 말도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아서 초조해졌다.

하기 힘든 말인지 그녀가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나 이제 키스 잘한다고 했던 거요.”

“……뭐?”

전혀 예상 밖이라 도한이 당황해하며 되물었지만, 사랑은 그의 반응을 황당함으로 오해했다.

이 남자 저 남자 막 만나서 이제 키스 잘한다고 허세까지 부렸건만 형편없는 실력을 고스란히 들키고 말았으니까.

키스 못 하는 여자는 별로라고 했던 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사랑은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정말 키스 잘하는 건 타고나는 건지, 도한은 다른 남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상처로 인해 불편할 텐데도, 이 정도 아찔함을 선사해 주니 자신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아무도 안 만났던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키스라는 게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할수록 실력이 느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제 말은…….”

“나도 거짓말이었어.”

“네?”

정신없이 떠들던 그녀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연습이 더 필요하다고 했던 거.”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얼어붙은 사랑의 모습에 도한은 더 미안해지고 말았다.

그 말이 상처로 남았을 줄은 몰랐다.


“처음부터 좋았어. 너하고 한 첫 키스부터 미치도록 좋았어. 그래서 연습시켜 준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매일 너랑 키스하고 싶었어.”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사랑은 기가 차서 헛숨을 터트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난 내가 그래서 차인 줄 알고, 내가 키스를 잘 못 해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줄 알고…… 내내 그 말이 생각나서 내가 얼마나……!”

그동안 쌓였던 분노와 설움이 폭발해 사랑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와 헤어지고 누굴 만나도 자신이 없었다.

연애를 하면 자연스럽게 키스도 해야 하는데, 그럴 순간이 오면 늘 위축되곤 했다.

키스를 하면서도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상대가 만족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다 거짓말이었다니.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울분이 차올랐다. 사랑은 원망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오빠는 정말, 못됐어요.”

눈빛은 당장이라도 욕을 퍼부을 것 같은데, 정작 입에서 나온 건 못됐다는 지극히 순한 말이었다. 도한은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 줄 알면서도 화가 난 모습까지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빠’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연히 사랑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미안.”

그가 웃음을 참고자 입술을 지그시 물고 그녀의 촉촉한 눈가를 쓸었다.

그런다고 화가 풀릴 리 없었기에 사랑은 그의 손을 홱 내쳤다.


“이런 남자 대체 어디가 좋다고.”

“그러게. 나라도 나 같은 놈 안 만날 거 같은데.”

그 말이 더 분했던 사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살짝 입을 맞췄다.

사랑은 그가 밉기도 하고 그의 입술에 난 상처가 신경 쓰여 고개를 뒤로 물렸다.


“아프다면서요.”

“그래도 하고 싶어.”

“내가 건드릴 것 같단 말이에요.”

“괜찮아.”

도한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대자 더 버티지 못했던 사랑도 키스를 받아들였다.

처음엔 상처가 신경 쓰여서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점차 서로의 숨결이 짙어지면서 어느새 그에게 매달렸다.

첫 키스부터 미치도록 좋았다는 말이 치료제라도 된 듯, 키스할 때마다 그녀를 괴롭혀 왔던 온갖 상념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래서 사랑은 온전히 느끼고 황홀경에 빠져들 수 있었다.

여전히 지도한은 키스를 잘했다. 아주 얄미울 만큼.

그가 입술을 떼고 사랑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 하나를 툭 풀었다.


“나 너 이러려고 데려왔어.”

손을 조금 내려 다음 단추까지 풀어내자 그녀가 숨을 참았다.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이 이런 뜻이 아니었다면. 지금 얘기해.”

도한이 손을 멈추자 사랑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눈에 힘을 주었다.


“이런 뜻 맞아요.”

“근데 왜 이렇게 떨어.”

옅은 미소를 짓고서 다시 단추를 풀어내는 그에게 사랑이 다급히 변명했다.


“아, 아직 밤이 아니라서요.”

사랑은 아직 일곱 시도 안 된 시간에 이런 일이 닥칠 줄 몰랐다.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돼서 잠자리에 들면, 그때 침대에서 시작할 줄 알았다.

이렇게 집에 들어오자마자 커피도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상태로, 책상 앞에 서서 그가 이럴 거라고는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나도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과 달리 도한은 계속해서 그녀의 단추를 풀었다.

블라우스가 절반 정도 벌어지자 도한이 붉게 물든 뺨으로 입술을 내렸다.


“밤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그의 입술이 닿은 곳이 소름 돋을 만큼 간지러워 사랑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앞으로의 일이 이제야 덜컥 겁이 났다.


“저녁부터 먹을까?”

낮게 잠긴 목소리와 매혹적인 그의 눈빛에 사랑은 눈앞이 핑 돌았다.

멈출 생각도 없으면서 그냥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아, 아니요.”

“그럼 침대로 갈까.”

“……네.”

다리가 후들거려서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으니 차라리 침대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곳에선 지금보다 더 큰 자극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예상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의 키스를 받다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까.

도한은 사랑의 블라우스를 마저 벗기고 책상 위에 반듯하게 내려놓았다.

그 정도 배려는 아직 가능했다.

잠시 후면 아마도 이런 여유마저 없어질 테니.

사랑의 두 다리가 침대 끝에 닿을 때까지 입맞춤은 끊이질 않았다.

도한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걸으면서도 입술을 괴롭혔다.


“이사랑.”

그가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사랑이 내 침대에 누워 있다니.

아무래도 꿈만 같아서 이름을 불러보았다.


“사랑아.”

“왜, 왜요.”

사랑은 입을 맞추는 것보다 그의 시선이 더 부담스럽고 떨렸다.

블라우스만 벗었을 뿐인데 발가벗은 것처럼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워 도한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랑해.”

순간 사랑의 두 눈이 쏟아질 듯 커졌다.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와 밤을 보내겠다고 이곳까지 왔지만, 그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벅차거나 눈물이 나진 않았다.

스무 살에 도한과 사귀면서도, 그가 여자 친구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미리 알아서인지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고백했고, 그를 만났기 때문에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여겼다.

그와의 이별이 힘들었던 건 그가 나를 더는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감정이 사랑까지는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 헤어진 후 가장 아팠다.

그가 나를 좋아한 것조차 착각이었다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은 것이다.

진심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침대 위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사탕발림일 수도 있었다.

도한으로 인해 사랑을 믿지 않게 된 사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고마워요.”

사랑은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와 똑같이 사랑한다고 해야 정답이겠지만 어쩐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순간 사랑은 자신이 정말 이 남자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과거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끝맺기 위해 그와 밤을 보내려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분명 이 남자가 좋은데.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안기고 싶은데.

뜨거운 가슴과 달리 황당하게도 머리는 차가워졌다.

사랑한다는 고백에 고맙다는 말이 돌아오자 도한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녀가 아직 저를 완전히 용서하진 않았다는 걸 알아챈 듯했다.

그만큼 아프게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그녀에게 저를 사랑해 달라고 강요까지 하는 것 같았다.

도한은 그만 그녀로부터 내려왔다.

그리고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요?”

사랑은 그가 갑자기 행동을 멈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자와 밤을 보내는 게 오랜만이라서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불안했다.


“아니.”

“그럼 왜…….”

“네가 날 사랑할 때 안고 싶어서.”

제 마음을 온통 들켜 버린 것 같아 사랑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도한은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모든 게 다 내 탓이라고.

내가 준 상처가 지워질 수 있도록 너를 더 사랑하겠다고.


“미안해요.”

“뭐가.”

“실망시켜서요.”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미안해서 그래.”

“오빠가 왜요.”

“그냥. 그냥 다…….”

그가 애정을 담은 손길로 사랑의 얼굴을 매만졌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어 볼 겸 미소도 지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너랑 헤어지고 아무도 안 만났어.”

그에게 안겨 있던 사랑이 놀란 눈으로 몸을 조금 떨어뜨렸다.

5년 동안 연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의 말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에요?”

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 어떤 여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랑의 앞에 다시 나타날 주제가 못돼 그녀를 찾아 나서진 않았지만,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가슴에 새긴 이사랑은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여자이자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


“첫눈에 반하지 않아도 내 세상의 전부가 될 수 있더라.”

그가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맑은 두 눈을 바라봤다.


“그 사람에게 눈이 멀고.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리면서 내 세상이 멈추고. 내 눈에 그 사람이 박혀 버려서 뭘 봐도 그 사람으로 보이고…….”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자 사랑의 눈가가 시큰거렸다.

자신과 같은 감정을 이 남자도 똑같이 느꼈다는 게 가슴 벅찼다.


“그렇게 이사랑이 내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렸어. 그래서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어.”

사랑은 서로를 그리워했던 시간이 안타깝고 서러웠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한창 자라고 있을 때, 멈춰야 했던 그때의 나로 돌아가 첫사랑을 이어 가고만 싶었다.

첫눈에 반한 그를 다시 사랑하고 싶었다.

순간 울컥한 사랑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사랑은 그에게 마음으로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랑한다는 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내 세상의 전부는 여전히 지도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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