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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나도 농담 아니에요 (61/63)


#60화. 나도 농담 아니에요
2023.07.28.



“저녁 같이 먹자니까 왜 여기로 와요?”

사랑은 도한의 차가 자신의 집 앞에 멈추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을 겪은 동료에게 밥 한 끼 사 주고 싶었는데, 좋은 사수 노릇 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오늘도 기회를 주지 않는 그가 괘씸했다.


“다음에. 오늘은 내가 좀 피곤해서.”

도한은 도저히 이 얼굴로 사랑과 마주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상처 난 입술만 쳐다볼 게 뻔했다.

평소 같았으면 저녁 같이 먹자는 말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태수에게 더욱 짜증이 치솟았다.

적당히 피할 걸 그랬나.

태수를 제대로 보낼 생각에 작정하고 맞은 것이 아무래도 실수인 것 같았다.


“들어가. 주말 잘 보내고.”

오늘이 금요일이라 그가 주말 인사까지 전했는데도 사랑은 안전벨트를 풀지 않은 채 앞 유리창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안 내려?”

“네.”

사랑이 두 눈에 바짝 힘을 주고 고집을 부렸다.

어떻게든 너와 저녁을 먹고 말 거라는 의지가 대단했다.

그렇다고 해서 식당으로 차를 돌릴 그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팽팽한 대립에 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깐의 정적으로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지금 안 내리면 너 이대로 우리 집에 데려갈 거야.”

도한은 사랑의 반응을 지켜봤다.

역시나 흠칫 놀라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 빨리 내리라는 협박이었지만, 금방 평정심을 되찾은 그녀가 덤덤하게 답했다.


“그래요, 그럼.”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오히려 도한이 당황했다.

사랑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지도한 씨 집으로 가자고요.”

“농담 아니니까 어서 내려.”

“나도 농담 아니에요.”

사랑의 맑은 두 눈에 도한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를 따라가겠다는 건지.

내가 지금 널 상대로 뭘 상상하는지 알기나 하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게 틀림없다.

조금이라도 짐작한다면 지금 당장 차에서 내려야 정상이니까.

도한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밖으로 나가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 주려고 몸을 돌리는데, 마침 사랑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우야.”

갑자기 강지우와 왜 통화를 하는지 의아한 그가 동작을 멈추고 기다렸다.


“나 오늘 집에 안 들어갈 거니까 내일 봐.”

그 말에 지우보다도 놀란 사람은 바로 도한이었다.

집에 안 들어간다는 게 설마 자신과 함께 있겠다는 뜻인가 싶어 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확한 의미도 모르면서 심장이 폭주했다.


-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집에 왜 안 들어오는데.

“나도 외박 좀 해 보려고.”

- 어디 여행이라도 가는 거야?

“아니. 사생활이니까 묻지 마.”

- 얘가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혼자서 어딜 가려고…….

“혼자 아니야.”

- 그럼 누구랑 같이 있는데?”

“남자.”

- ……뭐?

“그럼 끊는다.”

- 야! 이사랑!!

핸드폰 너머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사랑은 가차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곤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아직 외박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부모님 몰래 가출하는 사춘기 10대처럼 손이 덜덜 떨렸다.

그동안 너무나 바르게 살아서, 겨우 이만한 일로 죄인이라도 된 듯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사랑 인생 통틀어 첫 일탈이었다.

그녀가 태연한 척하며 도한 쪽으로 홱 시선을 옮겼다.


“안 가요?”

그가 통화 내용을 다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사랑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대놓고 함께 밤을 보내자고 했으니, 이 남자는 또 얼마나 황당할지.

대책 없는 건 늘 지우였는데 오늘은 자신이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어디로 가야 하는데.”

도한은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내가 지금 이사랑한테 남자인가 싶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외박을 하겠다는 게 그가 알고 있는 의미와 다를 수도 있을 테니까.

야유회가 끝나고 어디 가서 잠깐 쉬었다 가자던 그녀의 말 또한 그랬으니, 이번에도 다른 뜻일 수도 있었다.


“지도한 씨 집이요.”

일단 장소는 그의 머릿속에 있는 곳과 같았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그 이후의 일도 그의 생각과 같을까.

도한은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나 너 내 사수로 우리 집에 데려가겠다는 거 아니야.”

“나도 직장 동료 집에 가겠다는 거 아니에요.”

“우리 집에 가면 너 못 나와. 적어도 오늘은.”

“그래서 지우한테 전화했잖아요. 외박하겠다고.”

“그러니까 그 외박이라는 게…….”

도한은 말을 멈추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세하게 털어놓자니 너무 직설적일 거 같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하자니 못 알아들을 거 같고.

난감하고 답답해서 그가 선뜻 입을 떼지 못하는 사이, 사랑이 한마디로 정리해 버렸다.


“같이 있고 싶어요.”

끝내 심장이 버티지 못하고 내려앉은 도한이 발끝으로 시선을 내린 그녀를 바라봤다.


“싫으면. 내릴게요.”

초조한지 사랑이 두 손을 맞잡고 힘을 꽉 주고 있었다.

입술도 말아 물고서 어깨를 조금 떠는 것도 같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한은 다시 안전벨트를 채웠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던 차는 그제야 사랑의 집 앞을 벗어났다.


 

* * *

오피스텔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내내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생각에 잠겨 있느라 오랜 정적이 어색한 줄도 몰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걷자 그제야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집 앞에 선 도한이 문을 열어젖히고 뒤로 물러났다.


“먼저 들어가.”

사랑은 옅은 미소를 짓고 안으로 들어갔다.

스무 살에 가 본 그의 자취방과 느낌이 비슷했다.

침대와 책상이 전부였던 그때보다는 가구가 늘긴 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그때와 닮아 있었다.

하얀 벽지 외에는 밝은색이 보이지 않아 차가운 느낌이 있는 인테리어였다.

가장 큰 가구인 침대를 덮은 이불마저 진회색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저녁은 어떻게 할까. 뭐 먹을래.”

도한이 책상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정장 재킷을 벗었다.

그 모습을 멀뚱히 보고 있던 사랑은 그가 와이셔츠의 단추를 두 개까지 풀었을 때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할 줄 아는 건 있어요?”

“라면? 시켜도 되고.”

“나중에요. 아직 생각 없어요.”

사랑은 괜히 주위를 둘러봤다.

뒤에서 도한이 옷을 갈아입고 있을 것 같아 두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그녀를 지나쳐 커피 머신 앞에 섰다.


“그럼 커피라도 마실래?”

“네.”

바짝 긴장한 사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인데 벌써부터 가슴이 쿵쿵거려 큰일이었다.

이런 주제에 여기까지 올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어제까지의 이사랑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몰래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단순한 의미의 외박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한 건 오늘 밤 그의 여자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굳게 마음을 먹고 오긴 했지만, 가슴이 떨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한과 헤어지고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깊은 사이로 발전하진 못했다.

마음이 허락되지 않으니 키스도 겨우 할 뿐이었다.

그러니 오늘 밤이 긴장되는 건 당연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고마워요.”

도한이 건넨 머그잔을 받고 나서야 사랑은 겨우 상념을 떨쳐 냈다.

그를 마주하기가 어색해서 시선을 피하느라 집 안을 구경했다.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책상에 눈길이 머물렀다.


“이거…….”

사랑이 컵을 내려놓고 토끼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를 손에 들었다.

그녀가 만들어 준 생일 선물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선물.

그와 헤어져 있었던 5년이란 세월을 증명하듯 매우 낡아 있었다.


“작년에 고리가 떨어졌어. 그전까진 가방에 달고 다녔는데.”

그녀의 옆으로 다가선 도한이 애정 어린 손길로 인형의 귀를 매만졌다.

사랑은 그가 마치 저를 쓰다듬는 것만 같아 몸이 굳어졌다.


“근데 토끼 귀가…… 원래 이랬어요?”

사랑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인형을 바라봤다.

분명 토끼가 맞는데 두 귀가 쫑긋 세워져 있지 않고 축 처져 있었다.


“설마, 내가 이렇게 만들어서 준 거예요?”

도한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사랑은 당황했다.

첫 남자 친구의 생일에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탓에 실수를 했다는 걸 지금 알아 버렸다.

귀에 솜을 넣지 않은 채 그대로 이어 붙였던 모양이다.

얼마나 긴장했으면 선물을 포장하는 순간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와 사랑은 얼굴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세상에도 없는 토끼를 만들어 버려서……. 그냥 다른 선물을 줄걸.”

아무리 스무 살이었다 해도 왜 그렇게 철이 없었을까 싶었다.

동갑도 아니고, 스물여섯인 남자 친구한테 인형 열쇠고리를 만들어 줄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생일 선물인데.

그때 당시 사랑이 도한에게 선물을 줄 때도 이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나이가 더 들고 나니 그때의 자신이 참 한심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짓던 도한이 책상 서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사진을 받아 든 사랑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만든 인형과 같은 귀를 가진 토끼가 그 안에 있었다.

인형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진짜 토끼가.


“이거 정말 토끼 맞아요?”

“롭이어라는 토끼래. 친척이 반려동물로 키우고 있어.”

도한은 사랑의 선물을 받았을 때 강아지 인형인 줄 알았다.

귀가 처진 토끼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학교를 그만두고 한창 사업을 키워 나갈 때, 친척 집에서 이 인형과 닮은 토끼를 보게 됐다.

그 순간, 마치 이사랑을 다시 만난 것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별로 친하지도 않던 사촌 동생을 자주 찾아가 용돈을 주며 한 번씩 그 토끼를 보고 왔다.


“너무 귀엽다. 이런 토끼가 정말 있네요.”

사랑은 조금 전 도한에게 처음으로 준 선물이 잘못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속상했었다.

소설 속의 복선처럼 엉망으로 만든 인형이 우리의 이별을 암시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쓰렸었다.

제대로 된 선물을 했다면 헤어지지 않았을까.

상관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과거에 미련을 두었다.

그런데 실제로 귀가 처진 토끼가 있다고 하니 사랑은 안도감이 들었다.

우리가 헤어질 운명은 아니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비록 실수는 있었지만 결국엔 인연이라고 확인받은 것만 같았다.

사랑이 한껏 웃으며 도한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그의 눈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렇게 웃으면.”

그가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토록 만지고 싶었던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지자 도한은 심장이 뻐근했다.

사랑도 가슴이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온몸이 떨릴 정도로 가슴이 뛰어 대서 아플 지경이었다.


“키스하고 싶어지는데.”

도한이 조금은 장난스럽게 말하자 긴장이 풀어진 사랑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에게 도발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웃지 말아요.’

‘이젠 내가 웃는 것도 싫어?’

‘키스하고 싶어져요.’

날 보고 웃으면 그 입술에 입 맞추고 싶다는 엄청난 말을 술김에 내뱉었었다.

그날 밤 공원에 내려앉은 공기의 냄새까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의 입술을 몰래 훔쳐보며 설렜던 순간들도.

도한은 추억에 잠긴 사랑에게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향기가 코끝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녀의 두 눈이 감기는 걸 보면서 도한은 입술을 베어 물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살을 입에 넣는 순간 도한은 자신의 여자였던 스무 살의 이사랑을 다시 만난 기분이 들었다.

매일같이 이 입술을 머금으면서도 갈증이 났었다.

아무리 키스를 해도 가슴속에 뭔가가 채워지지 않아 답답했었다.

그땐 그게 뭔지 몰랐다.

헤어지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지 않아서라는 걸.

그리고, 그 역시 그녀로부터 그 말을 듣지 못했다는 걸.

그가 사랑의 입술을 집요하리만치 탐했다.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입술을 맞대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를 다시 사랑해 달라는 애원의 움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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