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얘기 좀 해요 (60/63)


#59화. 얘기 좀 해요
2023.07.24.


사무실 문이 열리자 아이스크림을 기다린 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어머! 지 대리님 얼굴이 왜 그래요?”

문에 가까이 자리한 나영이 가장 먼저 도한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엉망인 그의 얼굴을 보고선 입을 벌렸다.

사랑은 곧바로 도한을 데리고 동식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고 편의점에 보냈더니 둘이 싸우기라도 했나.

도한과 달리 사랑의 얼굴이 멀쩡한 걸 본 동식은 그녀가 도한을 한 대 패고 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팀장님.”

사랑은 언제 울었나 싶을 정도로 비장한 표정을 한 채 동식을 불렀다.

동식은 바짝 긴장했다.

도한과 더는 같이 일을 못 하겠으니 팀을 바꿔 달라는 요구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안 그래도 사이가 안 좋아 보여서 신경 쓰고 있었는데, 괜히 둘만 밖으로 보냈다고 후회했다.


“박태수 과장님이 지 대리님을 때렸어요.”

“……뭐?”

놀란 동식이 벌떡 일어섰고, 다른 팀원들은 헉 소릴 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때리다니? 박 과장이 지 대리를 왜 때려?”

“과장님이 저를 성희롱하셨고, 지 대리님이 저 보호하다가 맞았어요. 술을 드신 것 같더라고요.”

“뭐? 박 과장 그거 제정신이야?”

부하 직원의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든 것도 어이가 없는데 성희롱에다가 술까지?

개차반이라는 소문이 아깝지가 않을 정도였다.


“저희 가만히 못 있습니다. 인사팀에 신고하려고요, 팀장님.”

사랑이 강력하게 나가자 동식이 재빨리 핸드폰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했다.


“당연히 신고해야지! 어디 감히 내 직원을 건드려.”

사주와 친척이라고 뻐기고 다녀서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었는데 이참에 잘됐다.

그 대단한 동아줄을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며 동식은 이를 갈았다.


“내가 직접 나설 테니까 따라와.”

동식이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우뚝 멈춰 서서 뒤를 돌았다.

그를 따라가던 사랑과 도한도 주춤 발을 세웠다.


“아니, 근데 두 사람은 왜 같이 나가기만 하면 한쪽이 다쳐서 들어와?”

당황한 사랑과 도한이 서로를 힐긋거렸다.

아는 사이라는 걸 들킨 것도 아닌데 뜨끔한 것이다.


“지난번에는 사랑 씨가 손을 다치더니, 오늘은 지 대리가 맞고 들어오고. 어떻게 심부름만 시키면 일이 생겨?”

커피를 사 오라고 카페를 보냈더니 한 놈이 화상을 입고 오질 않나,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고 편의점을 보냈더니 다른 한 놈이 맞고 오질 않나.

멀리 보낸 것도 아니고 고작 같은 건물 1층에 보냈을 뿐인데 그새 일이 생기다니.

속상했던 동식은 두 사람을 흘겨보곤 사무실에서 나갔다.

선생님께 혼나러 가는 학생처럼 사랑이 쭈뼛거리며 발을 옮기다가 손에 들고 있던 편의점 봉투를 나영에게 건넸다.


“이거 다 녹았을 텐데…… 어쩌죠.”

“지금 아이스크림이 문제야?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빨리 나가 봐.”

나영이 일어나서 사랑의 등을 토닥였다.

태수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눈앞에서 도한이 맞는 것까지 지켜봤으니 많이 놀랐을 후배가 걱정스러웠다.


“네, 그럼 다녀올게요.”

사랑은 그런 나영에게 고마워서 작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 * *

일은 일사천리로 해결이 되었다.

세 사람이 인사팀을 찾아가자, 조금 전 사건이 벌어진 로비에 마침 인사팀 직원이 있었던 터라 이미 상황을 알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제보도 있었던 모양이다.

인터넷 강국답게 태수의 만행을 동영상으로 찍어 둔 직원이 메신저로 여기저기 퍼트려 준 덕에 증거도 쉽게 확보되었다.

무엇보다 도한의 얼굴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벌겋게 부어오른 뺨과 피가 맺힌 입술로 인사팀을 방문했으니, 다들 태수가 한 짓을 두 눈으로 확인한 셈이 되었다.

번듯하게 잘생긴 외모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더욱 연민을 느끼는 것 같았다.

특히나 여직원들은 평소 태수의 노골적인 시선이나 농담을 한 번쯤은 받아 봤기에 너나없이 그를 욕하기 바빴다.

어떤 여직원은 필요하면 태수에게 당했던 성희롱을 증언하겠다고 나서 주기까지 했다.

주위가 온통 적뿐인 사람이라 징계 위원회를 소집하기엔 무리가 없어 보였다.


“아주 제대로 맞았네.”

인사팀에서 나온 동식은 그제야 도한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했다.

태수와 키 차이가 있어서 빗맞을 만도 한데, 마치 때리라고 뺨을 갖다 댄 것처럼 정통으로 맞았다.

동식은 제 얼굴이 다 아픈 듯해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서 어디 일하겠어? 일찍 들어가서 쉬는 게 어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도한은 상처가 보이지 않게 살짝 고개를 돌렸다.

어쨌거나 물의를 일으켜 죄송했다.


“그럼 일단 있어 보고, 정 안 되겠으면 퇴근해.”

“네.”

“먼저들 들어가 있어. 나는 박 과장 그 인간 낯짝 좀 보고 갈 테니까.”

동식이 가 보라는 손짓을 하자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도한의 왼편에 선 사랑은 그의 얼굴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뺨이야 금방 가라앉겠지만 입술의 상처는 며칠이 지나야 나을 것 같았다.

밥 먹을 때도 불편할 텐데.


“그만 좀 보시죠. 괜찮으니까.”

도한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일부러 사랑과 자리를 바꾸었다.

그녀에게 별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태수를 회사에서 내보낼 생각으로 작정하고 뺨까지 맞았지만 지금은 자신의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저를 얼마나 지독한 인간으로 볼지.

동생을 버린 패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이젠 상사에게 하극상까지 벌였으니, 사랑이 저를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놈이라 여길 것 같았다.

어쩌면 상종도 하기 싫을지도.

작게 한숨을 내쉰 도한은 엘리베이터가 7층에 멈춰 먼저 내렸다.

그런데 사랑이 나오질 않았다.


“어디 좀 들렀다 갈게요.”

“어딜.”

“오래 안 걸려요.”

그대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도한은 할 수 없이 혼자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궁금해하는 팀원들에게 인사팀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자리에 앉자 곧 사랑이 들어왔다.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인 그녀가 의자에 놓아 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손에 들고 있는 위생 봉투를 감쌌다.

그러곤 도한에게 건넸다.


“얼음이에요. 카페에서 좀 얻어 왔어요. 뺨에 대고 있어요.”

도한은 그녀가 저 때문에 다시 1층에 다녀온 것 같아서 미안했다.

사수로서 저를 챙겨야 할 의무를 느끼는 것 같았다.

마음이 여린 그녀라 앞으로도 계속 제 얼굴을 신경 쓸 터였다.

역시 태수의 손을 피했어야 했나 싶어 그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도한은 사랑의 미소를 보면서도 같이 웃어 줄 수가 없었다.

* * *

퇴근 무렵, 영업팀에 다녀온 사랑은 옆자리가 비어 있는 걸 보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가 도한을 찾자 나영이 가방을 챙겨 일어나며 말했다.


“지 대리님 조금 전에 퇴근했어.”

“아.”

사랑은 저도 모르게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저녁이라도 사 주고 싶었는데. 조금만 더 빨리 올걸.

아쉬운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약속 없으면 같이 나갈래? 오늘 많이 놀랐을 텐데 내가 밥 살게.”

나영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깨달은 사랑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좋은 동료와 함께 일한다는 건 직장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었다.

도한에게도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를 주지 않고 가 버린 그가 조금은 미웠다.


“네. 그럼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사랑은 기꺼이 나영의 위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일은 꼭 도한에게 저녁을 사 줘야지.

그렇게 다짐하고 나영과 사이좋게 사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다음 날, 도한은 출근을 하지 않았다.

동식이 며칠 집에서 쉬는 게 좋겠다고 휴가를 권해 3일 후에야 그를 볼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제대로 말을 걸 수가 없었기에 사랑은 퇴근 시간만 기다렸다.

호출을 받고 인사팀에 잠시 들렀다 온 사랑이 자리로 돌아오는데, 이미 퇴근 준비를 마친 도한이 꾸벅 인사를 전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쏜살같이 사무실을 나서는 그를 보며 사랑은 재빨리 가방을 챙겼다.


“저도 가 볼게요.”

나영에게 겨우 인사를 한 그녀가 부지런히 도한을 쫓았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모습이 보여 소리부터 내질렀다.


“잠깐만요!”

다행히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리를 듣고 누군가 열림 버튼을 눌러 주었다.


“감사합니다.”

사랑은 그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고 도한을 몰래 노려봤다.

당연히 그가 엘리베이터를 잡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를 모른 척해서 서운했다.

서운한 건 이번 일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출근했을 때부터 그랬다.

얼굴은 좀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며칠 사이에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있어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원래 회사에서는 철저히 사수로 대했지만 더 깍듯해졌다고 할까.

확실하게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그러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사랑은 답답했다.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지만 그녀는 내리지 않았다.

지하 2층에서 도한이 내리자 그를 따라 내렸다.

그녀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도한은 잠시 서서 사랑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몸을 돌려 주차된 차로 걸어갔다.

순간 사랑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황급히 뛰어가 운전석으로 손을 뻗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얘기 좀 해요.”

도한은 저 멀리 같은 팀 동료가 지나가는 걸 보고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내일 사무실에서 하시죠.”

안 그래도 회사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다들 그 여자를 찾아내겠다며 벼르는 중이라 도한은 조심해야 했다.

사랑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나한테 왜 이래요?”

그러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사랑은 며칠 동안 쌓인 설움을 쏟아 냈다.

도한에게 다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가 저를 멀리하자 당혹스러웠다.


“뭘.”

“왜 또 그때처럼 남같이 구느냐고요.”

“무슨 얘긴지 알아듣게 설명을…….”

답답하긴 도한도 마찬가지라 설명을 요구했으나 사랑이 그의 말을 잘랐다.


“5년 전에도 그랬잖아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키스해 놓고 하루아침에 헤어지자고 하더니, 지금은 왜 또 나 모른 척하는데요? 지도한 씨 이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알아요?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내가 또 귀찮아졌나. 지옥 같았던 그때가 생각나서 내가 오늘 하루 얼마나…….”

“너한테 이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그랬어.”

“……네?”

속상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서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쏟아 내던 사랑이 그의 목소리에 멍하니 되물었다.


“네 잘못도 아닌데 나만 보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잖아.”

벌겋게 익어 버린 뺨은 다행히 제 색을 찾았지만 터진 입술은 아직 표가 났다.

아프진 않아도 눈에 보여 도한은 사랑의 시선을 피하고자 했다.

자신의 상처만 보면 죄인처럼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니까.


“내 잘못 맞으니까요. 내가 그때 제대로 대처했으면 지도한 씨가 맞는 일은 없었을 거잖아요.”

“내가 맞은 건 그 인간한테 개차반이라고 해서야. 너 때문이 아니라.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서 잘해 줄 필요 없어. 나랑 말도 섞기 싫을 텐데.”

“내가 지도한 씨랑 말도 섞기 싫어한다고요? 왜요?”

억울한 마음에 사랑의 입에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그와 같이 밥을 먹고 싶어서 며칠 전부터 안달이 나 있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내가, 끔찍하게도 지독한 놈이니까.”

사랑은 그가 말하는 끔찍함이 무얼 뜻하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왜 자신과 거리를 두는지도.

그래서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지도한 씨는 겨우 열세 살이었어요.”

“겨우 6학년이 동생을 버릴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하니까 무섭다며.”

“그땐…… 자세한 사정을 몰랐으니까요.”

왜 그런 일을 저질러야만 했는지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 순간이 그에게도 얼마나 지옥이었는지, 그런 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사랑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생각해 보니까 나는 열세 살 때 무슨 실수를 했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나요. 그만큼 어린 나이라고요. 물론, 그렇다고 지도한 씨가 한 일이 정당화될 순 없겠죠. 그 언니한테는 죄인이 맞으니까.”

사랑은 만약 자신이 혜리라면 그를 쉽게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날의 기억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녀는 혜리가 아니다.


“근데요, 나한테 죄인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나는 지도한 씨가 끔찍하지 않아요. 적어도 그런 이유로는.”

순간, 도한의 가슴에서 뭔가가 일렁였다.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던 두려운 존재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상처를 입은 듯 잠시 쓰라렸다가 곧바로 새살이 돋아나는 기분도 들었다.


“오히려 그 열세 살의 아이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어서 가여워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독하게 자라진 못했을 테니까. 내가 아는 지도한은 그런 사람이니까…….”

아무리 죄를 저질렀어도 세상에 한 명쯤은 그를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사랑은 그 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제 심장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남자니까.

그녀의 진심을 전해 들은 도한은 두 눈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저를 끔찍한 놈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위로까지 받아 가슴이 벅찼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질 만큼.

도한의 침묵이 길어지자 사랑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꿨다.


“문이나 열어요. 저녁 같이 먹게.”

그녀가 차 앞쪽을 돌아 조수석으로 걸어갔다.

이제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열라는 문은 안 열고 도한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약속, 있는데.”

하, 이 남자가 진짜.

여태 내 얘길 뭐로 들었는지.

거짓말하지 말라고 사랑이 눈을 치켜떴다. 매서운 그 눈빛에 도한은 입을 다물고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 키를 눌러 차 문을 열었다.

곧바로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타는 걸 보며 도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상처가 남아 있는 입으로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더욱 미안해할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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