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서한 전자 개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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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서한 전자 개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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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서한 전자 개차반
2023.07.21.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 편의점까지 가는 내내 정적이 이어졌다.
사랑은 도한이 신경 쓰여 자꾸만 그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일주일 만이었다.
단둘이서 같이 있게 된 시간이.
전과 달리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젠 아예 상대하지 않을 생각인가.
먼저 말을 붙여 보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단순히 직장 동료로 남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랑은 조용히 아이스크림 열세 개를 계산하고 편의점에서 나왔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섰을 때 옆에서 술 냄새가 풍겨 왔다.
누군지 몰라도 간도 크다.
점심시간에 냄새가 날 정도로 술을 마시고 회사로 돌아올 생각을 하다니.
사랑의 고개가 자연스레 돌아갔다.
얼굴을 확인하고 나자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상품기획팀 박태수 과장이었다.
아무리 사주와 친척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망나니인 줄은 몰랐다.
어떻게 취한 채로 근무할 생각을 하는지.
사랑은 태수와 같은 팀이 아니라는 사실에 또 한 번 감사했다.
“회사에서는 오랜만이네, 사랑 씨.”
얼마 전 야유회에서 보긴 했지만 회사에서는 몇 달만이었다.
프로젝트를 함께하다 보니 태수와는 가끔씩 얼굴을 보는 사이였다.
도한이 입사한 후로는 그가 그녀 대신 상품기획팀을 찾아간 덕에 직접 마주하는 건 건 오랜만이었다.
사랑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오늘따라 저를 훑어보는 시선이 기분 나빴다.
여직원에게 은근한 성희롱을 일삼는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에 사랑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직접 당해 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처럼 노골적인 눈길은 익숙했다.
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엘리베이터에서 혼자 마주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기획팀에 새로운 사람 들어온 후로 사랑 씨 얼굴 보기가 힘들어.”
사랑이 겨우 벌려 놓은 간격을 태수가 단숨에 좁혀 왔다.
그가 말할 때마다 술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사랑이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태수는 그제야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도한이 눈에 들어왔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이왕이면 여직원을 데려오지. 한 팀장도 사람이 참 빡빡해. 그 밑에서 일하기 참 힘들겠어.”
저보다 열 살이나 많은 상사를 팀장님도 아닌 팀장으로 부르질 않나, 부하 직원에게 험담을 늘어놓질 않나.
인간 말종이 따로 없었다.
“아닙니다. 팀장님께서 가족처럼 대해 주셔서 일하기 편합니다.”
더는 참지 못한 사랑이 웃으며 대꾸했다.
다른 건 몰라도 팀을 건드리는 건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어디서 감히 우리 팀장님을.
너 같은 상사 만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나도 가족처럼 대해 줄 수 있는데. 우리 팀으로 넘어올 생각 없어?”
태수가 능글맞게 히죽거리며 사랑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랑은 순간 숨을 참았다.
그의 손이 점점 제 어깨를 주무르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때, 도한이 그녀의 팔을 잡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그로 인해 태수의 손이 툭 떨어졌다.
태수가 어이없단 듯이 비아냥거렸다.
“과장이 말하고 있는데 어디서 대리가 끼어들어? 기획팀은 위아래도 없나?”
가뜩이나 도한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태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과장님께서도 위아래 없으신 건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뭐?”
태수가 실소를 터트렸다.
이에 도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키 차이 때문에 도한이 저를 내려다보자 태수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조금 전에 저희 팀장님 하대하셨잖아요. 부하 직원 성희롱도 하시고.”
“하, 요즘 것들은 이렇게 싸가지가 없다니까. 내가 뭘 했다고 성희롱이야? 격려 차원에서 어깨 좀 두드린 것도 문제가 되나?”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꼈다면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사실 모르십니까? 신체적 접촉은 물론 언어적, 시각적으로도 성립될 수 있는 게 성희롱입니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받으셨을 테니 인지하고 계실 텐데요.”
도한은 최대한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태수의 두 눈이 사랑의 몸을 훑어내렸을 땐 어떻게든 참았지만, 어깨에 올라간 손을 보는 순간 주먹이 쥐어졌다.
이곳이 회사가 아니었다면 그 더러운 손을 당장 내쳤을 것이다.
그나마 상사라서 이만큼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다.
“이게 아주 꼬박꼬박 사람을 열 받게 하네.”
태수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도한을 사무실에 세 시간이나 세워 뒀었던 그다음 날, 태수는 팀장에게 주의를 들었었다.
야유회에서는 도한의 공을 받으려고 뛰어가다 넘어지기까지 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굴복당한 적이 없어 그날의 패배는 무척이나 치욕스러웠다.
단순히 족구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라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번번이 당한 게 억울하고 분했다.
어디 한번 걸리기만 해 봐라, 벼르고 있던 터라 태수는 지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야, 지 대리.”
태수가 검지로 도한의 가슴을 꾹꾹 밀었다.
마음 같아선 이마를 눌러 버리고 싶었지만 손을 쭉 뻗는 모양새가 꼴불견일 것 같아 이쯤에서 타협을 본 것이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태수랑 대적해서 좋을 게 없었다.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인데, 도한의 성격도 만만치 않아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네가 아무리 대표님 소리 듣고 살았어도 여기서는 그저 대리일 뿐이야. 대리는 말이야, 그렇게 시건방지게 상사한테 말대꾸를 하면 안 돼요. 그럼 회사에 오래 못 다녀. 내가 너 같은 거 그만두게 하는 건 일도 아니거든.”
“그럼 한번 해 보시죠.”
“뭐, 이 X끼야?”
태수는 흥분한 탓에 취기가 더 오르고 있었다.
갖고 있던 주식이 바닥을 치는 바람에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점심시간에 친구를 불러 술 한잔을 걸쳤다.
친구가 말리는 바람에 겨우 소주 한 병밖에 마시지 못하고 회사로 돌아왔건만, 눈엣가시 같은 놈까지 제 성질을 건드려 폭발하고 만 것이다.
“회사 오래 다닐 생각 없습니다. 그래도 과장님보다는 제가 더 오래 붙어 있을 것 같네요.”
도한이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여기 좀 보라는 듯한 도한의 태도에 부들부들 이를 갈던 태수가 고개를 돌렸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수군거렸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원숭이가 된 수치스러운 기분에 태수는 더욱 독기가 올랐다.
“내가 이런 것들한테 눈 하나 깜짝할 거 같아?”
태수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회사에 소문을 내도 내 자리는 굳건하다는 걸 건방진 대리 놈한테 알려 주고 싶었다.
“너 사람 잘못 봤어. 나 박태수야.”
“알고 있습니다. 서한 전자 개차반으로 유명한, 박태수 과장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수가 도한의 뺨을 후려쳤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도한이 그에게만 희미하게 미소 짓는 걸 보고 만 것이다.
그 순간 태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감히 대리 주제에 저를 비웃고 있으니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다.
“지 대리님!”
손바닥이 살에 맞닿아 울린 큰 소리에 사랑이 기겁을 했다.
떨리는 손으로 고개가 돌아간 도한을 붙잡아 그의 얼굴부터 살폈다.
왼쪽 뺨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 끝엔 피가 맺혔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사람을 때릴 수가 있어요, 과장님!”
사랑이 태수 앞으로 나서 소리쳤다.
도한의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선을 넘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주위에서 그들을 관망하던 이들도 충격을 받았는지 웅성거림이 커졌다.
누군가는 조금 전의 모습을 핸드폰에 담기도 했다.
찰칵찰칵 소리에 태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따가운 눈총들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태수는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자각했다.
순간적으로 눈이 뒤집혀 부하 직원에게 손찌검을 한 것이다.
한 번만 더 회사에서 사고를 치면 책상을 치워 버리겠다던 서한 전자 대표인 삼촌의 말이 떠올랐다.
“지, 지 대리. 바, 방금은 내, 내가…….”
급격히 얼굴색이 바뀐 태수가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자세를 바로 한 도한이 그를 다시 내려다보자 차마 사과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한은 입술에 맺힌 피를 쓱 닦고는 보란 듯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술이 과하신 것 같은데 다음에 얘기하시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탄성을 내뱉었다.
“세상에. 근무 시간에 술이라니.”
“웬일이야. 술까지 마시고 직원을 폭행한 거야?”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우리 회사에서도 일어날 줄이야.”
“회사 망신이다, 진짜. 어쩌다 서한 전자가…….”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철면피 같던 태수의 얼굴이 점점 창피함으로 물들었다.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된 사과는 해야 일이 더 커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도한에게 손을 내민 타이밍에 사랑이 먼저 도한의 팔을 잡았다.
“오늘 일 그냥 안 넘어갈 겁니다, 과장님. 저한테 성희롱하고 지 대리님 폭행하신 것까지 전부 인사팀에 신고할 테니까 두고 보세요.”
태수가 그녀를 말려 보려고 입을 뗐지만 사랑은 그대로 도한을 데리고 비상계단으로 사라졌다.
* * *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계단을 올랐다.
3층에 다다라서야 사랑이 도한의 팔을 놓고 그를 마주했다.
빨갛게 부은 뺨과 터진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 사랑의 눈동자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어렸을 때 축구도 배우고 배구도 배웠다면서요. 그 좋은 운동 신경으로 피했어야지, 맞긴 왜 맞아요.”
엉망인 얼굴에 속이 상한 그녀는 애꿎은 도한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기어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울지 마.”
도한이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다시는 울리고 싶지 않았는데, 또 이렇게 돼 버려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가 눈물을 닦아 주려 하자 사랑이 손을 내쳤다.
“죄송하다고 사과는 왜 해요. 뭐 하러 저런 인간한테 고개를 숙이냐고요!”
사랑이 더 많은 눈물을 쏟아 내며 악에 받친 목소리를 내질렀다.
눈앞에서 벌어진 폭행 장면이 자꾸만 떠올라 그녀의 손이 벌벌 떨렸다.
“잘못했으니까 그만 좀 울어.”
안아 줄 수도 없는데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 어쩌자는 건지.
답답한 마음에 도한이 다시 그녀의 눈가로 손을 올렸으나 또 내쳐지고 말았다.
“차라리 같이 때리든가. 왜 바보같이 맞냐고요, 왜!”
“그래야 저 인간을 회사에서 내보낼 수가 있으니까.”
“……뭐라고요?”
“손을 댔잖아. 너한테.”
정신없이 울분을 쏟아 내던 사랑이 멈칫했다.
머리가 울려서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질 못했다.
“보는 눈들이 많았으니까 금방 소문 퍼질 거야. 인사팀에 신고하기도 전에 저절로 알게 될 거라고.”
“그게 무슨…….”
“근무 시간 중에 음주, 여직원 성희롱, 그리고 폭행까지. 아무리 낙하산이라도 이 정도면 잘리겠지.”
사랑은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일부러 맞았어요?”
시선을 피한 도한이 말이 없자 그녀는 헛숨을 터트렸다.
세상에. 그걸 노리고 처음부터 태수를 도발했다니.
그것도 모자라 뺨까지 내주는 그의 열정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찼다.
“진짜 지독한 놈 맞네.”
도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순간 터진 입술이 아픈지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랑도 그를 따라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그의 뺨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많이 아파요?”
“괜찮아.”
괜찮다는 말과 달리 그의 뺨은 뜨거웠다. 사랑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때렸을 때도…… 이렇게 아팠어요?”
“아니.”
도한이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얼굴엔 손도 못 대게 하니 이렇게라도 닿는 수밖에.
“너 우는 걸 보는 게 더 아팠어.”
그러니 그만 울라고,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한과 눈을 마주한 사랑은 확실히 제 마음을 자각했다.
어떤 말로도 아물지 않던 깊은 상처가 그의 다친 얼굴 앞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피가 맺힌 입술 하나 보는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원망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가슴이 찢어졌다.
나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이 남자에게 돌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