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지독한 이사랑 (58/63)


#57화. 지독한 이사랑
2023.07.17.


사랑을 약속 장소에 내려 주고 돌아가던 도한은 조수석에서 울리는 낯선 핸드폰 소리에 잠깐 차를 세웠다.

서둘러 내리느라 사랑이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발신인은 그녀의 엄마였다.

전화를 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받자니 걱정하실 것 같고.

도한은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려 사랑을 내려 준 식당을 찾아갔다.

핸드폰만 돌려주고 나올 생각으로 그녀가 앉아 있을 테이블을 찾는데,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약속 상대가 강지우와 정윤재였다.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둘이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게 황당했다.

그것도 이사랑 앞에서.

더 말이 안 되는 건 그녀가 둘의 다정한 모습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 어떻게…….”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한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네 핸드폰이 차에 있어서.”

“아.”

핸드폰을 건네받은 사랑이 지우와 윤재를 힐끔거렸다.

둘 역시 당황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이 현장을 변명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사랑과 윤재는 연애 중이고 윤재는 지우와 바람을 피우고 있는 설정이었다.

사랑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까지가 도한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지금 윤재와 지우의 모습은 누가 봐도 연인이었다.

사랑은 그 둘의 친구일 뿐이고.

결국 모든 사실을 도한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셋은 자신들의 거짓말이 끝이 났음을 직감했다. 어느 누구도 섣불리 입을 뗄 수 없었다.


“누구 생일인 것 같은데. 방해해서 미안.”

처음과 달리 여유를 되찾은 도한이 케이크 상자에서 사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가 볼게.”

무심한 그의 눈빛 속에서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만 같았다.

사랑의 손끝이 차가워지면서 온몸이 서늘해졌다.

그가 식당을 나서자 지우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간 떨어질 뻔했네. 너 여기까지 저 인간 차 타고 온 거야?”

“응…….”

사랑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렸다.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실망인가? 아니면 원망? 어쩌면 포기일 수도.

넋을 놓은 사랑의 앞에서 지우와 윤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차라리 잘됐다. 우리가 속인 거 알았으니까 정신 차렸겠지.”

“좀 충격받은 얼굴이던데.”

“겨우 이 정도로? 저 인간이 사랑이한테 한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얘기하려는 찰나에 사랑이 벌떡 일어났다.

지우와 윤재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뭐? 너 설마 지도한한테 가려고?”

지우가 두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쳤냐고 한 소리를 하려 했지만 사랑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야! 이사랑!”

또다시 도한에게 눈이 먼 사랑을 말리려는 지우를 윤재가 붙잡았다.


“두 사람이 해결하게 놔둬.”

“어떻게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도한이라고!”

안 그래도 불안했다.

그가 사랑과 같은 팀이라고 했을 때부터 지우는 이런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윤재를 사랑의 남자 친구라고 거짓말까지 해 가며 여기까지 끌고 왔던 건데.

이젠 다 소용없게 돼 버렸다.

저 바보 같은 게 또 지도한을 좋아하고 말았다며 지우가 씩씩거렸다.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생각해 보면 또가 아니었다.

사랑은 스무 살에 도한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를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지독한 건 도한이 아니라 이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지우는 황급히 식당 밖으로 나가는 사랑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 * *



“지도한 씨!”

주차장으로 뛰어온 사랑이 차에 오르려는 도한을 크게 불렀다.

그 소리에 그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제 앞에 당도해 숨을 몰아쉬는 사랑을 보며 도한은 운전석 문을 닫았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뭐가.”

“거짓말해서요. 윤재가 내 남자 친구라고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커지고 말았다.

한 번 시작된 거짓말은 점점 더 크게 부풀려졌다.

그러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결국엔 터져 버렸다.

뭐든 지나치면 화를 입는 법이다.


“옆집에 산다는 것도 거짓말인가.”

도한은 뭐가 거짓이고 뭐가 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뭘 믿고 뭘 걸러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사실이에요. 올 초에 윤재가 이사를 왔어요. 여자 둘이 사는 거 위험하다고.”

미안한 마음에 사랑이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제 와 오해를 풀겠다고 달려온 자신이 우스운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정윤재랑 강지우는 언제부터 사귀었는데.”

“지우 4학년 때부터요. 이제 3년쯤 됐어요.”

도한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랑 사귀었던 남자를…….”

“아니에요! 저 윤재랑 사귄 적 없어요.”

“뭐?”

도한은 당연히 두 사람이 연애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사귀기 전부터 정윤재는 사랑을 좋아했고, 고백까지 했으니까.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힘들어하는 그녀의 옆을 정윤재가 지켜 줬을 거라 여겼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을 거라고.


“윤재하고는 친구 이상인 적 한 번도 없었어요. 지우도 그걸 아니까 윤재랑 사귄 거고요. 정말이에요.”

사랑은 어떻게 해야 도한이 자신의 말을 믿을지 속이 탔다.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해서 진실마저 거짓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초조하게 그의 반응을 살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보니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주위가 어두워서 더욱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저라도 어이가 없을 것 같았다.

지금껏 속은 게 괘씸해서 말도 섞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잘못했다고 용서라도 빌어야 하나. 울상을 짓는 사랑에게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

“……네?”

갑자기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의아해 사랑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가 저 둘한테서 상처받을 일은 없는 것 같아서.”

“……”

“정말 다행이라고.”

도한은 무엇보다 그 사실에 안도했다.

정윤재와 강지우가 사랑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서.

차라리 거짓말인 게 다행이었다.

지금까지 속은 게 황당하긴 했지만, 사랑에겐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만 들어가. 친구들 기다려.”

도한이 굳은 표정으로 돌아서자 사랑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나한테 화났어요?”

사랑은 이대로 그와 멀어지게 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이제야 거리가 좁혀졌는데, 사무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니.”

“실망했어요?”

“아니야.”

사랑은 그의 팔을 붙잡은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이제 가장 궁금한 걸 물어볼 차례인데 대답을 듣기가 두려웠다.

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용기를 냈다.


“그럼, 나…… 포기했어요?”

사랑은 이 또한 아니라고 해 주길 바랐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나서도 자신의 마음이 다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으니까.

그만큼 저를 위해 준다는 뜻이니까,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포기하지 않길 바랐다.

그래야 사랑이 그에게 갈 수 있었다.


“글쎄.”

하지만 도한의 대답은 그녀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어.”

하긴. 지금까지 속은 게 억울하겠지.

작정하고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정떨어질 만도 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싶었던 사랑이 고개를 떨궜다.

이내 그가 말을 덧붙였다.


“네가 그걸 바라는 것 같으니까.”

“……네?”

“그래서 거짓말한 거잖아. 그만큼 내가 싫어서.”

사랑은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처음엔 그런 이유로 거짓말을 시작했었다.

다신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가 자신을 포기할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사랑은 이런 자신이 이중적으로 느껴져 더 이상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싫은 게 당연해. 내가 너라도 그럴 거야. 다 이해하니까 미안해할 거 없어.”

도한은 그동안 세 사람에게 속아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이었지만, 화를 낼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사랑에게 실망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포기는 다른 문제였다.

정윤재와 결혼할 거라고 거짓말까지 할 정도면 그만큼 지도한이 끔찍하게 싫다는 거니까.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인간인지도 알았으니 더 그렇겠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지 않을까.

도한은 오늘 사랑의 마음을 확실하게 확인했다.

제게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계속해서 주변을 맴도는 건 그녀를 또다시 힘들게 할 뿐이었다.


“이만 갈게. 내일 회사에서 보자.”

도한은 사랑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식당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에게 그만 돌려보내야 했다.

저 때문에 생일 파티가 엉망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가 차를 타고 그대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사랑이 그 모습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내 앞에서 먼저 안 가겠다며.”

거짓말. 이렇게 또 나 혼자 두고 가 버렸으면서.

도한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아니 인정한 그녀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마음이 복잡했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그 일주일 동안 사랑은 도한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의 차를 타고 퇴근한 적도 없으며 점심을 함께 먹지도 않았다.

윤재의 생일날 이후로 그는 그녀를 직장 동료로만 대했다.

어쩌다 사무실에 둘만 남았을 때도 서로 말이 없었다.

사랑은 기다렸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 주길.

퇴근하고 저녁 같이 먹지 않겠냐고, 주말에는 뭐 하냐고.

그렇게 회사 밖에서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정말 포기한 걸까.

저를 그만 단념한 걸까.

사랑은 서운한 마음을 담아 옆자리에 있는 도한을 힐긋거렸다.

자신을 싫어한다 여겨서 다가오기를 멈추기로 한 것 같았다.

그러니 저가 먼저 마음을 전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사랑에겐 그럴 용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와 다시 시작할 자신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사랑에 용감했던 스무 살의 신입생이 아니었다.


“4월인데 벌써 날이 이렇게 덥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동식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더운 날씨에 옥상에서 담배까지 피우고 오느라 얼굴에 땀이 맺혔다.


“어이 막내들.”

“네, 팀장님.”

사랑과 도한이 동시에 대답하고 일어섰다.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 좀 사와. 내가 살 테니까.”

동식이 사랑에게 카드를 건네자 반대편에서 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팀장님, 겨우 아이스크림으로 때우시려는 거 아니죠?”

“뭘 때워?”

“야유회에서 그러셨잖아요. 족구 이긴 기념으로 조만간 거하게 쏠 테니까 기대들 하라고. 설마 아이스크림으로 끝내시려는 거 아니냐고요.”

“당연히 아니지. 아주 거하게 쏘려고 돈 모으는 중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오, 제가 미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했네요.”

“먹고 싶은 거나 생각해 두라고. 오 대리 입사하고 가장 위대한 회식 날이 될 테니까.”

나영이 사무실이 떠나가게 손뼉을 치자 다른 팀원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두 사람은 가서 아이스크림이나 사 와.”

“저 혼자 다녀올게요, 팀장님.”

사랑은 동식에게 받은 카드와 자신의 핸드폰을 챙겼다.

팀원이 열셋이라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혼자서는 심심하잖아. 둘이 같이 내려갔다 와.”

팀장의 말을 두 번이나 거역할 수 없었던 사랑은 어쩔 수 없이 도한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나영은 얼마 전부터 둘의 분위기가 무거운 걸 감지했다. 동식도 이상한 걸 느꼈는지 곧장 나영에게 물었다.


“저 두 사람 말이야. 좀 수상하지 않아?”

“네? 사랑 씨랑 지 대리님이요?”

뜨끔한 나영은 동식도 뭘 알고 있나 싶어 긴장했다.

도한이 보고 싶어 했던 여자가 사랑이라는 걸 드디어 눈치챈 건가.

저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 굳건히 비밀을 지켜 왔는데, 아무래도 들통 난 것 같았다.


“그래. 둘이 사이가 너무 안 좋은 것 같아. 성격이 정반대라 그런지 일하면서 많이 부딪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오 대리가 보기엔 어때?”

“그래서 일부러 두 사람 보내신 거예요? 둘이 친해지라고요?”

동식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같이 일해야 하는데 저렇게 안 맞아서 어떡해? 아주 걱정이야.”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자리로 돌아가자 나영은 미간을 좁혔다.

비밀이 들키지 않은 건 다행인데, 저렇게 눈치가 없으셔서 아주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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