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소원을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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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소원을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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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소원을 하나 더
2023.07.14.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개발기획팀은 지난 금요일에 있었던 야유회를 화제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날의 주인공인 도한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다들 여전히 흥분한 상태로 박수까지 쳤다.
그중에서도 동식의 얼굴이 가장 상기되어 있었다.
“어서 오게. 우리 팀 영웅.”
팀원들의 격한 인사가 적응되지 않아 도한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인 채 자리로 걸어갔다.
모두가 그의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내가 지 대리 덕에 취미가 족구가 됐어.”
“저도요, 과장님. 주말에 혼자 나가서 연습까지 했다니까요.”
“나도 여운이 남아서 족구 공을 샀잖아.”
함께 경기한 세 명의 선수들이 앞다퉈 족구에 대한 사랑을 밝혔다.
이를 듣고 있던 동식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지 대리랑 축구를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실력이 보통이 아니더라고. 족구도 잘할 줄 알았어.”
“설마 팀장님, 지 대리님이 공을 잘 차서 스카우트하신 건 아니죠?”
나영의 진지한 질문에 동식이 실없이 웃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못 찼으면 다시 생각해 봤을 수도 있어.”
“에이, 말도 안 돼요. 진짜 그런 거면 지 대리님이 너무 억울하죠. 겨우 공 하나로 사업을 포기한 셈이잖아요.”
모두가 웃고 떠드는 사이 사무실 문이 열리며 사랑이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옆자리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곤란해하는 도한의 표정이 볼만했다.
팀원들에게 인사를 한 그녀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들이 돌아간 후에야 제 책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엔 여직원들이 대화를 이끌어 갔다.
“겨우 공 하나가 아니죠. 우리 회사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입사했다고 하셨잖아요.”
“맞다. 지 대리님, 그 여자분은 대체 어느 부서예요?”
“궁금해 죽겠어요. 무슨 사업 본부인지만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이제 정체 좀 밝혀 줘요. 진짜 우리만 알고 있을게요.”
흠칫 놀란 사랑이 슬쩍 도한을 바라봤다. 다행히 그는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방금 질문한 여직원들 중 한 명이 사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사랑 씨, 지 대리님이랑 동문 아니야?”
“네? 아, 네. 맞아요.”
곧 이어질 질문이 예상돼 사랑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혹시 사랑 씨는 알고 있어? 그 여자분이 누군지?”
“아니요. 저도 잘…….”
사랑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왔다. 마침 나영이 나서서 대신 대답했다.
“두 사람은 학교에서 마주친 적도 없다는데 사랑 씨가 어떻게 알겠어.”
“아 참, 지 대리님 2학년 때 자퇴했다고 했지.”
사랑은 살짝 안도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곧 동식이 시계를 보고는 그만 자리를 정리했다.
“자자, 남은 이야기는 다음 회식 때 마저 하기로 하고. 이제 일들 합시다.”
아쉬움이 가득한 팀원들이 자리로 돌아가는 틈에 동식이 도한에게 소곤거렸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자고.”
동식은 도한과 함께 옥상에 올라가서 이번에야말로 그 여자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도한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대꾸했다.
“저 담배 끊었습니다, 팀장님.”
그 말에 놀란 건 동식만이 아니었다.
이제야 제자리에 앉은 사랑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도한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담배를 왜 끊어?”
도한의 난데없는 선언에 동식은 세상이 무너진 얼굴이었다.
옥상에서 같이 바람을 쐴 수 있는 유일한 동지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이다.
다시 혼자서 외롭게 담배 연기를 내뿜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청천벽력이었다.
“몸에 해로워서요.”
“허. 그럼 지금까진 왜 피웠는데?”
“괴로운 것보단 해로운 게 나았거든요.”
도한은 사랑이 보고 싶어 괴로울 때마다 담배를 찾았다.
머릿속에 그녀가 가득할 때면 담배 한 모금으로 생각을 떨쳐 내고 일상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중독되어 손에서 놓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그녀를 다시 만났고, 그녀가 담배 피우는 걸 마땅치 않게 여기니 미련 없이 끊었다.
“뭔 소리야, 그게? 그리고 금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곧 금단 현상 와서 다시 피우게 될걸? 솔직히 말해 봐. 금연 작심하고 벌써 몇 대 피웠지?”
“아니요. 담배 생각도 안 나던데요.”
“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도한은 대답 대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사랑과 헤어지고 지독한 금단 현상을 이미 겪었던 바라 이 정도 참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기뻐서 주말 내내 몸속에서 엔도르핀이 만들어졌는지, 오히려 금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팀장님께서도 가족들 생각하셔서 금연하세요.”
도한의 걱정과도 같은 잔소리에 동식이 미간을 찌푸렸다.
불현듯 상품기획팀 박 과장이 도한에게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너처럼 지독한 놈은 처음 봤다고.
그리고 야유회에서 했던 말도 귀를 스쳤다.
‘어디서 저런 괴물을 데려오셨어요.’
아무래도 도한은 지독한 괴물이 틀림없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 단 며칠 만에 금연에 성공할 수가 없었다.
* * *
“정말 담배 끊었어요?”
도한과 함께 퇴근하던 사랑이 슬쩍 물었다.
퇴근 직전에 받은 메일을 처리하느라 평소보다 늦게 끝났는데, 도한이 가지 않고 기다려 준 덕분에 그의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 6시 약속에 늦을 게 뻔했다.
“끊겠다고 했잖아. 약속 장소가 어디야.”
회사 주차장에서 차를 빼낸 그가 정지 신호에 멈춰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려고 준비했다.
사랑은 약속 장소 근처의 지하철역을 이야기하려다 식당 이름을 알려 주었다.
오늘이 윤재 생일이라서 지우와 셋이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혹시라도 도한이 두 사람을 볼까 싶어 근처에서 내려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을 보니 늦게 도착할 것 같아 마주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담배 끊으면 진짜 독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랑의 말에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 지독한 거야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그건 그렇다며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힘들어요?”
“별로.”
“사무실에서 단것 먹는 것도 못 봤는데. 전에 우리 아빠 금연할 때 보니까 사탕을 입에 달고 사셨거든요.”
“보통은 담배 피우고 싶은 욕구를 참아야 하니까 사탕이라도 먹으면서 버티지.”
“근데 지도한 씨는 어떻게 안 그래요?”
아빠가 몇 번의 실패 끝에 힘겹게 금연에 성공한 걸 지켜봤었기에 사랑은 더욱 의아했다.
금연하기로 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가.
아닌데. 며칠 안 지났으니까 더 금단 현상이 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정말 지독한 성격이라 아무렇지 않게 끊을 수 있는 건가.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사랑에게 그가 말했다.
“나는 네가 옆에 있잖아.”
“……네?”
“나한테는 이사랑이 사탕이라고.”
보기만 해도 달콤한 네가 있는데 사탕을 뭐 하러 먹어.
사랑은 그런 눈빛을 하고 제게 웃어 주는 도한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담배를 끊었다고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나.
이런 게 금단 현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여자들이 좋아할 말을 참 잘 아시네요.”
“<연애와 결혼>을 두 번이나 수강해서?”
사랑은 강의명을 듣는 순간 도한과 했었던 데이트 과제들이 떠올랐다.
진짜 연인이 된 것도 아닌데, 설레서 잠도 제대로 못 이루었던 첫 번째 데이트.
그를 향한 마음이 커져 버려 가슴에 담지 못하고 좋아한다고 고백했었던 두 번째 데이트.
캠퍼스 커플답게 손잡고 학교를 돌아다니며 기숙사 건물 지하로 숨어 들어가 남몰래 키스를 나눴던 세 번째 데이트.
그리고 한순간에 이별을 당해 함께할 수 없었던 혼자만의 네 번째 데이트까지.
<연애와 결혼>은 그녀의 스무 살 전부였다.
“저도 두 번 수강한 기분이에요. 저 2학년 때 재성 오빠가 그 강의 신청했다고 시험 문제나, 뭐 이것저것 가끔 물어봤었거든요.”
“재성 오빠가 누군데.”
“건축학과 한재성이요. 저하고 소개팅했던 태훈 오빠 후배.”
도한은 그제야 사랑이 말하는 재성 오빠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여우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착한 여자는 별로라던.
그런 이유로 이사랑을 퇴짜 놓더니 나중에 밥 한번 먹자면서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었지.
“그 오빠는 잘 있어요? 졸업했을 텐데 무슨 일 해요?”
그녀의 들뜬 목소리가 못마땅했던 도한이 눈썹을 찌푸렸다.
“잘 있겠지. 회사 다니면서.”
“너무 무심한 거 아니에요? 그 오빠는 지도한 씨랑 친하다고 생각하던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소개팅할 때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지도한 씨 얘기나 했죠, 뭐. 그 오빠가 저보다는 지도한 씨한테 더 관심 있는 것 같았거든요.”
“소원을 하나 말고 두 개 들어 달라고 할걸.”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며 사랑이 눈을 깜빡였다.
“족구 이기면 들어 달라고 했던 소원 말이야.”
“아, 하나는 또 뭔데요?”
이름 부르게 해 달라는 것 말고 뭐가 더 있는지.
그리고 그걸 왜 한재성 얘기를 하다 말고 불쑥 꺼내는지.
사랑이 궁금해하면서도 이상하다고 느낄 때 그가 말했다.
“지도한 씨 말고 오빠라고 부르기.”
이 소원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거였기에 사랑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도한 씨도 나쁘지 않았는데 네가 한재성을 오빠라고 하니까 부럽네.”
도한은 오빠라는 호칭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랑의 목소리로 듣는 거라면 어떤 호칭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재성을 꼬박꼬박 오빠라고 하니 귀에 거슬렸다.
나보다 한재성하고 더 친한 기분?
도한은 유치하게도 오빠 소리 하나로 질투심이 솟구쳤다.
“상기팀이랑 족구 한 번 더 하자고 할까.”
“나한테 오빠 소리 듣겠다고요?”
“어.”
그의 진지한 대답에 사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전해지자 도한은 가슴이 뛰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손을 잡고, 안고,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머리와 가슴을 지배했다.
담배는 쉽게 끊을 수 있어도, 이사랑을 끊어 내고 생긴 금단 현상은 5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저기 앞에서 내려 주세요.”
약속 장소인 식당 건물이 보이자 사랑이 손으로 가리켰다.
도한은 그곳에 차를 세웠다.
다른 날 같았으면 그녀를 내려 주는 게 아쉬웠겠지만 지금은 빨리 헤어지고 싶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녀에게 손을 뻗을 것만 같았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랑이 미소를 보이곤 차에서 내렸다.
“하아.”
동시에 도한이 탄식을 내뱉었다.
점점 더 이사랑이 예뻐 보여서 큰일이다.
“그냥 다 말해 버릴까.”
사랑에게 정윤재와 강지우의 사이를 알리고 그녀를 차지해 버릴까.
정윤재보다 내가 더 사랑해 줄 테니 내게 오라고 할까.
하지만 곧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걸 깨닫고 도한은 그만 차를 출발시켰다.
사랑이 아파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정윤재를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이 상처로 끝나 버려서는 안 된다.
그가 사랑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녀를 흔들어서라도 정윤재로부터 떠날 수 있게 하려고.
믿었던 친구들의 배신을 알게 되기 전에.
* * *
“생일 축하해.”
사랑과 지우가 축하 인사를 건네자 윤재는 멋쩍게 웃으며 촛불을 후, 불었다.
사랑이 조금 늦은 관계로 테이블엔 미리 주문한 음식이 가득했다.
“고맙다. 그냥 집에서 대충 먹자니까 뭘 이렇게까지 하냐.”
“그래도 1년에 한 번 있는 생일인데 특별하게 챙겨야지.”
지우가 케이크를 상자에 다시 넣었다.
아무래도 음식에 케이크까지 먹는 건 무리였다.
집에 가서 2차로 파티를 하기로 하고, 지금은 음식에 집중하기로 했다.
“선물은 이따가 줄게.”
“나도.”
출근할 때 챙겨 가는 것도 불편해 선물은 집에 있었다.
“뭘 또 선물까지. 암튼 먹자. 너희 일하고 와서 배고프겠다.”
“하여간 정윤재. 우리 부모님 같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그렇게 말하니까 너 아저씨 같아.”
그녀들의 놀림에 윤재가 얼굴을 구겼다.
“참나. 걱정을 해 줘도 난리야.”
“됐고. 사진 찍어 줄 테니까 핸드폰이나 줘 봐. 둘이 좀 더 붙고.”
지우가 재빨리 자신의 핸드폰으로 카메라를 켜 사랑에게 건넸다.
사진 찍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윤재라 반항하기 전에 얼른 해치워야 했다.
사랑이 지우의 핸드폰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 윤재와 지우를 화면에 담았다.
윤재는 사진 찍히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이러다 언제 집에 가겠나 싶어 지우의 어깨를 감싸 자세를 취했다.
“빨리 찍어. 배고파 죽겠……”
그런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춰 사랑이 핸드폰을 내렸다.
제 뒤로 시선이 고정된 윤재와 지우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왜 그래?”
대체 뭘 보고 그러는지 의아해 사랑이 뒤를 돌아봤다.
바로 눈앞에 도한이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