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족구에 진심인 이유 (56/63)


#55화. 족구에 진심인 이유
2023.07.10.


도한은 아침 6시에 눈을 떴다.

식사 시간은 8시부터였지만, 조용히 일어나 팀원 셋을 깨워 발소리를 죽이고 밖으로 나왔다.

10시에 시작하는 족구 경기에 함께 뛸 동지들이었다.

어젯밤에 대부분 사람들이 거나하게 취해 갈 때 이 셋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도한이 미리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오늘의 결전을 위해서는 컨디션이 중요하다고.

족구로 상품기획팀을 한 번이라도 이겨 보는 게 소원이었던 팀원들은 군말 없이 도한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그를 쫓아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도한이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그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웬 신발이야?”

김인수 과장이 떠지지 않는 눈으로 하품을 하며 물었다.


“족구화입니다.”

“족구화? 축구화도 아니고 족구화가 따로 있단 말이야?”

“네. 한번 신어 보세요.”

세 사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신발을 갈아 신었다.

어제 퇴근하고 야유회장으로 오는 차 안에서 셋은 사랑의 전화를 받았다.

뜬금없이 발 사이즈를 묻기에 별생각 없이 알려 줬는데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신발 바닥에 돌기가 있어서 미끄럽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타격 면이 넓어 안정적으로 공을 리시브할 수 있고, 또 강력한 킥을 보낼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은 멍하니 도한을 바라봤다.

마치 족구화 광고를 보는 듯했다.

족구를 한번 이겨 보겠다고 족구화까지 사 오는 열정이라니.


“그럼 이제 연습하러 가실까요.”

어쨌든 다들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도한을 따라 족구장으로 장소를 옮겼다.


“족구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공을 발의 어느 부위로 맞추느냐입니다. 그것만 제대로 연습해도 점수는 어느 정도 낼 수 있습니다. 그럼 먼저 안축차기부터 시범에 들어가겠습니다.”

족구에 목숨이라도 걸었는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도한의 눈빛에 셋은 당혹스러웠다.

그러다 어느새 그의 강의에 홀려 눈을 부릅뜨고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 *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러다 정말 우리가 상기팀 이기는 거 아니에요?”

“말도 안 돼. 입사 5년 만에 처음 보는 광경이에요.”

“나는 12년 만에 처음이라고.”

족구 경기를 구경 중인 개발기획팀 직원들이 공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너나 할 것 없이 탄성을 자아냈다.

13대 12.

초반에 지고 있던 점수가 막판에 뒤집혀 앞서고 있었다.

지난밤 술이 과한 탓에 영업팀은 기권했고, 상품기획팀과 개발기획팀이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개발기획팀은 물론, 다른 팀들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꼴찌의 반란이었다.

특히 도한이 공격을 할 때면 속수무책이었다.

족구에도 국가 대표가 있다면 지도한을 내보내야 한다고 입을 모을 정도였다.


“와! 이제 한 점 남았다!”

상대 팀 실수로 점수가 나자 개발기획팀은 이미 잔칫집 분위기였다.

모두가 일어나 두 손을 모은 채 한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공이 도한의 발에 닿는 순간 다들 숨까지 참아 가며 긴장했다.

정확히 발등으로 날려 버린 공은 상대 진영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어떻게든 받아 보려던 박 과장은 무리해서 달려가다가 그만 넘어지기까지 했다.


“개발기획팀 승!”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개발기획팀 직원들이 서로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이겼다!!”

“우리가 상기팀을 이겼어요!”

“재직 중에 이런 영광을 누려 보다니.”

입사 연차에 상관없이 모두가 기쁨에 겨워 흥분했다.

경기를 뛴 선수들이 벤치에 돌아오자, 다들 고생했다며 물을 건네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고했어, 지도한. 네가 우리 팀 영웅이다.”

동식이 도한을 격하게 끌어안고 등을 세게 두드렸다.

평생의 소원이라도 이룬 듯 동식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팀워크가 좋았을 뿐입니다.”

도한의 겸손에 함께 뛴 동지들이 물을 마시며 한마디씩 얹었다.


“졌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지 대리님 성화에 6시부터 나와서 연습했다니까요.”

“족구화까지 사 온 거 보세요. 이겼으니 다행이지 졌으면 진짜 지 대리한테 혼났을걸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지 대리 무서워서 악착같이 공 받았잖아요.”

투정인지 칭찬인지 모호한 말들을 하며 다들 허허허 웃었다.

그들과 함께 웃고 있던 도한이 사랑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마주했다.

그가 조금 더 활짝 웃었고, 그녀도 기쁜 마음을 한껏 드러냈다.

사랑은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고생 많았다고 안아 주고 싶을 만큼 가슴이 벅찼다.

이제야 정말 그와 한 팀이 된 기분이었다.


 

* * *

점심을 먹고 나자 마지막 행사인 줄다리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비뽑기로 상품기획팀이 부전승으로 올라갔고, 개발기획팀은 영업팀과 경기를 치렀지만 압도적인 차이로 지고 말았다.

결승에선 상품기획팀이 이겨 우승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족구에서 졌다는 이유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항상 금메달만 따던 선수가 매번 자신에게 진 선수에게 패를 당했을 땐 충격이 더욱 큰 법이니까.

줄다리기를 끝으로 1박 2일의 야유회가 마무리되었다.


“다들 조심히 돌아가고 주말에 푹 쉬라고. 족구 이긴 기념으로 조만간 내가 거하게 쏠 테니까 기대들 하고.”

“네, 팀장님!”

개발기획팀 팀원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다른 팀들이 부러운 눈빛을 보내며 하나둘 주차장을 떠났다.

도한과 사랑도 그만 차에 올랐다.


“영웅이 된 기분이 어때요?”

그녀가 안전벨트를 채우며 아직도 흥분에 도취된 목소리로 물었다.


“뭐, 나쁘진 않네.”

그에 비해 정작 당사자는 너무 침착해 보였다.

도한이 부드럽게 핸들을 돌려 차를 빼내자, 사랑은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에 등을 편히 기댔다.


“피곤하지 않아요? 서울까지 가야 하는데.”

“일찍 일어났더니 그렇긴 해.”

“그럼 좀 쉬었다 갈까요?”

“……뭐?”

그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사랑의 몸이 앞으로 튕겼다.


“미안.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조금 놀랐을 뿐이라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바다가 있는 것 같아서요. 거기에 차 세우고 잠깐이라도 좀 자요. 그동안 저는 바다 구경이나 하고 있을게요.”

도한은 사랑의 맑은 두 눈을 보며 속으로 자기 자신을 욕했다.

좀 쉬었다 가자는 말을 멋대로 오해하고 말았다.

자신의 불순한 생각을 그녀가 알게 되면 당장 차에서 내릴 것만 같아 서둘러 다시 출발했다.

그녀의 한마디로 가슴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뭐가 아쉽다고 몰래 한숨까지 나오는지.


“근데 족구를 왜 그렇게 잘해요?”

사랑이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근처 바다로 바꾸며 물었다.


“어릴 때 축구랑 배구를 좀 배웠어.”

“오늘 하는 거 보니까 운동 신경이 남다르던데. 왜 선수는 안 했어요?”

“운동은 좋은데 훈련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는 거 적성에도 안 맞고.”

사랑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성격은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어제 족구화 사러 갈 때만 해도 괜히 돈 버리는 거 아닌가 했는데. 30만 원 투자할 만하네요. 팀장님이 그 돈 지도한 씨한테 주겠대요. 이겨 줘서 고맙다고.”

“주시면 감사히 받아야지.”

안 받아도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래서 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좋아?”

“그럼요. 아까 박 과장님 표정 못 봤어요? 넘어지신 건 안 됐지만 다들 속으로 얼마나 통쾌했는데요. 지금껏 우리가 당한 게 좀 많았거든요.”

“내년에도 이겨야겠네.”

“당연하죠!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 지도한 씨 어깨가 더 무거워질걸요.”

웃고 떠드는 사이 바다가 보였다.

야유회 장소였던 펜션 2층 창문 너머로 바다가 살짝 보일 정도라 금세 도착했다.

도한이 차를 세우자 사랑은 안전벨트부터 풀었다.


“눈 좀 붙여요. 일어나면 전화하고요.”

그녀가 문을 열고 내렸다.

바다는 오랜만이라 가슴이 탁 트였다. 그런데 뒤에서 도한이 따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이라도 편히 쉬라고 자리를 피해 준 건데 그가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저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자요. 원래 혼자서도 잘 돌아다녀요.”

“나도 바다 보고 싶어서.”

“피곤하다면서요.”

“너랑 있으면 안 피곤해.”

할 말 없게 만드는 그의 재주에 사랑은 입을 다물었다.

하는 수 없이 나란히 모래사장을 걸었다.

평일이라 사람이 별로 없어서 여유롭게 바다를 구경할 수 있었다.

사랑은 문득 족구에서 이기면 소원 하나를 들어 달라던 도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참. 소원이 뭐예요? 족구 이겼으니까 말해 봐요.”

설마 윤재와 헤어지라는 건 아니겠지?

왠지 윤재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아 사랑은 슬슬 초조해졌다.

도한이 걸음을 멈춰 그녀도 발을 세웠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이름, 부를 수 있게 해 줘.”

순간 사랑의 두 눈이 커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탁이었다.


“네 이름. 부르고 싶어.”

사랑은 도한에게 한 번만 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었다.

그 후로 그가 손을 다친 그녀를 데려다주면서 무심코 이름을 말했었는데, 그녀가 달리는 차에서 안전벨트를 풀어 버린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의 분노에 찬 눈빛을 보고 그는 두 번 다시 사랑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오늘 그가 그토록 족구에 진심이었던 이유를 알게 된 사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의 간절한 소원은 파도 소리와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 * *

어스름한 저녁, 서울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차 안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 가득했다.

야유회장에서 떠날 때만 해도 한껏 들떠 쉬지 않고 떠들던 사랑은 바다에 다녀온 이후로 침묵했다.

그의 소원을 듣고 생각이 많아졌다.

5년 전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별할 때까지, 그리고 혼자 아파하고 그리워한 시간이 머릿속에서 순서대로 펼쳐졌다.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한 건 그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참하게 버림받은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에게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를 다시 만난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 모르겠다.

사무실에서 다시 만나게 됐을 땐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겨울 정도로 그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제게 다가오는 그를 밀어 냈다.

하지만 이제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아니,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편하고 기분 좋아 웃기도 했다.

그럼 나는 그를 용서한 건가.

그를 다시 좋아하는 건가.

자신도 모르겠는 마음에 사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곧 차가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다 왔네요.”

집 앞에 와서야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랑은 안전벨트를 풀어내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만 내려야 하는데 아직 그에게 답을 주지 못했다.

결국 짧은 인사만 건넸다.


“안녕히 가세요.”

사랑은 다시 도한이 불편해져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사랑.”

문을 열려던 사랑은 순간적으로 손이 얼어붙어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아.”

사랑은 아주 조금씩 몸을 움직여 운전석으로 겨우 고개를 옮겼다.

이미 차오른 눈물이 두 눈을 뒤덮어 그의 얼굴이 흐릿했다.


“어제 약속했으니까. 이제 넌 나한테 사랑이야.”

그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게 그저 이름이겠지만, 감정을 뜻하는 단어인 사랑으로 들려 고백처럼 느껴졌다.

사랑은 뭐가 됐든 더는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그가 가져가 버린 제 심장의 절반이 돌아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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