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어디서 저런 괴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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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어디서 저런 괴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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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어디서 저런 괴물을
2023.07.07.
오늘따라 퇴근을 준비하는 움직임들이 분주했다.
신모델 개발에 앞서 합동 야유회를 떠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네 팀 중에서 세 팀이 함께 1박 2일로 화합을 다지는 자리를 갖기로 했다.
“연구개발팀은 왜 매년 빠지는 거예요?”
일어서서 책상을 정리하던 사랑이 맞은편에 있는 나영에게 물었다.
신모델 프로젝트는 그녀들이 속한 개발기획팀과 상품기획팀, 영업팀, 그리고 연구개발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에도 연구개발팀은 야유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원래 연구원들은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치는 게 있어. 그냥 성향이 그래. 보통 공대생들 이미지가 사교적이진 않잖아.”
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이나 자신이나, 그 반대 성격이라 연구개발팀이 아닌 개발기획팀으로 뽑힌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심심한 생각을 하던 사랑은 옆자리의 도한을 힐긋거렸다.
그럼 이 남자는 어떻게 우리 팀으로 들어오게 된 건지 의아했다.
악명 높은 상품기획팀 박 과장이 지독한 놈이라고 인정할 만큼 인간관계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사람이니까.
그러다 곧 사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사업을 일군 대표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것도 대단한 성공을 이뤘다고 하니, 그의 사교성을 의심할 순 없었다.
서한 전자에 들어오게 된 계기도 사석에서 만난 동식과의 인연이 시작이었다고 했으니까.
“각자 타고 갈 차 정하고 이만 나갑시다.”
동식의 목소리에 팀원들이 웅성거렸다.
버스를 대절하지 않아 직원들의 차 몇 대로 움직일 계획이었다.
내일 야유회가 끝나면 회사로 돌아오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가기 때문에, 방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함께 차를 타기로 했다.
“그럼 사랑 씨는…… 지 대리님 차 타면 되겠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팀원이 열셋이라 넷, 넷, 셋으로 나누었더니 그들만 남게 된 것이다.
게다가 집도 그리 멀지 않아서, 순식간에 그렇게 결정이 나 버렸다.
“그래, 막내들끼리 편하게 가. 우리 욕도 좀 하면서.”
동식이 쐐기를 박고 사무실을 나섰다.
나머지 팀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한꺼번에 사라져 버려 사랑은 입만 벙긋거렸다.
왜 또 내게 이런 시련이.
야유회장까지 무려 두 시간이나 걸리는데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우리도 나가죠, 사수님.”
저와 달리 입꼬리를 올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사랑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지금의 존댓말과 ‘사수님’이라는 호칭이 차를 타는 순간부터 반말과 ‘너’로 바뀔 거라는 걸 익히 알고 있어서.
* * *
예약한 펜션까지는 두 시간 거리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일 기준이었다.
퇴근길, 그것도 서울 시내 저녁 시간대의 도로는 주차장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회사에서 나온 지 30분이 지나도록 아직 고속도로에 진입조차 못 한 상태였다.
내비게이션의 도착 시각은 볼 때마다 늦어지고 있었다.
사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막히는 길 만큼이나 가슴이 답답했다.
어제 도한과 저녁을 먹을 땐 그나마 대화가 자연스러웠는데 지금은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도한도 어색했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야유회를 퇴근하고 가는 줄은 몰랐는데.”
예상했던 그의 반말에 사랑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쯤 되니 사무실에서 잊지 않고 사수 대접을 해 주는 게 고맙기까지 했다.
“공식 휴가를 이틀이나 주진 않거든요. 그래서 보통은 당일에 가거나 퇴근하고 가요.”
고개를 끄덕인 도한이 다시 말을 꺼냈다.
“연수원으로 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연수원에서는 술 못 마시니까요. 그래도 오늘은 세 팀이 같이 가니까 멀쩡한 숙소에서 잘 수 있는 거예요.”
그가 질문한 덕에 무거웠던 차 안의 공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사랑은 이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재잘재잘 떠들었다.
“저 입사하고 첫 야유회는 우리 팀만 갔었는데, 무슨 천막 같은 데서 잤다니까요.”
“설마. 그래도 서한 전자인데.”
“인당 복후비가 4만 원이거든요. 거기에 야유회비 4만 원 더하면 8만 원밖에 안 되잖아요. 그때는 열두 명이었으니 그래 봤자 96만인데, 먹고 마시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숙소는 허름할 수밖에요. 오늘은 총 오십 명이니까 예산이 400만 원이라 고급 펜션에서 자는 거라고요.”
리조트도 아니고 고작 펜션인데 사랑이 ‘고급’을 강조하자 도한은 웃음이 나왔다.
숙소 하나에 기뻐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럼 오늘은 먹고 마시면 끝?”
“간단한 게임도 해요.”
“게임?”
“네. 그건 뭐, 중요한 게 아니고.”
사랑이 갑자기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눈을 반짝였다.
“혹시 족구 잘해요?”
“공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 편이야.”
“잘하는 편이 어느 정도인데요?”
“내가 들어간 팀이 져 본 적 없는 정도.”
“정말요?”
도한이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이자 사랑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근데 그건 왜 물어?”
“지금까지 우리 팀이 야유회에서 다른 팀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대요. 그게 남자들한테는 자존심 싸움 같은 건가 봐요. 특히 상기팀에 박 과장님이 들어온 후부터는 아주 크게 깨지고 있다는데, 그분이 족구광이라나. 저는 작년에 처음 봤는데 진짜 처참하게 지더라고요.”
하필 박 과장에게 지게 된 동식은 야유회가 끝나고 회사로 돌아와 남자 직원들과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고 했다.
“그러니까 오빠가 내일 우리 팀 기 좀 살려 줘요. 이기는 건 힘들어도 최소한 점수 차이는 얼마 안 나게.”
사랑은 그동안 박 과장한테 무시당한 게 떠올라 흥분한 상태였다. 순간 아차 싶었던 그녀가 조금 전에 뱉은 말을 정정했다.
“아니, 지 대리님이요.”
저도 모르게 그만 도한을 오빠라고 부르고 만 것이다.
한 번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는데, 감정이 격해지다 보니 말이 헛나가고 말았다.
그걸 깨닫는 즉시 사랑은 깜짝 놀라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왕 할 거면 이겨야지.”
아주 잠깐 스무 살의 이사랑을 본 것만 같아 도한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녀가 기뻐할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내일 족구는 무조건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림없어요. 3연승 중인 상기팀을 만년 꼴찌인 우리가 어떻게 이겨요.”
“그렇게 불가능해?”
“당연하죠.”
“그럼 우리가 이기면 내 소원 하나 들어줘.”
“네?”
“보상이 있어야 최선을 다하지.”
사랑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차피 못 이길 테니까.”
상대의 실력을 이미 봐서 알고 있는 터라 사랑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리 도한이 공을 잘 다룬다고 해도 혼자서 팀을 승리로 이끄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근데 소원이 뭔데요?”
뒤늦게 궁금해진 사랑이 물었지만 쉽게 알려 줄 그가 아니었다.
“그건 내일 이기고 나서 알려 줄게.”
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모르면 용감하다더니 지금 그가 딱 그랬다.
그래도 사랑은 내심 바랐다. 그의 소원이 뭔지도 모르면서, 박 과장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꼭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 * *
“그럼 지금부터 간단한 게임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숙소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강당 같은 곳에 한데 모이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세 개 팀의 화합을 위한 야유회가 시작부터 경쟁을 부추기는 자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먼저 각 팀의 신입 사원들 실력을 확인해 볼까요? 신입 사원들 모두 나와 주세요. 개발기획팀은 신입 사원이 없는 관계로 올해 입사하신 지도한 대리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은 앞으로 걸어 나가는 도한을 보며 지난 야유회를 떠올렸다.
개발기획팀 대표로 출전했던 그녀는 모든 게임에서 지고 말았다.
도한이 제발 이겨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랑은 속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첫 번째 게임은 제한 시간 내에 종이컵 높이 쌓기였다.
사회자가 시작 소리와 함께 스톱워치를 눌렀다.
상품기획팀의 진호, 영업팀의 수현, 그리고 도한이 동시에 종이컵을 쌓아 올렸다.
제한 시간은 단 1분.
수현은 급하게 종이컵을 올리다 쓰러뜨리기를 반복했고, 진호와 도한의 손길은 제법 안정적이었다.
거의 같은 위치까지 올라왔지만 도한이 한 개 차이로 이기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종이컵을 보며 팀원들은 숨을 죽였다.
이게 뭐라고 다들 표정이 비장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이대로라면 도한이 이기겠다고 생각할 찰나에 진호가 하나를 더 올려 동점이 됐다.
긴장감이 고조된 분위기에서 양쪽 팀원들이 하나만 더 올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맞춰 사회자는 남은 10초를 카운트하기 시작했다.
10, 9, 8, 7…….
결국 진호는 압박을 못 이겨 무리하게 하나를 더 올렸다. 그 순간 종이컵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와! 우리 팀이 이겼다!”
개발기획팀은 박수를 치며 흥분했지만, 정작 도한은 마치 모든 걸 예상이라도 한 듯 덤덤하게 종이컵을 정리했다.
곧바로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됐다.
이번 종목은 페트병 세우기.
적당한 물이 들어 있는 세 개의 페트병을 던져서 가장 빨리 테이블에 세우는 사람이 이기는 경기다.
사랑은 준비된 페트병을 보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작년에 하나도 성공을 하지 못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
도한도 마찬가지일 거라 여기며 별 기대 없이 게임을 관람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시작과 동시에 그가 툭툭 던지는 족족 페트병이 똑바로 섰다.
그가 세 개를 모두 성공할 때까지 진호와 수현은 단 하나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자가 대단하다며 도한에게 앙코르를 요청했다.
도한은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페트병을 던졌고, 곧 거짓말처럼 우뚝 섰다.
다음으로 이어진 휴지 멀리 던지기, 병뚜껑 튕기기 게임까지 전부 도한이 우승을 차지했다. 동식의 옆에 앉아 있던 박 과장이 한마디를 던졌다.
“어디서 저런 괴물을 데려오셨어요.”
지독한 놈인 줄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저게 인간이냐는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식은 팀의 위상을 드높인 도한이 자랑스러워 껄껄 웃어 대느라 바빴다.
* * *
모든 게임이 끝나고 술판이 벌어졌다.
사실상 야유회의 목적이기도 했기에 다들 적극적으로 임했다.
화합하면 술 아니겠는가.
이번 프로젝트도 잘 부탁한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린다.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기분 좋게 취해 갔다.
밤이 깊어 가자 자리를 이탈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낮에 근무를 하고 왔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사랑도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직 감기 기운이 남아 있어서 술을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바람 좀 쐬고 자러 갈 생각이었다.
펜션 앞 산책길을 걷던 사랑이 벤치에 앉아 있는 도한을 발견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주로 담배를 피웠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 다가오는 걸 본 그가 담배를 껐다.
“추운데 왜 나와.”
“답답해서요.”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던 도한은 그녀에게 벗어 줄 옷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녀가 몸살을 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차가운 밤공기가 신경 쓰였다.
“그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웠어요?”
“뭘.”
“아까 게임들이요. 어떻게 그걸 다 이길 수가 있냐고요.”
“뭐 대단한 거라고.”
엄청난 일을 해내고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가 신기해서 사랑이 도한을 빤히 쳐다봤다.
“진짜 대단한 건데. 아마 내일부터 팀장님한테 이쁨받을걸요?”
“팀장님보다 너한테 받고 싶은데.”
할 말은 잃은 사랑이 입을 살짝 벌렸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잡아야 했다.
취기가 오른 그의 나른한 시선을 받아 내기 어려웠는지, 그녀가 서둘러 눈을 피했다.
“저는 담배 피우는 직장 동료는 별로라서요.”
그래서 이뻐해 줄 수가 없다고 겨우 대꾸했는데 그가 말했다.
“끊을까?”
“네?”
“싫으면 끊고.”
“담배를요?”
도한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연이 어려운 거라는 것쯤은 사랑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하는 말이겠지 싶어 그녀는 대답 대신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싫다고 하면 끊을게.”
“진심이에요?”
그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랑이 눈을 크게 깜빡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하자 도한이 다시 물었다.
“싫어?”
“……네.”
사랑은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가끔 그에게서 풍기는 담배 냄새가 싫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지도한이 아닌 것 같아서.
“끊을게, 그럼.”
담배를 끊는 게 무슨 무 자르듯 쉬운 줄 아나. 그가 너무 쉽게 대답하자 사랑은 황당하기만 했다.
금단 현상을 이겨 내기가 그렇게 괴롭다는데, 뭐가 그리도 좋은지 도한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사랑은 그런 그를 보며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