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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저녁, 같이 먹을래요? (54/63)


#53화. 저녁, 같이 먹을래요?
2023.07.03.


퇴근 시간이라 엘리베이터 안이 복잡했다.

1층에서 사람들과 우르르 내린 사랑은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직 집에 가려면 멀었는데 감기 기운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피곤했다.

입맛이 없어서 점심을 대충 먹었더니 배도 고팠다.

빨리 침대에 누워 쉬고 싶은 마음이라 사랑은 지하철역으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쌀쌀한 바람에 코트를 여민 그녀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었다.


“앗.”

순간 오른손에 뜨거운 것이 닿아 사랑이 우뚝 발을 세웠다.

퇴근 준비를 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핫팩을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따뜻했던 온기가 주머니 속에 갇히면서 열이 더 오르는 바람에 만질 수도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사랑은 핫팩의 모서리 부분을 겨우 손으로 잡아 열기를 식혔다.


“고맙다는 말도 못 했네.”

상품기획팀에서 고충을 당하고 온 도한에게 감사 인사를 전할 새가 없었다.

그 일이 없었다 해도 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이제 와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그때 지우지 않고 전송했더라면 이렇게 마음이 무겁진 않았을 텐데.

사랑이 이번엔 왼쪽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아직 날이 춥습니다.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사수님.]

도한을 닮은 무심한 글씨체와 달리 멘트는 다정했다.

사귈 때도 그는 이런 모습이었다.

표정만 보면 정말 좋아하는 게 맞나 싶은데, 자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엔 애정이 가득했다.

그래서 사랑은 의심하지 않았다.

한순간에 버림받을 거라고는.

마음이 복잡해진 그녀가 종이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핸드폰을 켰다.

이제라도 도한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전화하기엔 부담스러워서 메시지 창을 열었는데, 바로 옆에서 어떤 차가 경적을 울렸다.

깜짝 놀란 사랑이 고개를 돌렸다. 내려간 조수석 창문 너머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도한이 보였다.


 


“타. 데려다줄게.”

사랑이 적당히 거절하려는 찰나에 뒤에 있던 다른 차들이 경적을 울려 댔다.

정신없는 퇴근길 도로를 그가 막아선 탓이었다.

사랑은 하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박 과장 옆에서 세 시간을 버틴 그였으니, 거절하면 지하철역까지 쫓아올 수도 있었다.


“남자 친구한테 데리러 오라고 하지. 몸도 안 좋은데.”

사랑은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도한이 적응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는 깍듯하게 사수님이지만, 회사 밖에서 둘이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는 그가 여전히 불편했다.


“윤재 4학년이라 바빠요.”

정지 신호에 맞춰 차를 멈춘 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 바쁜 남자 친구가 어제 강지우 퇴근할 때 마중 나갔던 건 아느냐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뻔뻔한 그 낯짝이 떠올라 도한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런데 문득 사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녁, 같이 먹을래요?”

도한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고개를 홱 돌렸다.

앞만 바라보고 있는 사랑의 모습에 잘못 들은 거라고 확신한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바쁘면 됐고요.”

그제야 그가 다급히 답했다.


“안 바빠. 하나도 안 바빠.”

심장이 하도 빠르게 뛰어서 도한은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가 나왔다.

뒤늦게 진정을 하고 다음 말을 이었다.


“같이 먹어. 저녁.”

 

* * *

두 사람은 회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식당으로 갔다.

도한이 뭘 먹으러 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사랑은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답했다.

오늘 그에게 받은 것들이 고마워서 저녁을 사고 싶었다.

자신이 입사했을 때 사수였던 나영은 이따금 퇴근하고 나서 저녁을 사 주곤 했다.

그 뒤로도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을 때면 술도 한잔하며 회포를 풀었다.

후배가 생기면 저 또한 그녀처럼 좋은 선배가 되어야지 했는데, 그 후배의 역할을 도한이 맡는 바람에 지금껏 한 번도 회사 밖에서 그와 저녁을 먹은 적이 없었다.

사랑은 오늘 제대로 된 사수 노릇을 해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가 죽집으로 데려올 줄은 몰랐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전복죽 어때.”

“네? 아, 네. 괜찮아요.”

사랑이 얼떨결에 대답하자 도한은 직원에게 전복죽 두 개를 주문했다.


“점심 제대로 못 먹었다며. 밥 넘기기 힘들면 죽이 나을 것 같아서.”

도한은 퇴근 전에 사랑과 나영이 나눈 대화를 들었다.

나영이 사랑에게 점심도 제대로 못 먹어서 힘들 테니 얼른 들어가서 쉬라고 했었다.

그 얘기를 듣고 죽이라도 사 주고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었다.

그가 테이블에 사랑의 수저를 놓아 주며 툭 말을 뱉었다.


“하나 더 주문해서 포장할게. 내일 아침에 먹고 출근해.”

“아니요. 지우도 있는데 그건 좀…….”

“아.”

도한은 잠시 잊고 있었다.

사랑이 강지우와 산다는 걸.

그 옆집에 사랑의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도.

사랑이 먼저 저녁을 먹자고 한 것에 들떠서, 단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게 믿기지 않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었다.

도한은 그녀의 한마디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났다.


“회사 카페에 유자차 안 팔던데. 어떻게 산 거예요?”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가 어색해서 사랑이 화제를 돌렸다.


“카페 매니저한테 부탁했어. 얼마 전까지 판매하던 거니까 아직 있을 것 같아서.”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라 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나 말고 다른 사수 만났으면 오늘 칭찬받았을 거예요.”

몸이 아플 때 후배가 이것저것 챙겨 준다면 당연히 감동이다.

팍팍한 회사 생활에서 선후배 사이에 생기는 정은 감기약보다도 힘이 나니까.


“다른 사람이었으면 안 줬겠지.”

“네?”

“네가 내 사수라서 준 거야.”

직장 동료가 아프다고 호의를 베풀 만큼 도한은 좋은 인간이 되지 못했다.

이사랑이 아프니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니까 걱정하는 것뿐이지.

순간 사랑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어제는 ‘내가 널 사랑하는 것보다’라는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거짓말을 잘하지 못해서 솔직했던 건 저였는데, 어쩐지 예전의 도한과 자신이 뒤바뀐 것 같았다.

사랑이 그를 낯설어하는 사이 주문한 죽 두 그릇이 나왔다.


“조심히 먹어. 뜨거우니까.”

“네.”

이런 말조차 익숙하지 않아 사랑은 천천히 죽을 먹으며 몰래몰래 그를 힐끔거렸다.


“다리는 안 아파요? 상기팀 가서 세 시간이나 서 있었다면서요.”

“괜찮아.”

그와 대화를 나눌 땐 회사 주제가 제일 적당했다.

침묵을 지키는 것보다 뭐라도 이야기하는 게 덜 어색할 것 같았다.


“다음부터는 그냥 와요. 박 과장님 건드려서 좋을 거 없는 분이에요. 눈 밖에 났다가 잘릴 수도 있다고요.”

“내가 잘리면 너한테는 좋은 거잖아.”

농담과 진심이 반반 섞인 말에 사랑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불편해서 회사를 그만두는 것에 대해 고민하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부당하게 해고되는 건 싫었다.

그녀가 난처한 표정을 하자 도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대단한 상사라도 마음대로 사람 못 잘라. 노동청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러다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요.”

“그럼 그만두지, 뭐. 회사가 서한 전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는 보고 싶은 사람 있어서 왔다더니.”

사랑이 뜨거운 죽을 후후 불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 마음을 흔들어 댈 때는 언제고, 당장 그만둬도 상관없는 것처럼 구는 모습이 괘씸해서 저도 모르게 툴툴거렸다.

막상 같은 사무실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니 우리 회사에 입사한 게 후회스럽나.

사수로서 살갑게 대해 준 적이 없었기에, 도한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업무적인 면만 봤을 땐 어딜 가나 환영받을 만한 직원이었으니까.

사랑의 마음이 조금 서늘해질 찰나에 그가 말했다.


“네가 불편하잖아. 나 때문에.”

수저로 죽을 휘휘 젓던 사랑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서운한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한이 따뜻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사랑은 제 마음을 들켰다는 창피함이 몰려와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어쨌든 미안해요.”

“뭐가.”

“상기팀에 내가 갔어야 했는데 지도한 씨 보낸 거요.”

“내가 가서 다행이지. 네가 거기서 세 시간 서 있었으면 내가 그 사람 갑질로 고발해 버렸을 테니까.”

사랑이 다시 그와 눈을 맞췄다.


‘네가 다쳤으면 아까 그 X끼는 내 손에 죽었어.’

5년 전, 저 대신 어떤 남자와 부딪혀 팔을 다쳤을 때 도한이 했던 말이었다.

사랑은 눈가가 시큰거려 괜히 죽을 휘적거렸다.

시간이 지났어도 그는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우리 사이는 왜 이 모양이 됐나 싶어서.


“내가 갔으면 세 시간이나 서 있지 않았겠죠. 누가 미련하게 그러고 있어요? 안 주겠다고 하면 그냥 오는 거지.”

“그 사람 여직원 무시한다며.”

“네?”

“너한테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열 받잖아.”

“…….”

“그래서 지기 싫었어.”

말해 놓고 보니 유치하게 느껴졌을까. 도한은 그만 고개를 내리고 죽을 떠먹었다.

사랑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방금까지 서늘했던 가슴이 어느새 뜨거워져 있었다.

* * *

먼저 식사를 마친 도한은 사랑을 기다려 주었다.

먹는 걸 지켜보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 그가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때 테이블에 올려 둔 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태훈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중에 통화하려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도한은 사랑의 시선을 느꼈다.

할 말이라도 있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언니는, 어떻게 지내요? 수술하고 복학은 했어요?”

혜리의 사정을 들어서인지 사랑은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다.

아무런 죄도 없는데 오빠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니 세상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게다가 건강까지 잃었다고 해,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궁금했다.


“복학은, 안 했어.”

도한은 혜리에게 학교를 그만두라는 조건을 내걸고 사랑과 헤어졌다는 얘기까진 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더 지독한 놈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수술 잘 마쳤다면서요.”

“항암 치료도 해야 했고, 좀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젠 정말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

사랑은 혜리가 건강을 되찾았다는 말에 내심 안심이 됐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슬펐을 거다.

잠깐 정적이 내려앉자 다시 도한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받아요. 괜찮으니까.”

“나중에 내가 하면 돼.”

사랑은 그에게 전화를 한 사람이 혜리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김태훈이야. 곧 결혼하거든. 결혼식에 올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을 거야.”

“태훈 오빠 벌써 결혼해요?”

“5월에 한다고 하더라.”

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얽히고설킨 인연 때문에 태훈의 전화번호는 알고 있었어도 연락은 하지 않는 사이가 돼 버렸다.

제게 청첩장을 보내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일 거다.


“태훈 오빠하고는 계속 연락하고 지냈어요?”

“아니, 얼마 전부터.”

“학교 다닐 때 태훈 오빠가 지도한 씨 욕 엄청 했었는데. 미국이 아니라 우주로 유학 간 거 아니냐고. 어떻게 전화 한 통이 없냐고. 진짜 지독한 놈이라고.”

평소에는 사랑의 눈치를 보느라 도한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도 않던 태훈은 술을 마시고 나면 풀어지곤 했다.

학교에서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더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 때문에 강지우하고 헤어졌겠네.”

지우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랑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부정할 수 없었다.


“강지우도 내 욕 많이 했겠다.”

“그럼요. 한 번은 술에 취해서 하도 소리를 치니까 식당에서 쫓겨날 뻔한 적도 있어요. 윤재가 겨우 뜯어말렸다니까요.”

그녀의 말을 듣는 내내 옅은 미소를 짓던 도한이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윤재와 강지우가 사랑을 얼마나 오랫동안 속였을까 싶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둘 다 순수한 줄만 알았는데.

그래서 사랑과 잘 어울린다고 여겼는데.

도한은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한 것도 모르고 해맑기만 한 사랑을 더는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내일 퇴근하고 야유회 가야 하는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지.”

하지만 그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그녀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누가 사수인지 모르겠어서.


“네, 그만 가요.”

전복죽으로 속을 든든하게 채운 사랑은 도한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이서 밥을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됐다는 게 신기했다.

늘 오늘만 같으면 직장 동료로 지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사랑은 그렇게 조금씩 그가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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