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제대로 사랑받는 법
(53/63)
52화. 제대로 사랑받는 법
(53/63)
#52화. 제대로 사랑받는 법
2023.06.30.
지우는 오랜만에 동료들과 밖에서 점심을 먹었다.
주로 구내식당을 이용하지만 다음 달에 결혼을 앞둔 동기가 청첩장을 주며 밥을 사겠다고 해서 다 함께 다녀왔다.
커피를 하나씩 손에 들고 계속 수다를 떨면서 회사로 돌아오는데 사무실 앞에 도한이 서 있었다.
지우는 그를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지은 죄도 없는데, 그에게는 친구의 남자 친구와 바람난 여자라서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동료들을 먼저 보낸 지우가 도한과 마주 섰다.
“저 찾아오셨어요?”
네가 여긴 웬일이냐는 못마땅한 시선에 그 또한 굳은 표정이었다.
“사랑이가 정윤재랑 결혼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지우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당연히 처음 듣는 얘기고,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미처 몰랐던 설정이라 당황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심 사랑을 칭찬했다.
도한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거 같아서.
그럼 나는 결혼을 앞둔 친구의 남자와 바람난 더 몹쓸 여자가 되었군.
그 부분은 씁쓸했지만 스스로 판 무덤이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알고 있었네.”
침착해 보이는 지우의 모습에 도한은 미간을 좁혔다.
어제 자신이 잘못 보고 잘못 들었길 바랐지만, 지우의 태도를 보아하니 제대로 보고 들은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너랑 정윤재가 사랑이한테 그럴 수 있어. 그것도 사랑이랑 같이 살면서 바로 옆집에서 친구의 애인이랑…….”
입에 담기에도 힘들어 도한은 말을 멈췄다.
가장 믿고 있는 두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으니, 사랑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가슴이 무너질지 눈앞이 깜깜했다.
밤새 생각해 봤지만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지우를 찾아왔다.
두 사람의 관계부터 끊어 내는 게 순서인 거 같아서.
“지금이라도 그만둬.”
“뭘요?”
“정윤재 만나는 거.”
지난 5년 동안 대체 이 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순수하기만 했던 신입생들이 어떻게 이런 지저분한 삼각관계에 놓이게 됐는지 도한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 시작이 저 때문인 것 같아 더욱 괴로웠다.
“어제 윤재가 한 얘기 그새 잊은 모양인데. 오빠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요.”
지우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신도 이렇게 도한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화가 치미는데 사랑은 오죽할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라면 말도 섞고 싶지 않은 전 남친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할 자신이 없었다.
“사랑이한테 상처 준 거로 따지자면 오빠는 이렇게 다시 나타나서도 안 된다고요. 그동안 사랑이가 어떻게 살았는데요. 오빠 학교 자퇴하고 걔가 얼마나…….”
남자 친구 하나 잘못 사귄 죄로 사랑은 졸업할 때까지 눈치를 보면서 학교를 다녔다.
같은 건물에서 수업을 들었으니, 둘이 연애하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던 게 문제였다.
그때 지우는 도한의 친구인 태훈과 사귀고 있었기에, 사랑과 셋이 공대에 다닐 때면 주위에서 더욱 수군거렸다.
태훈과 오래 사귀지 못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죄를 묻는 거냐며 지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 때문에 힘들었으니까, 너하고 정윤재는 그걸 다 아니까 너희 둘은 사랑이한테 그러지 말아야지.”
도한은 지우를 타일러서라도 윤재와의 관계를 정리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사랑이 정윤재와 헤어지게 하는 건 그다음 일이었다.
“그건 오빠가 상관할 일 아니에요.”
“아니, 상관해야겠어.”
“오빠가 왜요? 오빠가 뭔데요.”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지우가 따져 물었다.
그렇게 사랑이 걱정되면 애초에 상처를 주지 말든가.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게 만들어 놓고, 5년 만에 나타나 여전히 사랑의 남자 친구인 척 구는 건 대체 무슨 억지냔 말이다.
“내 잘못이니까.”
지우는 말문이 막혔다.
죄인이 쉽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바로잡아야지.”
“뭘, 어떻게요.”
윤재와 내가 만나고 있다는 걸 사랑에게 알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사랑이 상처를 받든 말든 본인 마음 편해지자고?
지우가 또 한 번 그에게 실망하려는 찰나에 도한이 말했다.
“사랑이한테 제대로 사랑받는 법을 알려 줄 생각이야.”
비장하기까지 한 그의 표정을 보며 지우는 불안했다.
어쩐지 이사랑이 또 지도한과 얽힐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 *
어제 월차를 내고 쉰 덕에 사랑의 몸살 증상은 완전히 나았다.
하지만 목이 조금 따끔거리고 기침이 나는 게 아무래도 며칠은 고생할 듯싶었다.
이제 겨우 점심시간인데 벌써 퇴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가 자리에 앉으려다 멈칫했다.
책상 위에 못 보던 물건들이 있었다.
무릎 담요와 핫팩, 목에 좋은 캔디, 그리고 1층 카페의 종이컵.
가지런히 놓여 있는 물건들 사이에 작은 종이가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그 안에 쓰여 있을 글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랑의 의지와 다르게 가슴이 제일 먼저 두근거렸다.
사랑은 의자에 앉아 종이를 펼쳤다.
[아직 날이 춥습니다.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사수님.]
이곳에서 저를 사수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대리의 직위를 갖고도 팀의 막내를 자처한 지도한.
사랑이 비어 있는 옆자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울리지 않게 친절이다.
다시 종이로 시선을 옮긴 그녀가 글씨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도한과 <연애와 결혼> 수업을 들었을 때 둘이서 한 조를 이뤄 교수님께 이름을 적어 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사랑은 그의 글씨마저 멋있어서 그 종이를 갖고 싶어 했었다.
그의 모든 것이 멋있고 좋았던 시절이었다.
사랑은 종이를 내려놓고 1층 카페의 종이컵을 감싸 쥐었다.
아직 따뜻한 걸 보니 가져다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보았다.
커피일 줄 알았는데 유자차였다.
안 그래도 사랑은 오전에 출근하면서 감기에 좋은 유자차를 마시려고 1층 카페에 들렀었다.
그런데 분명 며칠 전까지 메뉴에 있었던 유자차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곧 4월이라서 겨울 음료는 판매하지 않게 되었다고 직원이 설명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레몬차를 주문했는데, 도한은 메뉴에도 없는 유자차를 어떻게 구해 왔을까.
사랑은 담요를 무릎에 덮고 캔디를 입에 넣고서 핫팩을 뜯었다.
“손 차가운 건 어떻게 알고.”
3월 말에 두꺼운 패딩은 부담스러워서 코트를 입고 왔더니 하루 종일 손이 시렸다.
동식의 말마따나 그동안 막내로서 궂은일을 도맡아서 했더니 이런 호사를 다 누려 본다.
도한이 전 남친만 아니었으면 참 예뻐했을 텐데.
사랑이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느새 도한이 제자리에 앉았다.
사랑은 그가 준 것들에 대해 대놓고 감사 인사를 하기가 멋쩍었다.
결국 메신저를 켰다.
[선물 고맙습니다, 지 대리님.]
하지만 곧바로 글자를 지워 버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인사조차 어색했다.
사랑은 그를 힐끔거렸다.
어제 그의 가족사와 헤어지게 된 진짜 이유를 들어서인지 마음이 복잡했다.
다 지난 일이고 이제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무시했지만, 그 이야기들은 밤새 사랑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작 열세 살에 저지른 실수였다.
어린 나이라고 해도 동생을 버린 건 잘못이었지만, 사랑은 그가 안쓰러웠다.
아버지가 얼마나 미웠으면 그런 일을 벌였을까 싶어서.
그 상황에서 혜리도 무서웠겠지만 도한 또한 두려웠을 게 분명했다.
사랑은 혜리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그는 더 큰 죄책감에 시달렸을 테니.
“사랑 씨, 상기에서 이번 모델 스펙 보내왔어?”
상념에 잠겨 있던 그녀가 나영의 목소리에 그만 생각을 떨쳐 냈다.
“아니요, 아직이요.”
상기라고 줄여서 부르는 상품기획팀과 연구개발팀 사이의 이견을 조율하는 게 그녀들이 속한 개발기획팀의 일이었다.
“어차피 개발에서 그 스펙 불가능하다고 할 거 뻔한데 빨리 좀 보내 주지.”
“그러게요. 지금까지 한 번에 가능하다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당연하지. 안 된다고 하는 게 개발자의 기본 마인드잖아. 상기는 일단 모든 기술적인 가능성을 열고 보는 거고. 그러니까 우리가 그 둘 사이에 끼여서 맨날 치이지. 여긴 이렇게 해 달라, 저긴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야, 새우.”
그래서 개발기획팀은 기술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으면서도 상대를 화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를 필요로 했다.
“내일 퇴근하고 야유회 가잖아요. 갔다 오면 주말인데 다음 주에나 주려는 거 아닐까요?”
“그럴 생각인가 봐.”
“개발팀은 야유회 참석 안 해서 더 난리 날 거 같은데.”
“박 과장님한테는 아무 말 못 하고 우리한테 난리 치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독촉 메일 보내.”
“아니면 제가 가서 받아 올까요?”
“됐어, 상기팀 박 과장님 여직원 무시하잖아. 괜히 기분만 상한다.”
사랑도 예전에 한번 당해 본 적이 있어서 더는 나서지 않았다.
박 과장은 말끝마다 ‘이래서 여자는’을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참을성이 없냐며 이래서 여자는 어쩌고저쩌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구시대적 인물이 안타깝게도 세계 일류를 꿈꾸는 서한 전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건 사주와 가까운 친인척이라는 뜻이었다.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녀들이 한숨을 내쉬는데 도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사랑과 나영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자료만 받아 오면 되는 일이라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입이 험하기로 소문난 박 과장을 과연 도한이 잘 대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지 대리님이 가기에는 좀……. 박 과장님이 만만치 않은 분이거든요.”
“괜찮습니다. 스펙만 받아 오면 되는 건가요?”
“네. 그렇게만 얘기하면 아시긴 하실 텐데. 어제 메일은 보냈으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도한이 짤막하게 인사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그런데도 나영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을까?”
“글쎄요.”
사랑도 표정이 어두웠다.
인상부터 험악한 박 과장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도한을 호랑이 소굴로 떠민 것만 같아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 * *
세 시간이 지나도록 도한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곧 퇴근 시간이라 나영과 사랑은 안절부절못했다.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그러게요. 가 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두 사람은 혹시라도 도한이 박 과장에게 대들어 싸움이라도 났을까 싶어 조마조마했다.
욕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라서 더 불안했다.
그가 상품기획팀으로 간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도한이 나영에게 연락해선 오래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나영은 이를 동식에게 보고했었다.
그러자 평소 박 과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식은 어디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 보라며 오히려 도한을 응원했다.
“어? 잠깐만. 상기에 있는 동기한테 메신저 왔다.”
나영은 한참 노트북을 두드리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상에.”
“왜요? 정말 싸움 났대요?”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도한 혼자 불구덩이에 집어넣은 것 같은 죄책감에 사랑은 애꿎은 입술을 뜯었다.
“싸움까진 아닌데. 암튼 지 대리님이 이겼대.”
“네?”
사랑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나영은 방금 동기와 나눈 메신저를 보며 자세히 설명했다.
“지 대리님이 스펙 받으러 왔다고 하니까 박 과장님이 내일 오라고 했대. 그래서 내일은 야유회라 오늘 주시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하니, 그럼 야유회 끝난 뒤에 오라 했고. 다시 지 대리님이 야유회 끝나면 주말이라서 어렵겠다고 하니까 그때부터 박 과장님이 슬슬 열이 받았나 봐.”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박 과장을 도한이 대체 어떻게 이겼다는 건지, 사랑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박 과장님 주특기가 사람 말려 죽이는 거잖아. 지 대리님이 계속 안 가고 버티니까 그럼 잠깐 기다리라고 했대. 자기 지금 회의 가야 한다고. 갔다 와서 주겠다고.”
“그래서요?”
“회의도 없는데 박 과장님이 나가서 한 시간 후에야 들어왔대. 그때까지 지 대리님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서 박 과장님이 기가 막혔나 봐.”
그냥 돌아오지.
사랑은 사람을 한 시간이나 세워 둔 박 과장이 괘씸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지 대리님이 회의 끝나셨으면 스펙 달라고 하니까 박 과장님이 이번에는 빠르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또 기다리라고 했대.”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군기 잡겠다고 일부러 그러는 거잖아요.”
“지 대리님이 그걸 몰랐겠어? 서로 그냥 작정을 한 거지.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고.”
무슨 사람이 저리도 무모한지.
사랑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두 시간을 또 옆에 세워 뒀대. 그러는 동안 박 과장님은 화장실도 다녀오고 커피도 마시고 오고 동료들과 수다도 떨고……. 대놓고 논 거지. 하필 오늘 상기팀 부장님이랑 팀장님이 휴가라서 박 과장님이 더 기세등등했나 봐. 이참에 우리 팀 기를 죽이려고.”
“그래서 결국 주긴 한 거예요? 지 대리님이 이겼다면서요.”
“응. 박 과장님이 스펙 주면서 너처럼 지독한 놈은 처음 봤다고 하더래.”
나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무실 문이 열렸다.
걸어 들어오는 도한의 손에 종이 몇 장이 쥐어져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랑은 저 대신 당하고 온 도한에게 미안해서 차마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