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그게 나야 (50/63)


#49화. 그게 나야
2023.06.19.


그 이후로 도한은 더 이상 아침에 사랑을 찾아오지 않았다.

점심을 먹을 때도, 퇴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윤재와 결혼할 거라고 말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사무실에선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했지만 시간이 좀 지났을 땐 나름 직장 동료로서 대할 수 있었다.

바로 옆자리라 출근하면 ‘좋은 아침’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도 할 수 있었고, 가끔은 커피도 마셨다.

물론 다른 팀원들과 함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많은 발전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볼 때마다 정신없이 뛰기 바빴던 가슴이 이젠 많이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나 사무실에 어쩌다 둘이 남게 됐을 때는 긴장되고 두근거렸다.

그것까지는 그녀 스스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만이 무사히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라는 걸 터득하는 중이다.


“사랑 씨, 총무팀에 보낸 메일 지 대리님이 작성했어?”

사랑이 오후에 있을 회의 자료를 복사하고 자리로 돌아오자 나영이 그녀를 불렀다.


“네. 무슨 문제 있어요?”

“자료 하나가 빠진 것 같다고 전화가 와서.”

“아, 죄송해요.”

“자기가 왜 죄송해. 그나저나 지 대리님도 실수를 하네. 그동안 너무 완벽해서 인간미가 없었는데.”

사랑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가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나영은 지금처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나영에게 배운 대로 후배가 들어오면 좋은 선배가 되어 주겠다고 했는데, 신입이 들어오지 않아서 사랑에겐 그럴 기회가 없었다.

대신 도한의 사수가 됐지만 그는 사소한 실수조차 하지 않았다.

괜히 성공한 게 아니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올 정도였다.


“지 대리님 오면 얘기해 주고 다시 보내라고 해. 나 지금 외부에 나가 봐야 해서.”

“네, 알겠습니다.”

사랑은 사무실을 나서는 나영에게 인사하고 비어 있는 옆자리를 바라봤다.

급히 나갔는지 핸드폰까지 두고 갔다.

바쁜 일이 있어 메일을 보낼 때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다시 제 일을 하려고 할 때 도한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사랑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핸드폰에 찍힌 발신인이 눈에 들어왔다.

박혜리.


 
그 이름을 보는 순간, 5년 전 도한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혜리가 곧 미국에서 수술을 해.’

그래서 아버지하고 같이 미국으로 가게 됐다고 했었다.

도한과 헤어진 뒤로, 사랑은 이따금 혜리를 생각했다.

수술을 한다는 것도 거짓말인지, 아니면 정말 수술할 정도로 아팠던 건지.

혜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 연락을 취해 볼까도 했었지만, 끝내 전화할 수 없었다.

만약 그것마저도 거짓이라면 더욱 비참해질 것 같아서.

그녀가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핸드폰 진동이 멈췄다.

사랑은 혜리의 이름만 봤을 뿐인데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 그때의 기분이 다시금 느껴졌다.

그때 도한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5년 전에 헤어지자고 말하던 그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왜 다시 제 앞에 나타나 더할 수 없이 슬펐던 그때의 기분을 되새김하게 만드는지 원망스러웠다.


“지 대리님.”

사랑은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공과 사를 구분할 만큼 이성적이질 못했다.


“네.”

그녀의 굳은 말투를 느낀 도한은 의문을 품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화가 난 건지.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는지.

이유를 듣기가 겁이 날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업무 메일 보내기 전에 빠진 자료는 없는지 확인하셨어요?”

사랑은 지금 그깟 메일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였고, 그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실수를 했는지 알려 주고, 다음부턴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하고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눈앞의 도한을 평소처럼 직장 동료로서 대할 수 없었다.

사적인 감정이 섞일 수밖에 없었고, 그 분노는 그가 한 실수를 핑계 삼아 터져 나왔다.


“지 대리님이 그렇게 완벽해요? 완벽하면 실수를 하지 말아야죠. 파일 제대로 첨부했는지 확인할 시간은 없고 담배 피우러 갈 시간은 있어요? 사회생활 처음 하는 신입도 아닌데 기본은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랑은 도한에게서 담배 냄새가 풍기자 그것까지 트집 잡으며 그를 몰아세웠다.

그럴수록 자신이 더 비참해지는 걸 느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별의 기억을 떨쳐 내는 데 5년도 부족했던 걸까.

사랑은 이것밖에 안 되는 스스로가 너무나 싫어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데 도한의 뒤에서 동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지 대리 불러냈어. 담배 피우러 같이 가자고.”

사랑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났다.

잠시 이곳이 어디인지도 망각한 채 분한 마음을 쏟아 내고 말았다.


“지 대리가 실수한 건 잘못인데, 팀원들 앞에서 그렇게 쥐 잡듯이 잡으면 어떡해. 아무리 사수라도 지 대리가 엄연히 직위가 더 높은데. 이건 예의가 아니지.”

동식이 그녀를 타이르듯 하면서도 묵직하게 일침을 가하자 사랑은 고개를 숙였다.

이미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실수를 했으면 가르치면 되는 거야. 어떤 일로든 사무실에서 큰소리 나는 거 용납 못 해.”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팀장님.”

직위를 떠나서라도 도한이 사랑보다 여섯 살이나 많았다.

그런 동료를 보란 듯이 나무라는 건 팀원들이 보기에 눈살이 찌푸려질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동식은 다른 말이 나오지 않게 일부러 이 자리에서 사랑을 나무랐다.

그녀 역시 혼이 났고 잘못을 뉘우쳤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그러니 이 문제에 관해선 떠들지 말라는 의미였다.

동식은 이제 그만 됐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메일 다시 보내겠습니다.”

도한은 보낸 메일을 확인하고 누락된 자료를 첨부하여 다시 총무팀에 메일을 보냈다.

그는 어젯밤에 잠을 설쳤다. 꿈에 사랑이 나와 붕대를 풀던 날에 했던 말을 똑같이 하는 바람에 깊게 잠들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지도한은 아무나하고 키스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다 귀찮아지면 버리면 그만이고.’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누군가 그의 목을 꽉 쥐고 있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허우적대다가 새벽에 깼고 그 후론 잠이 오지 않아 밤을 새웠다.

아침부터 정신이 몽롱하더니 기어이 회사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변명을 하자면 그랬다.

회신 메일까지 확인한 도한이 고개를 돌려 사랑을 바라봤다.

괜히 저 때문에 동식에게 한 소리 듣게 된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녀를 곤란하게 하려고 회사에 들어온 게 아닌데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 * *



“손 다 나은 거 축하해, 사랑 씨.”

그날 저녁, 도한의 환영회 이후로 한 달 만에 갖는 회식 자리에서 나영이 사랑의 빈 잔을 채웠다.

그동안 술을 마시지 못한 후배에게 주는 상이었다.


“흉터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네. 이젠 티도 안 나요.”

붉게 물들었던 손등이 하얗게 돌아온 걸 보며 사랑이 웃었다.

약을 바르는 것도 귀찮아 어느 순간부터는 잊고 지냈더니 저절로 나았다.

화상의 정도가 심하지 않아 소홀했던 것도 있었다.


“카페 직원이 사랑 씨만 보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

“그래서 자주 못 갔었는데 다 나았으니까 이제 가 보려고요. 괜찮다는 것도 보여 주고.”

“그 직원은 운이 좋은 거야. 사랑 씨 같이 착한 사람 만났으니까 그냥 넘어간 거지, 나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난리 쳤어.”

사랑은 피식 웃으며 맞은편에 앉은 도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날 저보다도 당황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얼굴이 진짜 지도한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한순간에 남처럼 변하는 그를 이미 겪어 봤으니.


“암튼 오늘은 실컷 마시자. 손 다 나은 기념으로.”

“네. 저도 오늘만 기다렸어요.”

“오, 좋아. 그럼 달려 보자고.”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았던 사랑은 작정하고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술이 달았다.

아니면 낮에 도한에게 분풀이했던 자신에게 속이 쓰려서 더 달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어쨌든 그녀는 쉬지 않고 마셔 댔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오 대리님.”

빠르게 마신 탓에 금세 취기가 오른 사랑이 나영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뭐야? 곧 퇴사할 것처럼 구는 그 인사는.”

“그냥요. 대리님 덕분에 회사 생활 정말 즐거웠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왜 그래, 사랑 씨. 진짜 어디 이력서라도 넣은 거 아니야?”

늘어지는 발음으로 헤헤 웃는 사랑을 보며 나영은 미간을 좁혔다.

입사 1년 만에 퇴사한 동기가 있어서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부족한 저를 이만큼 이끌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이 은혜 꼭 잊지 않을게요.”

사랑의 인사를 들은 다른 팀원들도 그녀들의 대화에 관심을 갖고 끼어들었다.


“사랑 씨, 오늘 팀장님한테 한 소리 들어서 그래?”

“그렇다고 그만두면 우리 중에 지금까지 붙어 있을 사람 없어. 술 마시고 잊어버려.”

“그래. 지 대리님이 신입이었으면 사랑 씨가 좀 편했겠지만 어쩌겠어.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위로와 함께 건넨 술을 받아 마시느라 사랑의 얼굴이 더욱 벌게졌다.


“그런 거 아니에요. 팀장님 말씀 다 옳으시고 오늘은 제가 지 대리님한테 잘못한 게 맞는데요, 뭐. 이 자리에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사랑은 도한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정 하나 절제하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굴어서 진심으로 미안했다.

신입생티는 다 벗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스무 살에 머물러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도한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안한 건 저라서 사과를 받기가 불편했다.


“됐어, 됐어. 이제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그때 외근을 나갔었던 나영은 뒤늦게 상황을 전해 듣고 사랑의 편에 서 주었다.

어쨌든 사랑이 도한의 사수이니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게 당연하다고.

그러니 팀장님께 혼났다고 기죽지 말라고.

그런 일로 퇴사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마음이 여린 사랑이 행여나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걱정되었던 나영은 그녀를 토닥였다.

회식은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고, 자정이 가까워지자 한두 명씩 자리를 떠났다.

마지막으로 네 명이 남았을 때 나영은 서 대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사랑이 날을 잡고 술을 마시는 이유가 도한 때문인 것 같았다.

둘이서 해결하길 바라는 마음에 자리를 피해 주었다.


“우리도 그만 나가죠.”

사랑은 알딸딸한 정신으로 가방을 챙겼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나영이 한참을 지나도 오지 않더니 서 대리와 먼저 가 보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할 말이 있어.”

“듣고 싶지 않아요.”

테이블을 잡고 일어난 사랑이 비틀거렸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 정도로 취한 건 오랜만이었다.

도한과 헤어졌을 때처럼 많이 마신 것 같았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도한이 뒤를 따랐다.

넘어질 듯 위태롭게 걷는 사랑을 붙잡고 싶었지만 도한은 그녀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정말 회사 그만둘 생각이야?”

도한이 사랑의 뒤를 바짝 쫓았다.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사랑이 대답하지 않자 그는 성큼 걸어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랑은 갑자기 나타난 벽으로 인해 주춤 발을 세우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거슬리게 안 할게. 그러니까 가지 마.”

정윤재랑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만 마.

도한은 그렇게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이제는 그녀를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차라리 키스를 하자고 해요. 그게 더 지도한다우니까.”

사랑은 웃으며 그를 지나쳤다.

하지만 또다시 그가 앞을 막아섰다.


“왜요. 정말 나랑 키스하려고요? 나 이제 잘하는데.”

도한과 헤어지고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깊게 사귀었던 적은 없었다.

키스 실력은 그때와 똑같이 형편없었지만, 5년 전 그와 키스할 때마다 낮아진 자신감을 이제라도 챙겨 보고자 허세를 부렸다.


“남자 친구 있다며.”

도한의 대답에 사랑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왠지 그는 그런 것쯤 신경 쓰지 않을 남자 같아서.


“지도한 씨는 나랑 사귀면서 다른 여자 안 만났어요? 아니, 다른 여자랑 사귀는 중에 잠깐 나를 만난 걸 수도 있겠다.”

그가 아무 말이 없자 사랑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 사실 그때, 지도한 씨랑 박혜리 언니 사이 의심했었어요. 친동생도 아니라고 하지, 깊은 사이라고 하지. 그래서 둘이…….”

잠자리 파트너가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는 말까진 차마 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지.


“그 언니는 잘 지내요?”

도한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 줄 말이 많은데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웠다.


“잘 지내.”

“수술은요?”

“잘 마쳤어.”

“미국에서요?”

“아니.”

사랑이 허탈한 표정으로 웃음을 내뱉었다.

결국 그와 헤어져야만 했던 이유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는 걸 확인한 셈이었다.

이제 확실해졌다.

그는 내가 귀찮아져서 버린 거다.

왜 다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또한 별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사랑은 무심한 표정으로 도한을 지나쳤다.

그런데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리 어렸을 때, 사촌 오빠가 버리고 왔다는 거. 기억해?”

걸음을 멈춘 사랑이 돌아서서 그와 마주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무섭고 끔찍한 일이라 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묻나 싶어 그녀가 의아한 눈을 했다.


“그게 나야.”

“……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사랑이 되물었다.

그런 그녀에게 도한은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진실을 마침내 밝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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