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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고작 키스 따위 (49/63)


#48화. 고작 키스 따위
2023.06.16.


점심시간, 도한은 회사 건물 옥상에 마련된 흡연 부스를 찾았다.

정윤재와 결혼할 거라는 사랑의 말을 들은 후로 담배가 간절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손에서 놓지 못했다.

하루도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연기를 내뿜은 그가 담배를 비벼 껐다.

흡연 부스 밖으로 나오자 금방 손이 시릴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도한은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혹시라도 이사랑 혼자 사무실에 있다면, 직장 동료로 대할 자신이 없었다.

회사에서는 예의를 차리겠다는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붙잡아 그동안 보고 싶었다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그러니 마지막으로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자신이 도망쳤던 이유를 설명하고,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그녀를 안고 싶었다.

네가 날 끔찍하게 여길까 봐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고.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면 더는 날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차마 얘기할 수가 없었다고.

그런데 너를 안 보고 사는 건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하지만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사랑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떠날 때도 이기적이었는데, 이제 와서 또 일방적으로 마음을 전하는 건 그녀를 배려하는 게 아니었다.

도한이 긴 숨을 토해 낼 때 옥상 문이 열렸다.

곧 동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혼자 뭐 해? 담배 피우러 온 거야?”

“네.”

팀원 중에 흡연을 하는 사람이 없어 늘 혼자 옥상에 올라왔던 동식이 반가운 얼굴로 도한에게 다가갔다.


“근데 정말 말 안 해 줄 거야? 그 여자가 누군지.”

도한이 서한 전자에 들어온 진짜 이유를 알게 된 동식은 그 여자가 누군지 궁금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도한이 5년 동안이나 연애를 안 할 정도인 건지.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했기에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사업까지 포기하고 그 여자의 직장까지 쫓아올 수가 있는지.

동식이 회식 자리에서 몇 번이나 물었지만 도한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직위를 이용해서 협박 아닌 협박을 해 봐도 소용없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입이 무거워? 별명이 지독한이라더니 아주 딱이야.”

도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별명이었다.


“그 여자가 자기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했다면서.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도 없이 우리 회사에 들어왔다는 말이야?”

그는 젊은 나이에 사업을 성공시킬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 때문에 동식은 도한에게 거는 기대가 컸으나, 의외로 여자 문제에선 똑 부러지지 못한 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복잡했다.


“제가 뭘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돼서요. 그 사람한테 지독하게 굴었거든요. 평생 용서받지 못할 겁니다.”

“아무것도 안 할 거면 뭐 하러 왔어?”

동식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도한은 어제 사랑을 데리러 온 윤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술은 어제가 아니라 오늘 마셨어야 했다.

시린 바람으로는 머릿속을 비울 수가 없었다.


“제가 이기적인 놈이라서요. 자격도 안 되는 주제에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자격이 안 되면 되게 만들어야지. 특전사 구호 벌써 잊었어? 안 되면 되게 하라!”

남자 셋이 모이면 군대 얘기는 필수였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 동식은 도한이 특전사 출신이라는 걸 알고 흥분했다.

자신과는 무려 22기수 차이가 났지만, 직장에서 군대 후배를 만난 건 처음이라 오랜만에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꽃을 피웠었다.

도한이 옅은 미소를 짓자 동식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춘의 뜻이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 그런가.

단단한 대지를 뚫고 싹을 틔우는 그 시절엔 누구나 애틋한 사연 하나씩은 갖고 있기 마련이었다.


“추운데 먼저 내려가. 나는 올라온 게 아까워서라도 한 대 피우고 갈 테니.”

동식이 그만 가 보라고 손짓하자 도한이 고개를 숙였다.


“담배 몸에 해롭습니다. 금연하세요, 팀장님.”

“허허. 누가 할 소릴.”

동식은 코웃음을 치곤 보란 듯이 흡연 부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도한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잠깐이나마 회사 생활을 해 본 수호의 말에 의하면, 직장에서 좋은 상사를 만나기가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그 희박한 확률 안에 자신이 들어간 듯했다.

* * *

퇴근 준비를 마친 사랑이 사무실을 나서자 도한이 뒤를 따랐다.

둘이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지만 어차피 그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갈 터라 사랑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건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도한 역시 1층에서 내렸고, 회사 밖으로 나와 병원으로 걸어가는 사랑을 계속해서 뒤쫓았다.

결국 그녀가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왜 따라와요?”

“병원에 같이 가려고.”

“지도한 씨가 왜요.”

“팀장님께서 사수님 붕대 풀 때까지 밀착 보호하라고 하셨으니까. 점심시간에 너랑 같이 밥 안 먹었다고 혼났거든.”

차엔 안 탈 게 뻔하니 뒤따라서 걷는 수밖에.

날도 추운데 주말에 정윤재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지.

도한은 기어이 퇴근하고 병원으로 가는 사랑이 못마땅했다.

그만큼 하루라도 빨리 그의 보호를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일 테니.


“진료 시간 늦겠어. 가자.”

앞서 걷는 도한의 모습에 사랑은 헛숨이 터져 나왔다.

뭐가 저렇게 당당해.

어떻게 사람이 저리도 뻔뻔해.

참으로 훌륭한 직장인이다.

팀장이 지시한 업무를 이토록 철저하게 수행하다니 말이다.

괘씸한 마음에 사랑은 눈을 부릅뜬 채로 그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그런데 문득 그가 우뚝 멈춰 서더니 다시 그녀 앞으로 돌아왔다.


“미안. 네가 먼저 가.”

“네?”

“너부터 가라고.”

도한의 뜬금없는 사과를 사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왜 미안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사랑은 얼른 발을 떼 그를 지나쳐 앞서 걸었다.

뒤에서 도한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사랑의 온 신경이 그가 보고 있을 자신의 등으로 쏠리는 듯했다.

누군가에게 뒷모습을 보인다는 게 익숙하지가 않았다.

보통은 나란히 걷거나 상사의 뒤에서 걸었다.

얼굴이 시릴 정도로 추운 날씨인데도 사랑은 머리가 뜨거워져서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정리가 잘됐나.

걸음걸이는 안 이상한가.

제 뒷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보일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어!”

그러다 미처 앞을 보지 못하고 공사 중임을 알리는 펜스에 부딪힐 뻔했다.

그 순간 도한이 성큼 다가와서 사랑의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위험하잖아.”

그의 가슴에 바짝 안긴 꼴이 되고 만 사랑은 흠칫 놀랐다.

두꺼운 코트 안으로 그의 온기가 파고들었다.

제멋대로 뛰는 뜨거운 심장과 달리 온몸은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향기가 있다.

어떤 냄새를 맡으면 그 냄새와 연관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프루스트 효과.

코끝에 도한의 체취가 전해지자 사랑은 5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와 첫 데이트를 하고 집 앞에서 그에게 안겼었던 바로 그날로.

사랑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그를 향한 미움일까. 아니면 그리움일까.


“괜찮아?”

“네, 괜찮아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랑이 도한의 품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그리고 다시 바쁘게 앞서 걸어 나갔다.

그와의 간격을 조금이라도 더 벌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 * *

예약한 진료 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했다.

붕대를 풀자 아직 손등에는 붉은 화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약을 도포한 후, 손가락은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사랑의 말에 의사는 붕대 대신 습윤 드레싱을 붙여 주었다.

움직임이 많으면 떨어질 수 있으니 주기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주의를 듣고서 진료실을 나왔다.

병원에서 30분 남짓 시간을 보낸 사랑은 이제 그만 집으로 가기 위해 건물을 나섰다.

그런데 이곳까지 데려다주고 먼저 간 줄 알았던 도한이 눈에 들어왔다.

병원과 조금 떨어진 주차장 흡연 부스에서 태우던 담배를 끄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차도 가져오지 않았으면서 뭐 하러 기다리고 있는지.

그녀가 멀뚱히 서 있자 도한이 다가와 붕대를 풀은 손을 내려다봤다.

훨씬 보기는 좋았으나, 이젠 그녀를 보호할 핑계가 사라져 도한은 아쉬웠다.

사랑은 슬쩍 오른손을 등 뒤로 감췄다.

그의 눈길이 제게 머물면 그곳이 어디든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담배 언제부터 피웠어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귀고 있을 때까지 한 번도 담배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다시 만난 그에게서는 이따금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특히 점심 식사 후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을 때.

어제 회식이 끝나고 식당 앞에서 담배를 입에 문 걸 직접 목격하기도 했었기에 그녀가 단순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너한테 뺨 맞은 날부터.”

괜한 질문을 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와 사랑은 당황스러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그때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렇지 어떻게 남자 뺨을 칠 생각을 했을까.

지금이라면 못 그랬을 거라며 그녀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몇 발 떼지도 않았는데 그의 목소리에 사랑의 발목이 붙잡혔다.

혹시 회사 일에 관한 일일까 싶어서 멈춰 선 그녀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정말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괴로워하는 듯한 도한의 표정에 사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뭐 때문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는지 궁금했다.


“어제, 왜 안 피했어?”

“네? 제가 뭘…….”

“내가 키스하려고 했을 때, 왜 가만히 있었냐고. 정윤재랑 결혼도 할 거라면서.”

도한은 윤재가 사랑의 옆집에 살고 있는 것까지 확인했으니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윤재가 졸업하면 결혼할 거라는데 여기서 뭘 더 어쩌겠는가.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다가도, 도한은 이따금 어제의 상황이 불쑥불쑥 떠올라 미칠 노릇이었다.

분명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남자 친구도 있으면서 대체 왜.

그 사실이 하루 종일 도한을 혼란스럽게 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잖아.”

취하기라도 했으면 이해라도 하지.

손 때문에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으면서 왜 피하지 않았을까.

그 찰나에 벅차올랐던 도한의 마음이 곧 나타난 정윤재로 인해 무참히 짓밟혔다.

원망과도 같은 그의 말에 사랑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소주를 세 병이나 마셨으면 그런 건 좀 잊어 주지.

입을 달싹이던 그녀는 그저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실수였어요.”

“……뭐?”

“미안해요. 사수로서 제가 지 대리님을 잘 이끌어야 했는데 그런 실수를 해서.”

“실수 아니잖아. 정윤재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너, 나랑 키스했어.”

정곡을 찔린 사랑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동시에 제때 맞춰 왔던 윤재에게 고맙기도 했다.

도한의 말대로 윤재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을 테니까.


“어쨌든 안 했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사랑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일부러 뻔뻔하게 나갔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어이가 없었는지 도한이 인상을 구겼다.


“나, 지도한 씨가 알고 있는 신입생 이사랑 아니에요. 누구 덕분에 사랑 같은 거 안 믿게 됐고 아무 남자나 만나면서 막살았어요. 그런 나를 잡아 준 게 윤재예요. 그런데도 가끔 어제처럼 분위기에 휩쓸리면 실수하곤 해요. 다행히 키스하진 않았지만 했어도 뭐, 상관없어요. 말 그대로 실수였고 지도한 씨한테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이런 여자인 거 다 알면서도 윤재는 내가 좋대요. 그래서 결혼하려고요.”

그녀의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사랑은 자신을 정신 나간 여자로 만들면서까지 도한을 밀어 냈다.

다시는 그를 좋아하고 싶지 않으니까.

또다시 상처받기 싫으니까.


“좀 의외네요.”

그녀가 설핏 웃으며 잔뜩 굳은 도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작 키스 따위에 의미를 부여할 줄은 몰랐는데.”

사랑은 유학을 떠나게 됐다며 여기서 그만하자고 이별을 고하던 그를 떠올렸다.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냐고, 못 헤어지겠다고 했을 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내 얘기 못 알아들을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어린애 취급할 때는 언제고, 겨우 키스 한 번 할 뻔했다는 말에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꼴이라니.

사랑은 멀쩡한 왼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저 눈빛에 속으면 안 된다고, 저 사람은 내게 진심이 아니라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자고.

도한과 헤어지고 지난 5년간 어떤 마음으로 지냈는지 빠르게 되짚은 사랑이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내가 아는 지도한은 아무나하고 키스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다 귀찮아지면 버리면 그만이고.”

나한테 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사랑은 마지막 말을 삼키고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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