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가짜 남자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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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가짜 남자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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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가짜 남자 친구
2023.06.12.
“사랑아.”
저벅저벅 걸어온 윤재가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도한이 사랑과 같은 팀에서 일하게 되어 회식 자리에 함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마주하니 조금 놀란 듯했다.
그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던 탓에 윤재는 다시 봐도 도한이 좋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제 친구를 힘들게 한 장본인이니 더욱 그렇기도 했다.
“유, 윤재야.”
사랑은 윤재를 보고서야 정신이 번쩍 났다.
술을 마신 건 도한인데 왜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걸까.
취기가 오른 그의 눈빛에 홀린 건지, 다가오는 입술에 눈까지 감으며 기다렸다.
미쳤어, 이사랑. 돌았구나, 정말.
윤재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도한과 키스하는 걸 들키고 말았을 거다.
생각만으로도 사랑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집에 가자.”
“으, 응.”
사랑이 주춤주춤 윤재의 옆으로 다가섰다.
이 와중에 도한을 이대로 내버려 두고 가도 되는 건지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랑이 머뭇거리는 걸 눈치챈 윤재가 도한에게 뒤늦은 인사를 전했다.
“안녕하세요. 학교 다닐 때 뵌 적 있는데. 정윤재입니다.”
도한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정말 윤재가 그녀의 남자 친구인지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지우에게 들었어도 그는 믿지 않았다.
사랑이 그렇다고 했어도 사실이 아닐 거라 여겼다.
둘 다 거짓말엔 소질이 없어 보였으니까.
급하게 둘러대느라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진짜 정윤재가 나타났다.
사랑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도한은 나란히 선 그들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둘은 참 잘 어울렸다.
“취하신 것 같은데 같이 타고 가실래요?”
“아니요. 됐습니다.”
그가 예의상 던진 질문이라는 걸 도한은 모르지 않았다.
정말 사랑의 남자 친구라면 자신과 이렇게 말을 섞는 것조차 기분 나쁠 테니.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윤재가 사랑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주차된 차로 걸어갔다.
사랑은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추운데 계속 저기 있을 건가.
대리 기사가 오려면 아직 멀었나.
윤재가 문을 열어 준 조수석에 올라타면서도 도한 걱정뿐이었다.
사랑이 유리창 너머에 있는 도한을 보았다.
윤재의 차가 주차장을 벗어날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선 채로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이드 미러에 도한의 모습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되자 사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뒷좌석에서 지우가 불쑥 튀어 올랐다.
“나 안 들켰지?”
“아, 깜짝이야!”
윤재 혼자 온 줄 알았던 사랑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뭐야, 너.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어?”
사랑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보자 지우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헤헤 웃었다.
“밖에서 보일까 봐 납작 엎드려 있었지.”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태연하게 안전벨트를 채우는 지우의 모습에 사랑은 헛숨을 터트렸다.
둘이서 같이 와 놓곤 윤재 혼자 내려서 자신의 남자 친구인 척 연기를 하고, 지우는 그동안 숨어 있었다는 말이었다.
지우가 윤재와 함께 출발했다는 말을 사랑은 뒤늦게 기억해 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작전을 짜 왔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도한은 제대로 속이고 온 거야? 둘이 사귀는 거 믿는 눈치냐고.”
“남자 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했다고 거짓말했는데 딱 맞춰서 윤재가 왔으니까 믿겠지.”
“역시, 미리 출발하길 잘했다니까.”
지우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나 만족스러웠다.
윤재를 보고 당황했을 도한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사랑은 그런 친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지우야 원래 엉뚱하다지만, 윤재까지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끼어들 줄이야.
“괜히 나 때문에 미안하다. 너라도 쟤 좀 말리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와.”
사랑은 철없는 친구를 대신해서 윤재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안 그래도 도한과 헤어지고 나서 창피한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가짜 남자 친구 노릇까지 하게 만들어 버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도 네가 저 사람이랑 엮이는 거 싫어. 방법은 마음에 안 들지만.”
윤재는 어쩌다가 자신이 사랑의 남자 친구가 되었는지, 지우에게 자초지종을 들었을 땐 화가 났었다.
왜 그렇게 대책이 없냐고 한 소리 했지만, 지우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을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녀들은 친구보다 가족에 가까웠다.
그런 사랑이 도한과 헤어지고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옆에서 지켜봤었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사랑의 근처에 얼씬도 못 하도록 하고 싶었을 거다.
그래서 동참하기로 했다.
윤재 역시 사랑을 가족처럼 아끼니까.
“빨리 집에 가서 생일 파티나 하자. 12시 되기 전에 케이크는 먹어야지.”
지우가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바꾸며 윤재를 재촉했다. 사랑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주먹 쥔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도한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은 반지가 그 안에 있었다.
차마 손을 펴서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준 걸까.
이 반지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걸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가슴은 쓸데없이 두근거렸다.
* * *
집으로 돌아온 사랑은 친구들과 생일 파티를 즐겼다.
학교 다닐 때 사랑의 생일이 방학이라 잊어버리고 못 챙겨 준 게 아직도 미안했는지 지우는 자정이 넘도록 사랑을 놔주지 않았다.
케이크며 선물이며 생일 노래까지.
한 시간을 넘게 축하를 받고서야 사랑은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 6시. 어김없이 윤재는 그녀들을 데리고 동네를 한 바퀴 뛰었다.
시간이 지나도 아침 운동만큼은 적응되지 않았던 사랑은 오늘에서야 윤재를 이해했다.
부상으로 더는 수영 선수를 꿈꾸지 못했을 때,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뛰었다는 그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뛰는 동안은 잠시나마 도한을 잊을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쉬면 그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면 마라톤 선수라도 되어야 하나 싶은 우스운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일이 불쑥불쑥 생각나 사랑은 이따금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분명 술 때문이다.
긴 시간 동안 쌓인 미움이 반지 하나로 사라질 리가 없는데.
우리의 커플링이었다는 그 한마디에 그에게 받은 배신감이 지워진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그 모든 걸 잊고 그와 키스를 하려고 했는지.
사랑은 더욱 속도를 높여 달렸다.
어제의 두근거림은 기억하지 말라는 것처럼 심장을 괴롭게 했다.
간절히 갖고 싶었던 생일 선물이었다고 해도 너무 늦어 버렸다.
고작 그것만으로 없었던 일로 하기엔 가슴에 패인 상처가 너무 깊었다.
운동을 마치고 오늘도 지우의 도움을 받아 출근 준비를 마친 사랑이 방을 나섰다.
“오늘 좀 늦을 거야. 저녁 먼저 먹어.”
“또 회식이야?”
월차를 내고 하루 집에서 쉬기로 한 지우가 사랑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아니. 퇴근하고 병원 가려고.”
“며칠 더 있다가 가는 거 아니었어?”
“답답해서 붕대 풀어야겠어. 손가락까지 못 쓰니까 불편해.”
“그러다 덧나면 어떡해.”
“가서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풀고 올게.”
“그래, 알았어.”
지우가 현관문을 열어 주자 때마침 윤재도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같이 나가자. 편의점 가는 길이야.”
두 사람은 함께 복도를 지났다.
사랑은 오늘 지우 출근 안 하는데 둘이 놀러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고, 윤재는 추워서 집이 최고라고 답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렇게 웃고 떠들며 건물 밖으로 나서려는데 윤재가 갑작스레 우뚝 멈춰 섰다.
사랑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이 멈춘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도한이 서 있었다.
“또 뵙네요.”
윤재가 먼저 인사를 했지만 도한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답이 없었다.
그저 눈앞의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조금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한 건물에서 같이 나왔으니, 윤재가 사랑의 남자 친구라는 걸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연극을 계속해야 했다.
가짜 남자 친구 앞에서 전 남친의 차를 타고 출근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윤재에게 설명을 해야만 했다.
“팀장님이 나 붕대 풀 때까지 지 대리님 차 타고 다니라고 지시하셔서. 퇴근하고 병원 갈 거니까 오늘까지만 이 차 타고 갈게, 윤재야.”
어색한 미소로 변명을 늘어놓자 윤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흐트러진 사랑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얘는 뭘 또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연기를 하는 거야?
사랑은 친구의 남자를 훔친 것만 같은 기분에 미안한 표정으로 어깨를 조금 움찔했다.
어떻게든 오늘 붕대를 풀고 말 거다.
아침마다 집 앞에서 도한을 마주하다가는 심장 마비가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잘 갔다 와. 저녁에 보자.”
“어? 어. 그, 그래.”
도한에게 조금 고개를 숙인 윤재가 편의점으로 걸어갔다.
도한이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 동안 사랑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그제야 도한도 운전석에 올라 차를 출발시켰다.
“속은 괜찮아요?”
조용한 차 안이 부담스러워 사랑이 말을 걸었다.
단지 사수로서 술을 많이 마신 그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아무리 환영회라도 그렇지, 그렇게 무식하게 술을 마시면 어떡해요.”
도한은 대답이 없었다.
회사 밖에서 단둘이 있을 때면 기다렸다는 듯이 반말을 하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주는 술 다 받아먹지 말고 적당히 요령도 좀 피워요.”
어디서 들어 본 말이란 걸 깨달은 사랑이 입을 합 다물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제게 해 줬던 충고였다.
‘주는 술 다 받아먹지 말고 적당히 요령도 좀 피워. 대학에서까지 범생이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에 관한 기억은 참 징글징글하게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우리 팀장님 그 정도는…….”
“둘이 같이 살아?”
“네?”
그가 말을 싹둑 자르는 바람에 사랑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정윤재랑 둘이, 아니 강지우하고도 같이 사니까 셋인가.”
사랑은 잠시 침묵했다.
이 남자가 가장 궁금한 건 내가 윤재와 동거 중이냐는 것 같았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지.
설핏 미간을 찌푸린 그녀는 셋이 함께 산다고 거짓말을 할까 아주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담한 성격은 못돼 사실대로 말했다.
“윤재는 옆집에 살아요. 저야 같이 살면 좋지만, 지우가 불편할 것 같아서요.”
사랑이 슬쩍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무표정을 예상했는데, 그는 운전대를 잡지 않은 왼팔을 문에 올리고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자기 때문인가, 의심하던 사랑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난밤에 소주를 세 병이나 마셨으니 당연히 머리가 아프겠지.
“오늘 붕대 풀 거니까 내일부터는 집 앞으로 오지 마세요. 같이 출근하는 거 윤재한테…….”
“3년이라고 했나.”
“……네?”
도한은 도무지 대화에 집중하는 법이 없었다.
제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그가 얄미워서 사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윤재랑 사귄 기간.”
“네, 그쯤 됐어요.”
갑자기 그건 또 왜 묻는지.
윤재와 어떻게 사귀게 됐는지 물어보기라도 할까 봐 사랑은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한의 질문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결혼도, 할 생각이야?”
누군가 목을 조이는 것처럼 그의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사랑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렇다고 하면 앞으로 도한은 제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걸 바라고 도한을 속인 건데, 왜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는 걸까.
사랑은 어제 제 입술을 향해 고개를 내리던 그가 떠올랐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안은 채 그의 키스를 기다렸던 자신의 모습도.
사랑은 짧은 고민 끝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 윤재 졸업하면 하려고요, 결혼.”
윤재와 지우에게는 미안하지만 더는 도한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