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보고 싶은 사람 (46/63)


#45화. 보고 싶은 사람
2023.06.05.


도한의 업무 처리 능력은 탁월했다.

그에게 주어진 이사랑 밀착 보호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오전 회의 시간에 손이 불편한 사랑을 대신하여 회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전해 주었으며 심지어는 사무실로 돌아와 노트북까지 켜 주었다.

이러다 화장실까지 따라와서 도와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사랑을 챙겼다.

구내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한은 그녀를 가만히 앉혀 두고 돈가스를 받아 와 직접 칼로 잘라 주기까지 했다.

겨우 포크만 사용할 수 있는 사랑은 그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옆에 나영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식사를 마치고 김인수 과장이 도한을 데려간 덕에 사랑은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나영과 휴게실에서 커피 한잔할 여유가 생겼다.


“지 대리님이 사랑 씨 엄청 챙긴다.”

어제부터 도한과 사랑의 사이가 궁금했던 나영은 도한이 없는 틈을 타 물었다.

내내 옆에 붙어 있어 그럴 기회가 없었다.

사랑도 해명해야 마음이 편해질 듯해서 이 시간을 기다렸다.


“죄송해요, 대리님.”

“응? 뭐가?”

“지 대리님하고 모르는 사이라고 해서요.”

사랑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영과 가장 가깝게 지냈는데 거짓말을 해서 미안했다.


“사정이 있었겠지, 뭐. 괜찮아.”

나영은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주위를 살피곤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둘이 사귀었었어?”

가장 궁금한 건 그거였다.

두 사람이 과거에 연인 사이였는지.

그렇지 않고서는 어제의 일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단순히 선후배 사이라면, 사랑이 다쳤을 때 도한이 그토록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을 테니까.

그건 분명 애정이었다.


“글쎄요.”

사랑은 설핏 웃어 보였다.

그와 나의 관계를 뭐라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귀었던 사이인지 그녀 역시 궁금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 혼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뭐야. 무슨 대답이 그래?”

“제가 좋다고 따라다녔다가 대차게 까인 거죠, 뭐.”

“에이, 아닌 거 같은데.”

어제 눈앞에서 도한의 불꽃 튀는 눈빛을 목격한 나영은 사랑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랑을 다치게 한 직원을 보는 그의 두 눈엔 얼핏 살기가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관심도 없는데 그렇게 챙긴다고?”

“회사에서 다시 만났으니 저한테 미안한가 보죠. 제가 그때 상처를 좀 많이 받았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좀 의외다.”

“뭐가요?”

“사랑 씨는 자상하고 친절한 스타일 좋아할 줄 알았거든. 근데 지 대리님은 정반대잖아. 솔직히 두 사람 안 어울려서.”

그래서 우리가 헤어지게 된 건가.

역시 나는 그의 여자 친구가 될 자격이 없었던 걸까.

신입생은 부담스러워서 싫다고 했던 도한의 말이 떠오른 사랑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필 같은 팀으로 만나서 어쩌냐. 사랑 씨가 많이 불편하겠다.”

“어쩔 수 없죠. 팀을 옮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고.”

“그럼. 그건 말이 안 되지.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라고 다시 만날 걸 수도 있어. 같이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리될 날이 올 거야. 사랑 씨가 그럴 마음이라면 말이야.”

나영이 이제 그만 사무실로 들어가자며 일어났다.

사랑도 그녀를 따라 일어서 나란히 발을 맞췄다.

나영의 마지막 말이 사랑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지금 어떤 마음인 걸까.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지도한이라는 불씨를 꺼트리고 싶은 걸까, 아니면 다시 살려 내 활활 타오르게 하고 싶은 걸까.

* * *



“자! 모두 잔 들고!”

동식의 구호에 맞춰 팀원들이 일제히 소주잔을 들었다.

퇴근 후에 곧바로 이어진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었다.

특히나 오늘은 도한을 환영하는 자리라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환영합니다, 지도한 대리.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동식의 인사에 다른 사람들도 환영한다고 한마디씩 거들고 동시에 잔을 비웠다.

어쩌다 보니 사랑과 도한은 테이블 끝에서 마주 앉았다.

다친 손 때문에 술을 못 마시는 사랑은 도한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맨정신으로 바로 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한 잔, 두 잔, 석 잔.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옆에서 채워 주었고 도한은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넉 잔, 다섯 잔, 여섯 잔.

오늘의 주인공이니 집중적으로 공격되는 건 당연했다.

일곱 잔, 여덟 잔, 아홉 잔.

혼자서 벌써 한 병 반을 비운 그를 보며 사랑은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입사했을 땐 이 정도로 술을 먹이진 않았는데.

남자라 그런지 잔을 채우는 팀원들의 손길에 거침이 없었다.

술을 받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시는 도한의 태도도 한몫하고 있었다.

도대체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사랑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멀쩡한 왼손으로 오이를 집어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그와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취한 모습을 본 적은 있어도 함께 술자리를 가져 보진 못했다.

그래서 몰랐는데, 이 남자는 술을 물처럼 마신다.

그 쓴 걸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목으로 넘기는 모습이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왜 술 마시는 모습까지 멋있는 건지 못마땅했다.


 
넋을 놓고 도한을 쳐다보던 사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인간이 너한테 한 짓을 생각하라고, 이사랑!

부들부들 떨면서 뺨까지 때릴 땐 언제고, 새삼스레 다시 멋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 건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토록 무서운 일이라니.

지도한 말고는 그 누구를 보고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으니 거의 형벌에 가까웠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사랑이 도한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덜컹거렸다.

조금은 나른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바로 이 눈빛으로 보고 싶었다고,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5년 전의 그가 떠올랐다.

가슴에서 뭔가가 울컥거려 사랑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지 대리.”

얼굴에 취기가 오른 김인수 과장이 도한을 불렀다.


“네, 과장님.”

반면 도한은 회식 자리가 아닌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도대체 우리 회사에는 왜 들어온 거야? 사업이 망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우리 회사 임원 월급보다 더 많이 벌 텐데 말이야.”

“그러게요. 우리 회사 건물이 예뻐서라는 건 그냥 하는 말이죠?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진짜 이유가 뭐예요?”

다른 팀원들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는지 한마디씩 얹으며 눈을 빛냈다.

도한은 반사적으로 앞에 있는 사랑에게 눈길을 주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을 외면하는 그녀를 보며 도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이곳에 있습니다.”

사랑은 순간 숨을 멈췄다.

테이블에 떨궈 놓은 시선을 들어 올리지도 못한 채 그대로 온몸이 정지해 버렸다.

그때 그 여자일까.

커플링을 나눠 꼈을 그 여자가 우리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건가.

사랑은 도한이 보고 싶은 사람이 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5년 전 호텔에서 봤던 그의 반지를 떠올렸다.


“세상에. 그럼 그 여자분 만나려고 우리 회사에 들어온 거예요? 사업까지 접고?”

도한이 말한 ‘이곳’은 그의 눈앞이었지만 팀원들은 서한 전자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라며, 그럼 그렇지 단순히 회사 건물이 예뻐서 사업을 포기했다는 게 말이 되냐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그래서 그 여자분은 만났어요?”

“어느 팀 누구예요?”

“비밀은 지켜드릴게요.”

도한이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를 향한 모두의 눈이 반짝거렸다.

회식 자리에서 나온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는 걸 믿지 않으면서도 그 여자가 누군지 궁금한 마음에 다들 거짓으로 약속까지 했다.

아마도 그 여자의 정체가 밝혀지면 내일 당장 회사에 소문이 나지 않을까.

내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오늘 밤에 퍼질지도.

도한이 그걸 모를 리 없었기에 사실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기대에 찬 눈빛들을 외면할 수도 없어 어느 정도는 맞춰 주기로 했다.


“만났습니다.”

사랑은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잡았다.

겨우 한 모금 목을 축여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제 첫 출근을 했으면서 벌써 그 여자를 만났다니.

얼마나 보고 싶었길래.

얼마나 좋아했길래.

도한도 그런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걸 확인한 사랑은 눈가가 시큰거렸다.

이 와중에 그 여자가 부러웠다.

한편으론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으면서 왜 사람 헷갈리게 나를 향해서 그토록 다정한 눈빛을 지었는지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와, 왜 내가 다 떨리지.”

“저도요. 돈, 명예 다 버리고 그 여자분 찾아온 거잖아요.”

“그래서 그 여자분은 뭐래요? 감동했을 것 같은데.”

도한은 관심 없다는 듯 물만 마시는 사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 채로 대답을 했다.


“한 번만 더 이름을 부르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던데요.”

그제야 사랑이 홱 고개를 들었다.

그 여자가 바로 자신이었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그녀의 두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가 보고 싶은 사람이 어떻게 저일 수가 있는지, 왜 저를 보려고 이 회사에 들어왔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헤어지자고 한 건 도한인데.

유학을 가게 됐다고 거짓말까지 해 가며 이별을 고한 건 그였는데.

다른 여자가 있었던 거 아니었나.

그 여자와 반지까지 맞출 정도로 사랑했었던 거 아니었나.

사랑은 도한이 말하고 있는 여자가 자신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테이블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예상한 것과 달리 아름다운 결말이 아니어서 팀원들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인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 대리 나쁜 남자였나 보네.”

팀원들도 무거운 분위기를 바꿀 겸 한마디씩 얹었다.


“그 여자분한테 잘못한 게 많은가 봐요.”

“그 정도면 가망이 없는 것 같은데요.”

“어떡해요. 그분 만나려고 우리 회사까지 들어왔는데…….”

다들 한 마음으로 위로를 건네는 사이 사랑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자리를 지키고 있기가 힘들어 잠시 화장실로 피해 있을 참이었다. 그런데 하필 동식이 부르는 바람에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사랑 씨,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

동식은 도한에게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처음 도한을 만났을 때 손에 반지를 끼고 있기에 여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외모, 인성, 재력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으니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다 도한과 그의 동기인 수호와 술자리를 함께한 날이 있었다. 그때 수호는 도한을 보며 5년 동안이나 연애를 안 한 지독한 놈이라고 했다.

동식은 그럼 그 반지는 뭐냐고 물었고, 그때 도한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생일 선물이라고 답했다.

사생활을 공유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동식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도 그 반지와 도한의 보고 싶은 여자가 관련 있지 않을까.

동식은 이제야 그가 승승장구하는 사업을 포기하고 서한 전자에 들어온 이유를 알게 됐다.


“그래도 사랑 씨가 여기서 가장 젊으니까 우리보단 뭘 좀 알 거 아니야. 지 대리가 어떻게 해야 그 여자랑 잘되겠는지 조언 좀 해 줘 봐.”

이번엔 사랑이 팀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고작 이틀 출근한 도한을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동식이 야속했지만, 입사 2년 차가 감히 상사의 질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랑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도한과 눈을 맞췄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의 눈빛에 아련한 그리움 같은 감정이 스쳤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여자분은 지 대리님과 잘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평소 생글생글 웃는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던 팀원들은 적잖이 놀랐다.

왠지 둘 사이가 안 좋아 보여서 걱정스러운 얼굴들이었다.

그렇지만 도한이 보고 싶은 그 여자가 사랑일 거라고는, 오나영 대리 외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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