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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남자 친구 이름은? (45/63)


#44화. 남자 친구 이름은?
2023.06.02.


손을 다쳐서 좋은 점이 딱 하나 있었다.

아침 6시에 비몽사몽인 채로 동네를 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사랑은 윤재가 옆집으로 이사 온 이후 처음으로 아침 운동에서 빠질 수 있었다.

덕분에 느긋하게 일어나려고 했으나 습관이 무섭게 같은 시간에 눈이 떠졌다.

지우는 윤재의 전화를 받자마자 곧장 집에서 나갔고, 사랑은 한참을 침대에 누운 채 멀뚱히 천장만 바라봤다.

왜 자꾸 도한이 떠오르는지.

어제 직접 만나기도 했고 조금 전까지 꿈에서도 봤던 얼굴이라서 더 또렷하게 그려졌다.


“나는 진짜 자존심도 없나 봐.”

그렇게 당하고도 그가 제 가슴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단순히 직장 동료로 대할 수가 없었다.

보기만 해도 화가 나고 목소리를 들으면 분노가 치밀었다.

그가 이름을 불렀을 땐 정말이지 악에 받친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사랑아.’

“하아.”

사랑이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귓가에 맴도는 도한의 목소리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


“왜 갑자기…….”

이름 한 번 들어 본 적 없었을지언정 사귀는 동안은 그가 저를 좋아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름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헤어지고 나니 그 모든 게 착각이었던 것만 같았다.

그에게 나는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줄 필요도 없는 그저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던 게 아니었을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식의 비참한 이별을 맞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랑아.’라니.

우리가 언제 헤어졌냐는 듯, 마치 매일같이 그 이름을 불러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랑아.’라니.


“도대체 왜…….”

나를 보는 눈빛은 또 어떻고.

내가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는 그 시선을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혹시 기억을 잃기라도 했나.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5년 전으로 돌아가 버린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사랑은 고개를 저었다.


“왜 나타난 거냐고.”

그를 떠올릴 때마다 끊임없이 ‘왜’라는 물음이 따라다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것이 제게로 향했다.


“나는 왜 이러는 건데.”

전 남친과 같은 회사에 다니게 됐든, 같은 팀에서 일하게 됐든 내가 그를 정리했으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직장 동료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내면 되니까.

그런데 왜 나는 이토록 그를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왜 그가 온통 내 세상이었던 스무 살의 그때처럼 심장이 뛰는지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사랑은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다가 손이 붕대에 감겨 있다는 걸 뒤늦게 인지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또 도한이 떠올랐다.

커피가 쏟아져 붉어진 제 손등을 보고 일그러지던 그의 얼굴이.

그가 꼭 아끼는 물건에 흠집이라도 난 것처럼 굴어서 당황스러웠다.

사랑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화상을 입은 제 손이 커다란 그의 손에 붙잡혔던 장면이 눈앞에 스쳤다.

손등에 넘쳐 버린 커피보다 그의 손이 더 뜨겁다고 느꼈다.

아무리 손등에 차가운 물을 흘려보내도 제 손을 꽉 잡은 그의 손 때문에 화기가 사라지질 않았다.

화상을 입은 건 손이 아니라 아무래도 마음인 것 같았다.

사랑은 그만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에서 벗어나면 그에 대한 생각이 없어지지 않을까 싶어 문을 열고 나왔다.

마침 지우와 윤재가 운동을 마치고 돌아왔다.


“나 먼저 씻고 너 머리 감겨 줄게.”

“그냥 세수만 하지, 뭐.”

“안 돼. 머리도 감고 화장도 하고 제일 예쁜 옷 입고 출근해.”

지우는 어젯밤 도한의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는 그가 사랑과 헤어진 걸 후회하게 만들자며 이를 갈았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었다는 걸 보여 줘야 한다며 당장 피부 관리도 받고 옷도 사러 가자고 흥분했다.

사랑이 피식 웃고 말자 지우가 금방 씻고 나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물이라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여는데 윤재가 생수를 꺼내 컵에 따라 주었다.

사랑은 역시 친구가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우고 식탁 의자에 앉아 물을 쭉 들이켰다.


“너 정말 괜찮아?”

맞은편에 앉은 윤재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도한이 사랑과 같이 일을 하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윤재는 무척이나 놀랐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

저도 이런데 사랑은 얼마나 기함했을까 싶어 윤재는 그녀가 걱정됐다.


“조금 불편하긴 한데, 그래도 다친 덕에 아침 운동 빠졌잖아.”

사랑은 윤재가 뭘 묻는지 눈치챘지만 일부러 붕대 감긴 손을 들어 보이며 다른 말을 했다.

도한과 헤어지고 지우와 윤재 앞에서 못난 모습을 많이도 보여 줬다.

잘 견디다가도 술을 마시면 멍하니 넋을 놓기도 하고 가끔은 눈물도 흘렸다.

웃음을 되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독히도 아팠던 첫사랑이었다.

그때의 미안함 때문에라도 사랑은 또다시 친구들에게 걱정을 안기고 싶진 않았다.

그 마음이 윤재에게 전해졌는지 그가 설핏 웃고는 사랑의 다친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 하루만이야. 그럴수록 체력을 더 길러야지.”

“손에 화상 입은 거랑 체력이랑 무슨 상관이냐?”

체력을 기른다고 손등에 쏟아지는 커피를 막을 수가 있겠냐고 그녀가 인상을 구겼다.

적어도 붕대를 풀 때까지는 아침 운동에서 열외 되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그럼 순발력을 기를 수 있는 운동도 추가할까?”

“됐다, 됐어. 이 운동 중독자야.”

내가 너랑 무슨 얘기를 하겠냐며 사랑이 일어났다.

훗날 윤재가 체육 교사가 되었을 때, 그에게서 수업받을 미래 제자들이 벌써부터 안쓰러웠다.

수업이 끝나면 다들 녹초가 되어 있을 게 뻔했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윤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좋아했던 친구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남아 있었다면 지우를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지우도 그걸 알기에 그와 사귈 수 있었고, 지금처럼 이웃으로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윤재는 사랑이 다시 도한으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길 바랐다.

그건 친구로서 갖는 당연한 마음이었다.

* * *

지우와 함께 집을 나선 사랑은 핸드폰에 얼굴을 비춰 보며 미간을 좁혔다.


“나 오늘 소개팅 나가냐?”

화장을 참 정성스럽게도 했다.

게다가 한겨울에 치마가 웬 말인지.

누가 보면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 줄 알겠다.


“기본만 한 건데, 뭐. 마음 같아선 화려하게 해 주고 싶다만 너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해서 자제한 줄이나 알아.”

“그래. 고마워서 눈물 난다.”

손에 붕대를 감은 마당에 평소보다 더 꾸미자면 어쩌자는 건지.

팀원들에게 친구랑 같이 산다는 걸 알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안 그러면 숍이라도 다녀온 줄 알겠다.


“퇴근할 때 연락해. 같이 오게.”

“오늘 회식이야. 지도한 대리님 환영회.”

“환영은 무슨.”

도한의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나는지 지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손 때문에 술 못 마신다고 참석 안 하면 안 돼?”

“어떻게 그러냐. 자리는 지켜야지.”

겨우 입사 2년 차 나부랭이가 감히 회식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 지우는 한숨만 나왔다.


“그럼 끝나고 전화할래? 윤재랑 데리러 갈게.”

“됐네요. 택시 타면 되는데 뭐 하러.”

“왜 하필 네 생일날 회식이야? 저녁에 파티도 못 하게.”

“어차피 술도 못 마시는데 파티는 무슨……”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오던 사랑이 말을 멈추고 우뚝 발을 세웠다.

뭘 봤길래 얼굴이 잔뜩 굳었나 싶어 지우가 사랑의 시선이 고정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믿을 수 없게도 도한이 서 있었다.


 


“아직도 둘이 같이 사네.”

차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가 두 여자를 보고 바르게 섰다.

지우는 그의 태연함에 기가 찼다.


“여긴 왜 오셨어요?”

지우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도한은 그제야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어떻게, 아니 왜 오셨느냐고요.”

지금 우리가 인사를 나눌 땐가.

아무리 대학 선배라고 해도 지우에게 도한은 제 친구를 아프게 한 나쁜 놈일 뿐이었다.


“업무 수행 중.”

“네?”

“사수님 손이 나을 때까지 밀착 보호하라는 팀장님의 지시가 있었거든.”

지우는 헛숨을 터트렸다.

무슨 그딴 지시가 있는지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사랑이 왜 도한의 사수인지 황당하기만 했다.

일개 사원에게 대리의 사수를 맡긴 사랑의 팀장이 원망스러웠다.


“그럼 타시죠.”

도한이 조수석 문을 열고 사랑에게 눈길을 주었다.

어제도 예뻤지만 오늘은 더 눈이 부셨다.

회사에 가기를 저렇게까지 예쁠 필요가 있나 싶어 저도 모르게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사귀는 사람은 있을까.

없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내 눈에 예쁘면 다른 남자 눈에도 예쁠 텐데, 당연히 남자 친구가 있으려나.

아침부터 쓸데없는 생각들이 도한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사랑은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다가가서 조수석 문을 닫았다.

그리고 뒷좌석 문을 열고 지우와 함께 올라탔다.

직장 동료가 회사까지 데려다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루 종일 도한과 함께 있으려면 마음이 불편할 테니 몸이라도 편해지자 싶었다.

도한은 뒷좌석 창문 너머로 사랑을 잠시 바라보다가 운전석에 올랐다.

한참이 가도록 차 안에는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누구 하나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 지우가 눈을 번득이고는 도한을 운전기사처럼 외면하며 사랑에게 말했다.


“너 손 다쳐서 네 남친 속상하겠다.”

“……뭐?”

내가 무슨 남친이 있다고.

사랑이 뭔 헛소리냐고 얼굴을 구기는데 지우가 다급하게 눈짓을 보냈다.

도한에게 보란 듯이 사랑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있지도 않은 남친을 갑자기 어떻게 만들어 내라는 건지.

사전에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과연 그가 속을까.

거짓말은 영 소질이 없는데.

사랑이 머뭇거리자 지우가 다시 나섰다.


“네 남친 너한테 끔찍하잖아. 손에 물 한 방울도 못 묻히게 하는데.”

그래서 내 남자 친구는 몇 살인데, 지우야.

오빠라고 해야 하는 거야, 아니면 이름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거야.

뭘 알아야 맞장구를 치지.


“어, 속상해하지. 휴가 내고 쉬라고 난리야.”

이 정도면 되겠니?

지우는 사랑의 대답이 마음에 들어 한껏 신이 난 얼굴이었다.


“어우. 부러워. 나도 네 남친 같은 사람 만나고 싶다. 듬직하고 자상하고 여자관계 안 복잡하고.”

특히나 ‘여자관계’를 강조하면서 지우가 도한을 힐끔 쳐다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랑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지우야, 너 지금 엄청 어색해.

눈치 없기로 소문난 나라도 이건 안 속겠어.

하지만 지우는 자신의 명연기가 마음에 드는지 연신 싱글벙글했다.


“주말에 나 부모님 집에 내려갈 거니까 너는 네 남친 불러서…….”

“강지우.”

지우가 마지막 한 방을 날리려는데 도한의 묵직한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지우와 사랑이 동시에 흠칫 놀랐다.


“너 어디 가서 사기는 못 치겠다.”

“……네?”

“너도 거짓말에 소질 없다고.”

유유상종이라더니.

강지우나 이사랑이나 똑같이 참 순수했다.

도한은 사랑에게 남친이 있다는 말에 심장이 내려앉았었다.

룸 미러로 사랑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제자리를 찾았을 만큼 찰나의 시간이 지옥 같았다.

다행히 사랑은 자신의 남자 친구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지우가 꾸며 낸 이야기였다.


“거, 거짓말 아닌데요?”

당황한 지우가 말을 더듬기까지 하며 흥분했다.

어떻게든 사실로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사랑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둘을 지켜봤다.


“그래?”

“네!”

“그 남자 친구는 몇 살인데.”

“스, 스물다섯이요.”

“이름은?”

“그걸 오빠가 알아서 뭐 하려고요.”

“이름까진 아직 못 정했나.”

회사 건물 지하로 들어가 주차를 한 도한이 여유롭게 받아쳤다.

지우는 괘씸한 마음에 부들부들 떨면서 안전벨트를 풀고 사랑의 것도 버튼을 눌렀다.


“사랑이 남친 이름을 왜 제가 정해요? 거짓말이 아닌데.”

“그럼 친한 친구의 남자 친구 이름도 모른다는 거네.”

“당연히 알죠!”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도한이 차에서 내리자 지우가 재빨리 따라 내렸다.

사랑은 친구의 발악을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도한의 앞에서 우린 여전히 순진한 신입생에 불과했다.

사랑이 차에서 내리자 도한이 앞에서 기다렸다가 뒷좌석 문을 닫았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지우가 막아섰다.

도한이 또 뭐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말했다.


“정윤재요.”

낯익은 이름에 도한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오빠 자퇴하고 얼마 안 돼서 사랑이랑 사귀었고요. 둘이 벌써 4년이나 됐어요.”

지우는 도한이 윤재를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5년 전에 잠깐 만났던 여자 친구의 친구를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럼 안녕히 가세요. 가자, 사랑아.”

지우는 굳은 표정의 도한을 내버려 두고 사랑의 팔을 끌어당겨 주차장을 벗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네 남친을 내 남친으로 만드냐.”

사랑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친구가 이렇게까지 대책 없는 줄은 몰랐다.


“아, 몰라. 저 인간이 윤재를 직접 만날 일도 없는데, 뭐. 내 남친인지 네 남친인지 어떻게 알겠어.”

지우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침부터 열을 올렸더니 2월인데도 더웠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지우의 모습에 사랑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

오늘도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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