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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밀착 보호 (44/63)


#43화. 밀착 보호
2023.05.29.


도한은 회사 주변을 검색해 화상 전문 병원을 찾아 직접 운전을 했다.

병원에서 사랑이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옆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니라 수포가 잡힐 것 같진 않다고 했다.

대신 붉게 변한 피부가 돌아오기까진 한 달 이상 걸릴 수 있으니, 몇 번 내원해서 치료받길 권했다.

환부는 자외선을 차단하는 게 중요했기에 사랑은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병원을 나섰다.

처방받은 외용제까지 약국에서 구매한 후에 도한의 차로 돌아왔다.

두 사람과 동행했던 카페 매니저가 다시 한번 사랑에게 사과했다.


“당분간 불편하실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치료비는 저희가 부담할 테니 진료받으시고 연락 주십시오. 병원 다니시기 힘드시면 저희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닌데요, 뭐. 직원분이 많이 놀라셨을 텐데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다행히 심한 건 아니라고 하니까 금방 나을 거예요.”

사랑은 실수를 저지른 어린 직원이 걱정스러웠다.

자신보다도 더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그래서 더 매니저에게 밝은 얼굴을 보여 주었다.

회사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매니저가 먼저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사랑은 도한과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습관처럼 오른손으로 안전벨트를 풀려던 그녀는 붕대에 감겨 있는 손을 보고 아차 싶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도한이 대신 버튼을 눌러 안전벨트를 풀어 주었다.

사랑은 그의 친절이 불편했다.


“혹시 내가 이 회사에 다니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화가 나 있었다.

전 남친을 회사에서 맞닥뜨린 것도 황당한데 나영의 앞에서 오해할 만한 상황까지 만들었으니 그가 미울 수밖에 없었다.

도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개발기획팀에 있다는 것도요?”

“작년에 팀장님 통해서 알게 됐어.”

사랑이 헛숨을 터트렸다.

다 알고 있는데도 이곳에 왔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존재라는 건가.

사랑은 주먹 쥔 왼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서 괴롭히기로 작정한 거예요? 나 내쫓고 편하게 회사 생활하려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요. 내가 부탁했잖아요. 피차 아는 척하지 말자고. 이렇게 사람 뒤통수치려고 그러겠다고 한 거냐고요.”

사랑은 카페에서 도한이 반말을 했을 때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랐다.

나영은 오죽했을지.

모르는 사이라고 했는데 누가 봐도 특별한 사이처럼 그가 저를 챙겼으니.

사무실에 올라가서 뭐라고 해명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와 버렸어. 네가 다쳤으니까.”

“내가 화상을 입든 손이 부러지든 그쪽이 무슨 상관인데요!”

“사랑아.”

 

 
사랑은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사귀었을 때 그토록 듣고 싶었던 이름을 헤어진 지 5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불러 주었다.

그의 목소리로 듣는 내 이름은 어떤 느낌일지 상상만 했었다.

그런데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이렇게 눈물이 차오르면서 가슴이 뻐근해지는구나.

사랑은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한 번만 더 내 이름 부르면.”

사랑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들어찼다. 시야가 흐려진 그녀가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다.


“그땐 내가 회사 그만둘 거니까 그런 줄 알아요.”

사랑은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도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도적으로 그녀를 곤란하게 하려고 반말을 한 건 아니었다.

뜨거운 커피가 그녀의 손등으로 출렁이는 걸 보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빨갛게 변해 버린 손을 봤을 땐 미칠 것 같더라.

그때부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 상황에서 존댓말을 찾을 여유가 어디 있었겠나.

눈에 보이는 건 내가 사랑하는 여자뿐인데.

앞으로도 그녀에게 다급한 상황이 닥치면 오늘과 같이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건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이니까.


“미친놈. 나는 더 아프게 했으면서.”

그가 낮게 뇌까렸다.

사랑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주제에, 그녀의 손에 입은 화상 하나로 이토록 화를 낸다는 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우스웠다.

도한은 그만 차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가자 사랑이 아직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직장 동료를 챙기는 그녀를 보며 오늘 일이, 그리고 5년 전에 자신이 했던 짓이 더욱 미안해지고 말았다.

* * *

사랑이 사무실로 들어오자 나영이 붕대에 감긴 손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병원에서 뭐래? 화상이 심하대?”

“아니요, 보기에만 이래요. 한 달 정도면 괜찮아진대요.”

“정말 다행이다. 근데 오른손이라 불편해서 어떡해.”

“그나마 겨울이잖아요. 저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느새 다른 팀원들도 다가와 사랑에게 한 마디씩 위로의 말을 건넸다.

특히 동식은 자신이 커피를 사겠다고 해서 일이 벌어진 거 같아 미안해했다.


“막내 벗어나자마자 이게 무슨 일이야. 병원은 여기서 가깝고?”

“네, 차로 10분도 안 걸리더라고요. 퇴근하고 걸어서 가면 될 것 같아요.”

“날도 추운데 걸어서 어떻게 가. 그러지 말고, 지 대리.”

“네, 팀장님.”

도한은 동식이 갑자기 자신을 불러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대답했다.


“자네 첫 업무는 사수의 오른팔이 되는 거로 하지.”

“……네?”

첫 업무 지시에 귀를 기울이던 도한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되묻고 말았다.


“병원도 데려다주고 점심시간에 밥 먹는 것도 좀 도와주고. 붕대 풀 때까지만 사랑 씨 밀착 보호해. 사수로 모시겠다고 했으니까 이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해 봐.”

동식의 업무 하달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도한이 아닌 사랑이었다.

밀착 보호라니. 왜 자꾸 그와 엮이게 되는 건지 가슴이 답답했다.


“팀장님, 저 진짜 괜찮아요. 혼자서 병원도 갈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어요.”

“누가 못 한대? 1년 동안 궂은일 도맡아 했으니까 며칠 호사 좀 누려 보라고.”

절대 호사일 수가 없었기에 그녀가 거절하려는데 도한이 한발 더 빨랐다.


“알겠습니다. 오늘부터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만 사랑 씨 데리고 퇴근해.”

“네, 팀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듬직한 그의 목소리에 동식은 흐뭇해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사랑은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한 채 동식을 보내고 말았다.

황당한 일의 연속이라 할 말을 잃었다.


“가시죠.”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그와 사귀고 이별하기까지의 모든 순간이 떠올라 괴롭기만 한데.

사랑은 고개를 들어 괘씸한 눈으로 도한을 바라봤다.

누군 속이 시끄러워 죽겠는데 그는 참으로 평온해 보였다.

그래서 더욱 억울했다.

* * *

사랑은 정말 도한과 함께 퇴근했다.

사랑이 그의 차를 타지 않으면 오늘 첫 출근 한 대리가 감히 팀장의 명령을 어기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오늘로 끝이 아니라는 거다.

내일이라도 당장 병원에 가서 붕대를 풀어 달라고 할까.

조수석에 앉은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랬다.


“아직도 강지우랑 같이 살아?”

사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반말하는 걸 보니 사수 이사랑이 아닌 대학 후배 이사랑에게 하는 질문인 것 같아서.

그와 개인적인 대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그저 직장 동료 지도한일 뿐이니까.


“구내식당에서 강지우 봤는데. 같이 입사한 건가.”

집에 갈 때까지 침묵을 지키려던 사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지도한 씨 후배 아니고 직장 동료예요. 그리고 지금 지도한 씨는 업무 수행 중이고요.”

“그래서 예의를 갖추라고?”

“네.”

당연한 거 아닌가.

팀장님만 아니었으면 회사 밖에서 이 남자와 대화를 나눌 일이 뭐가 있을까.

사랑은 도한과 사적으로는 절대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철저하게 사수로 대할게. 하지만 밖에서는 그렇게 못 해.”

도한은 단호했다.

그럴 자신이 없어 애초에 약속할 수 없었다.


“그럼 전 여기서 내릴래요.”

“그것도 안 되겠는데.”

사랑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가 저를 일부러 자극하는 것 같아 대응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고작 며칠이잖아. 이사랑 밀착 보호. 그러니까…….”

불편해도 네가 좀 참으라고 뻔뻔하게 말하려던 도한은 그녀가 안전벨트를 풀어 버리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뭐 하는 거야, 위험하게.”

도한은 운전 중이라 사랑에게 안전벨트를 채워 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갓길에 잠시 차를 세웠는데 그녀가 문을 열었다.

깜짝 놀란 도한이 재빨리 사랑의 팔을 붙잡았다.

그를 향하는 그녀의 눈빛엔 분노와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죠.”

반말이 문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랑이 화가 난 이유는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 때문이었다.


“알았어. 아무 말도 안 할게.”

도한은 한 번만 더 이름을 부르면 회사를 그만두겠다던 그녀를 떠올렸다.

보기와 다르게 당찬 모습이 있어 빈말은 아니었을 거다.

사랑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제 앞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녀가 숨어 버리면 다신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도한은 약속대로 사랑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사랑은 인사도 없이 문을 열고 내렸다.

뒤이어 그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뭐야? 너 손이 왜 그래.”

조금 전에 퇴근한 지우가 붕대에 감긴 사랑의 손을 보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다쳤어? 부러진 거야?”

“별거 아니야. 커피를 좀 쏟았어.”

하루가 1년처럼 길었던 사랑이 지친 듯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손이 다친 건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온통 도한으로 시끄러웠다.


“조심 좀 하지. 화상 입은 거야?”

“심한 거 아니니까 호들갑 떨 거 없어. 붕대 때문에 거창하게 보여서 그렇지, 괜찮대.”

“나한테 전화하지, 집에 같이 오게. 혼자 지하철 타기 불편했을 거 아냐.”

지우가 친구 뒀다 뭐에 써먹냐고 타박을 하자 사랑은 그저 설핏 웃었다.

차라리 지하철이 편했을 거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오늘 너 일진이 왜 이러냐. 지도한이 너희 팀으로 들어오질 않나. 손을 다치질 않나…….”

“그러게. 최악의 하루다, 진짜.”

사랑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일도 모레도 최악일 것만 같아 그만 방에 들어가 쉬려고 했으나 지우에게 붙잡혔다.


“너, 아니지?”

“뭐가.”

뜬금없이 뭐가 아니냐고 사랑이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지도한한테 미련 있는 거. 아닌 거지?”

“내가 미쳤냐.”

난 또 뭐라고.

지우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사랑은 헛숨이 터져 나왔다.


“그래, 아니라니 다행이다. 지도한한테 미련 있으면 너 진짜 미련한 거야.”

지우의 말이 우스워 사랑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너 절대 그 인간 좋아하지 마.”

지우도 아는 걸까.

도한의 등장만으로도 내 마음이 벌써 흔들리고 있다는 걸.

하긴. 스무 살의 이사랑에게 지도한은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그 세상이 무너지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지우였으니 걱정되는 게 당연할 거다.


“왜 대답 안 해. 네가 잊어버렸을까 봐 얘기하는데, 지도한은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놈이야. 네가 또 그 인간 좋아하면…….”

“안 잊었어.”

지우의 말을 자른 사랑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잊어.”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고 친구를 안심시켰지만 사랑의 마음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우야.

잊었어야 했어.

가슴에 새기고 잊지 않을 게 아니라, 진작 지워 버렸어야 했어.

그걸 나는 오늘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서야 깨달았어.

잊었다면 그를 보고도 가슴 뛰지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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