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반사적 행동 (43/63)


#42화. 반사적 행동
2023.05.26.



 
오후 3시.

사랑은 업무를 보면서도 내내 옆자리에 있는 도한이 신경 쓰였다.

원래 첫 출근 하는 날엔 일이 없는 게 당연했다.

그녀도 신입 사원이었을 때 바짝 긴장한 채로 사수가 일을 시키기만을 기다리다가 하루가 끝났었다.

일주일 정도는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한가했었다.

다들 각자의 일이 바빠서 신입을 상대해 줄 사람도 없었다.

이따금 누군가가 지나가다 말을 걸거나 커피나 마시러 가자고 데리고 나가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옆에서 도한이 두 시간째 가만히 앉아 직무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해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프로젝트를 하나 끝내고 잠깐 여유를 만끽하는 시기이기도 했으니, 지금 당장 그가 할 일이 없기도 했다.

그런데도 사랑은 개인적인 이유로 그를 방치하고 있단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도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내버려 뒀을 텐데.

사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게 먼저 입사한 내가 굴러온 돌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지.

그렇다고 사원이 대리에게 복사를 시킬 수도 없고.

그녀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데 동식이 다가왔다.


“새 사람 들어온 기념으로 내가 커피 좀 살까?”

“제가 다녀올게요, 팀장님.”

나영이 일어나자 동식은 그녀에게 개인 카드를 건넸다.


“오 대리 혼자 다 못 들고 오니까 막내도 데려가.”

막내라는 말에 사랑과 도한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식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그 둘을 바라봤다.

습관대로 사랑을 막내로 지칭했는데, 도한이 그녀를 사수로 모시고 있으니 당분간은 그가 팀의 막내이기도 했다.


“아, 이제 지 대리가 막내인가.”

“제가 다녀올게요.”

막내 생활이 몸에 밴 사랑이 나갈 준비를 하자 도한도 나섰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나영과 동식은 두 사람이 마치 서로 막내가 되겠다고 싸우는 것만 같았다.

평소 생글거리는 사랑이 오늘따라 날카로워 보여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그냥 다 같이 갔다 와. 지 대리 할 일 없이 앉아만 있기도 지루할 텐데.”

결국 세 사람은 동식의 지시를 따랐다.

1층 카페로 내려와 나영이 아메리카노 열세 잔을 주문했다.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서 셋은 테이블에 앉아 기다렸다.

나영이 대화를 주도했다.

새로운 팀원이 들어왔으니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았다.


“지 대리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서른하나입니다.”

“저랑 같으시네요. 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혹시 우리 팀에 같은 학교 출신이 있나 해서요.”

“한국대 3년, 명성대 3학기 다녔습니다.”

“네?”

“두 곳 모두 자퇴했습니다.”

나영은 조금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셨구나. 대학 동기랑 창업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만두신 거예요?”

“아니요, 자퇴는…….”

도한이 잠시 말을 멈추고 맞은편에 앉은 사랑을 바라봤다.

유학을 떠나게 됐다는 어설픈 거짓말로 그녀에게 이별을 고했던 그때가 떠올라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사랑은 관심 없다는 듯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도한은 나영에게로 눈을 옮겼다.


“다른 사정으로 하게 됐습니다.”

이번에도 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그녀는 ‘이런 사람이 성공하는 거구나.’ 하는 걸 느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와 깊이를 가진 눈빛에서 자신감이 드러났다.

그래서인지 스스로가 잘났다고 티 내는 것 하나 없이 상대를 존중하는데도 오히려 그가 높은 사람처럼 보였다.

좋은 학교를 나오거나 집안에 돈이 좀 있다고 뻐기는 부류들로부터 느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영은 도한이 팀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사랑 씨가 명성대 졸업했잖아. 맞지?”

“네.”

예상했던 일이라 사랑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피차 아는 척하지 말자고 도한에게 미리 일러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가 연기를 잘해 줘서 고맙기까지 했다.


“지 대리님이 3학기만 다녀서 두 사람 학교에서 본 적 없었으려나?”

“없었어요.”

“같은 시기였으면 서로 얼굴 봤을지도 모르는데. 두 사람 다 공대에서 강의 들었을 거 아냐.”

나영은 자신이 더 안타까웠다.

도한의 외모가 평범하지 않아 학교에서 꽤 유명했을 것 같았다.

그런 선배와 같은 건물에서 강의를 들었다면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면 학교생활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나영은 그러한 경험이 없었던 자신의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아쉽다. 둘이 아는 사이면 우리 사랑 씨 대학 때는 어땠는지 지 대리님한테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 남학생들한테 인기 많았을 것 같아서.”

“저 별로 인기 없었어요.”

사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진동벨을 힐긋거리느라 바빴다.

빨리 좀 울리지.

이 자리가 영 불편했다.


“그거 겸손 아니야? 여자인 내가 봐도 사랑 씨는 정말 이름처럼 사랑스러운데?”

나영은 사랑의 사수로서 1년 동안 가르치며 이런 여동생이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성실한 후배였다.

뭘 해도 미운 놈이 있다면 뭘 해도 예쁜 사람이 있다.

사랑은 후자에 속했다.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남자들한테 차이기만 했는데요.”

“에이, 설마.”

“정말이에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했다가 대차게 까였고 소개팅에서도 30분 만에 차였어요, 저.”

“정말?”

“네.”

사랑은 도한이 있는 쪽으로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제 고백을 대차게 거절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거짓말도 아닌데 당사자를 앞에 두고 말하려니 괜히 가슴이 떨렸다.


“그 학교 남자들이 사람 볼 줄을 모르네. 사랑 씨 같은 여자가 어디 있다고.”

나영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는데 침묵을 지키고 있던 도한이 입을 열었다.


“차이기만 한 건 아닐 것 같은데요.”

사랑은 그제야 그를 향해서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원망의 눈빛을 하고서.


“고백도 받아 봤을 것 같은데.”

도한은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그 말을 하는 건 처음이라, 잔뜩 긴장했던 탓에 옷차림도 엉망이고 슬리퍼까지 신은 채로 고백해서 거절당했던 그날의 실수를.

왜 그 기억은 잊고 대차게 까였던 것만 언급하냐는 듯 그가 서운함을 비쳤다.

사랑은 그런 도한이 어이가 없었다.

그 정도가 서운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을 땐, 다른 여자와 나눠 낀 커플링을 봤을 땐 어땠을 것 같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회사였다.

지도한은 자신의 전 남친이 아니라 오늘 첫 출근을 한 팀원에 불과했다.

그는 철저히 직장 동료여야만 했다.


“그래. 차인 건 차인 거고, 고백해 오는 남자들도 있었겠지.”

나영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자 사랑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긴 있었어요.”

“거봐. 동기? 선배? 아니면 후배?”

평소 개인적인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나영은 조금 흥분했다.

사랑은 그런 나영이 아닌 도한을 보며 대답했다.


“친구요.”

그 순간 그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체육학과였는데 교양 수업에서 알게 됐거든요.”

“와, 무려 체대생이었단 말이야? 왠지 멋있었을 것 같다.”

“좀 그렇긴 했죠. 아무래도 체격 조건이 좋으니까. 중학생 때까지 수영 선수였거든요.”

“내 이상형이 운동선수인데. 부럽다, 사랑 씨. 체대생한테 고백도 받아 보고.”

사랑은 다시 도한을 외면했다.

그가 저를 어떤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보란 듯이 너에 대한 기억은 내 머릿속에서 전부 지워 버렸다고 태연하게 굴고 싶었다.


“그래서 둘이 사귀었어?”

사랑은 잠시 고민했다.

윤재와 사귀었다고 거짓말을 하자니, 진짜 그와 사귀고 있는 지우에게 미안해졌다.

차마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때마침 진동 벨이 울렸다.


“커피 나왔나 봐요.”

사랑은 재빨리 진동 벨을 낚아채 일어났다.

나영도 방금 자신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 잊어버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 사랑을 뒤따랐다.

할 수 없이 도한도 두 사람을 쫓았다.

도한은 궁금했다. 자신이 자퇴를 하고 사랑과 윤재가 정말 사귀었는지.

다른 한편으론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누가 봐도 잘 어울렸기에, 둘이 연애를 했다면 예쁜 사랑을 했을 것만 같다.

질투할 자격도 없으면서 속이 쓰렸다.


“아메리카노 열세 잔 나왔습니다.”

직원은 뜨거운 커피가 담긴 종이컵의 뚜껑을 닫아 네 개의 공간이 있는 컵 캐리어에 넣었다.

종이컵이 총 열세 개라서 세 개의 컵 캐리어에 담고 나니 하나가 남았다.

먼저 도착한 사랑이 직원에게 받은 컵 캐리어 두 개를 도한에게 전달했다.

그사이 나영이 하나를 가져가서 마지막 종이컵만이 사랑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종이컵을 건네받는 순간, 직원의 실수로 뚜껑이 열리는 바람에 그녀의 손으로 뜨거운 커피가 왈칵 쏟아졌다.


“앗!”

사랑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질 정도로 손등이 뜨거웠다.

그대로 컵을 놓치면 옆에 선 나영까지 다칠 것 같아서 사랑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꽉 잡고 있었다.


“어머, 어떡해!”

나영이 놀라 소리를 치는 사이 도한은 들고 있던 컵 캐리어를 황급히 테이블에 올리고 사랑의 손에서 종이컵을 빼앗았다.


“괜찮아?”

난데없이 들린 반말에 사랑은 손등이 아픈 걸 잠시 잊고 말았다.

반말도 모자라 그가 제 손을 잡는 바람에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았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직원은 연신 사과를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도한이 찬물에 손을 씻어야겠다고 하자 직원이 얼른 두 사람을 개수대로 안내했다.

도한이 물을 틀어 사랑의 손을 잡아 흐르는 물에 가져갔다.


“놔요. 내가 할게요.”

사랑이 난처한 얼굴로 손을 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한다니까요.”

“가만히 좀 있어.”

도한이 자꾸만 움직이는 사랑의 손을 꽉 잡고 무섭게 말했다.

벌겋게 익어 버린 손을 보고 있자니 도한은 직원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지 대리님.”

사랑이 그만 좀 하라고 작게 부르는데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오로지 그녀의 손에만 집중했다.


“지도한 대리님!”

결국 사랑이 목소리를 조금 높이고 나서야 도한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일그러진 걸 보고서야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뒤늦게 돌아보니 나영이 놀라서 입을 벌린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은 그 틈을 타 그에게서 손을 빼냈다.

그러자 카페 매니저가 소란을 전해 듣고 급히 다가왔다.


“저희 직원이 큰 실수를 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사과하는 매니저 옆에서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 같은 직원이 훌쩍이고 있었다.


“저하고 같이 병원부터 가세요.”

“아니에요. 그 정도로 다치진 않았어요.”

사랑은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부담스럽고 울고 있는 직원도 안쓰러웠다.

많이 다친 것도 아니었으니 그냥 빨리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도한이 방해했다.


“화상 방치하면 나중에 치료하기 더 어려워요. 그러니까 지금 다녀오시죠.”

정신이 번쩍 든 나영도 거들었다.


“그래,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 내가 팀장님께 전화할게.”

사랑이 대답하기도 전에 나영이 동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짧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통화를 마쳤다.


“팀장님께 얘기해 놨으니까 얼른 병원 다녀와. 지 대리님하고 같이.”

“네? 지 대리님은 왜…….”

사랑은 손의 물기를 닦다가 깜짝 놀랐다.

나영도 아니고 도한이라니.

오늘 첫 출근을 한 그와 자신이 왜 병원을 같이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팀장님이 지 대리님 차로 갔다 오래. 내가 오늘 차를 안 가져와서. 지 대리님, 사랑 씨 좀 부탁해요.”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도한은 머뭇거리는 사랑을 데리고 매니저와 카페를 나섰다.

혼자 남은 나영은 커피가 담긴 열세 개의 종이컵을 멍하니 바라봤다.

순식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정신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당혹스러운 건 사랑이 다쳤을 때 반사적으로 움직이던 도한의 태도였다.

절대 모르는 사이일 수가 없었다.


“우리 팀에 체대생이 들어올 리는 없고…….”

사랑에게 고백했다는 체대생이 도한은 아닐 텐데.

그럼 혹시 30분 만에 차였다는 소개팅남?

그보다는 다른 쪽에 더 가능성이 클 듯해 나영은 고개를 저었다.


“고백했다가 대차게 까였다는, 그 남자인가?”

나영은 세 사람이 사라진 카페 문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랑의 손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도한의 정체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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