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스카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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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스카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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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스카우트
2023.05.19.
5년 후.
아침 6시에 눈을 뜬 윤재가 기지개를 켰다.
방학이라 수업은 없지만 체육학과 학생답게 늘 이 시간이면 동네를 한 바퀴 달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운동할 생각에 산뜻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바로 옆집 초인종을 눌렀다.
함께 아침 운동할 동지들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세 번을 연속해서 벨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그런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시 문이 스르르 닫히려고 했다.
윤재가 재빨리 문을 잡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안으로 들어서자 처참한 거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이것들이 진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여자는 그렇다 치고, 맥주 캔과 과자 봉지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도대체 몇 시까지 술을 퍼마신 건지 그녀들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빈 캔을 여덟 개까지 센 윤재가 그만 포기하고 두 여자를 깨웠다.
“강지우! 이사랑! 빨리 일어나.”
지우와 사랑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공대생들의 워너비인 서한 전자에 나란히 취업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초, 중, 고, 대에 이어서 직장까지 같이 다니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다.
학교 앞 원룸에서 회사 근처 투룸으로 옮긴 그들은 한동안 자유로운 삶을 만끽했다.
고생스럽던 취업 준비도 끝났고, 원하던 회사에 다니며 월급도 꼬박꼬박 들어오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었다.
물론 많이 받는 만큼 일은 힘들었지만 월급날이 되면 애사심이 폭발해 회사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 맹세는 주로 술과 함께 이루어졌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생활은 딱 1년뿐이었다.
지우와 3년째 사귀고 있는 윤재가 어느 날 갑자기 옆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동시에 그녀들의 화려한 자취 생활은 끝이 났다.
운동선수 출신이라 그런지 윤재의 하루는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였다.
그 덕에 그녀들은 억지로 바른 생활을 유지해야만 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뻗어 버린 오늘 같은 날에도.
“출근 안 할 거야?”
우렁찬 윤재의 목소리에 지우와 사랑이 애벌레처럼 꼬물거렸다.
대체 몇 시인데 저렇게 난리인가 싶어 지우가 겨우 눈을 떠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 뭐야. 6시밖에 안 됐잖아…….”
괜히 문을 열어 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9시까지 출근이라서 7시에 일어나도 충분한데.
지우가 다시 눈을 감자 쓰레기를 치우던 윤재가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켜 앉혔다.
“운동하러 나가야 할 거 아냐.”
“야! 인간적으로 오늘 같은 날은 좀 봐주라.”
지우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제 남자 친구지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
어떻게 하루도 안 빠지고 6시에 운동을 하러 나가는지.
거기까진 좋은데 왜 자신들도 동참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기 드물게 바른 남자였던 윤재에게 반해서 사귀게 됐지만 이웃이 되고 보니 바른 생활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친구들이랑 외박도 하고 밤새 술도 마시고 싶은데, 윤재는 부모님보다도 더 엄격했다.
“그러게 누가 늦게까지 마시래? 주말도 아닌데 이 지경이면 어쩌자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 다신 안 그럴 테니까 딱 오늘 하루만 빠지자. 사랑이도 못 일어나잖아.”
윤재가 두 다리로 제 등을 받치고 있는 탓에 지우는 도로 눕지도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그 옆에서 사랑은 여전히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야! 이사랑! 당장 안 일어나!”
그제야 화들짝 놀란 사랑이 꾸물꾸물 일어나 앉았다.
“아, 정윤재 진짜. 너 정말 왜 그러냐. 너나 운동 많이 하라고. 나는 안 해도 된다니까?”
“제일 비실비실한 애가 뭐래. 그나마 아침에 동네라도 한 바퀴 도니까 너희들이 새벽까지 술 마실 체력이라도 되는 거야.”
“강지우, 너 그냥 윤재랑 둘이 멀리 나가서 살아. 그냥 나 혼자 살고 말지.”
아침부터 시작되는 잔소리에 사랑이 힘겹게 일어났다.
말하는 것도 귀찮았다.
“너는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얘랑 둘이 사느니 차라리 부모님 집에서 출퇴근하겠다.”
버스로 3시간도 넘게 걸리는 부모님 댁을 언급할 정도로 지우는 넌더리를 냈다.
그러다 정수리가 따가워 고개를 들자 윤재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차. 내 남자 친구였지.
잠시 깜빡한 지우가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사랑은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얼른 화장실로 대피했다.
“뭐, 뭘 이렇게 많이 먹었지?”
눈치껏 쓰레기라도 치우려고 재빨리 일어나는 지우를 윤재가 붙잡았다.
화가 난 것 같은 눈빛이라 지우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슬쩍 눈을 돌렸다.
“내가 옆집에 사는 게 그렇게 싫어?”
“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거면 내가 이사 가고.”
“아니야. 사랑이가 있으니까 그냥 하는 소리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응?”
지우가 윤재에게 팔짱을 끼고 눈을 반쯤 접었다.
아침부터 남자 친구랑 싸운 채로 출근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여기 다 정리할 테니까 너는 손도 대지 마. 진짜 다시는 안 그럴게.”
보통 이 정도면 스르르 화를 풀 텐데 오늘따라 윤재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제 말이 너무 심했나 싶어 지우가 시무룩해하는데 느닷없이 그가 입을 맞췄다.
그럼 그렇지.
내 애교에 정윤재가 안 넘어갈 리가 있나.
지우가 웃으며 다시 해 달라고 입술을 내밀자 윤재도 피식 웃고는 쪽 입을 맞췄다.
하필이면 그때 사랑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칫솔을 입에 물고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나오던 그녀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 진짜, 아침부터.”
지우는 흠칫 놀랐지만 애써 평온한 척 굴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한두 번 들킨 게 아니라 이젠 제법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부러우면 너도 연애하든가.”
“됐다, 됐어. 너나 많이 해라.”
사랑은 귀찮다는 듯이 방에서 옷을 가지고 나와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사랑 연애한 지가 대체 언제야.”
“그래도 졸업 전까진 남자 친구 사귀지 않았어?”
지우의 한숨 섞인 중얼거림에 윤재가 닫힌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랬었지. 근데 누굴 만나도 오래 가진 못하더라고. 그게 다 그 인간…….”
지우가 말을 삼키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 인간이 누굴 말하는지 알아들은 윤재가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나 사실 얼마 전에 그 사람 학교에서 한 번 봤는데.”
“뭐? 도한 오빠를?”
저도 모르게 흥분한 지우가 얼른 입을 닫았다.
화장실 안까지 들렸을 리가 없는데 괜히 조마조마했다.
“근데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알아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네가 실수로 사랑이한테 말하면 걔 또 마음 복잡할 거 아니야.”
“하긴, 모르는 게 낫겠다. 이젠 둘이 만날 일도 없으니까.”
지우는 5년 전의 도한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유학을 간다고 사랑과 헤어져 놓고선 버젓이 호텔에서 친구들을 만나던 천하의 나쁜 놈.
아직도 술만 마시면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사랑이 안쓰러웠지만 지도한을 다시 만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했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도한을 좋아하는 사랑을 어떻게든 뜯어말릴 거다.
두 사람이 사귀지 못하게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방해하고 말 것이다.
지우는 가끔 사랑의 멍한 눈빛을 볼 때면 그러지 못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 * *
사무실에 들어오고 나서도 사랑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침부터 윤재에게 끌려 나가 기어이 동네 한 바퀴를 뛰고 온 탓이었다.
그의 말대로 그 덕에 저질 체력을 벗어난 건 맞지만 오늘 같은 날은 운동을 건너뛰고 싶었다.
하지만 곧 죽어도 원칙을 지켜야 하는 윤재에게 핑계가 통할 리 없었다.
“으, 벌써 퇴근하고 싶다.”
의자에 털썩 앉은 사랑은 온몸이 찌뿌둥해 앓는 소리가 나왔다.
맥주를 한 캔만 마셨어야 했는데 지우와 한번 수다가 시작되면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데 오나영 대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랑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나영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왜 그렇게 피곤해 보여? 주말에 못 쉬었어?”
서한 전자 TV 사업 본부 개발기획팀 입사 2년 차인 사랑은 팀 내에 동기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입사하기 이전 해와 그 전해에도 팀에 신입 사원이 들어오지 않아서 귀한 막내였다.
그러다 보니 사랑은 사수였던 나영과 가장 친했다.
“아니요. 어제 친구랑 늦게까지 좀 놀았더니 정신이 안 나서요.”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 6시부터 일어나 친구들과 동네를 뛰어다녀 이 모양이라는 말까진 하지 않았다.
직장에선 뭐든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좋았다.
아무리 친한 나영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랑은 도한과 헤어지고 주위에서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시선들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그때의 일 때문인지 웬만하면 다른 사람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말을 아꼈다.
“체력이 부럽네. 나는 주말 내내 잠만 자도 월요일 아침이면 죽겠는데.”
“저도 그래요.”
사랑이 웃으며 그만 정신을 차리려고 자세를 바로 했다.
월요일부터 넋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그때 김인수 과장이 세 번째로 출근을 했다.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 서로 주고받은 후 그가 자리에 앉았다.
“오늘 우리 팀에 새로운 사람 들어오는 거 알고들 있지?”
인수가 그녀들을 향해 묻자 나영이 의자를 돌려 그를 보았다.
“네. 근데 공채도 아니고 팀장님 통해서 들어오는 거면 낙하산 아니에요?”
오늘부터 출근하기로 한 사람은 신입 사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력직 채용의 절차를 거친 것도 아니었다.
팀장님 말에 의하면 사석에서 만난 인재라고 했다.
스물여섯에 교육용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출시했고, 현재 전 세계 20개국에 공급하고 있는 유망한 사업가라고.
“낙하산은 아니고 스카우트지. 부서마다 팀장급엔 인사권이 있으니까.”
“그래도 우리가 연구개발팀도 아닌데.”
능력을 보고 스카우트한 거라면 그에 맞는 부서에 가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어서 나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공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잘하는 법이거든. 습득력도 빠르고. 그래서 그런 인재는 어디서든 모셔 가려고 해. 취업 준비생 입장에선 회사 들어가기 힘들다고 하지만 기업도 쓸 만한 직원 찾기가 어렵거든. 우리로서는 땡큐지. 올해 신입 사원도 안 들어왔는데 조 과장까지 갑자기 그만둬서 다들 힘들잖아.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나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낙하산이든 스카우트든, 그 사람으로 인해 업무가 줄어들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사업가면 이익이 직장인 월급하고는 비교도 안 되잖아요. 어떻게 그걸 다 포기하고 우리 회사에 들어올 수가 있을까요? 그것도 대리로.”
사랑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대표님께서 무슨 이유로 대리로 입사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팀장님도 막상 그 사람이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주니까 의아해서 물어보셨대. 우리 회사에 왜 들어오려고 하냐고.”
“그랬더니 뭐라고 했대요?”
“우리 회사 건물이 예뻐서.”
“네?”
나영이 어이없는 얼굴을 하는 동안 사랑은 얼어붙었다.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우리 학교 캠퍼스가 예뻐서란다.’
도한이 한국대를 자퇴하고 우리 학교에 입학한 이유.
태훈이 그렇게 말했었다.
사랑은 자연스레 도한이 생각났다.
그와 헤어지고 다른 남자를 만나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지독한 첫사랑의 아픔도 시간이 지나니 어느 정도 무뎌졌다.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게 몇 번의 연애를 했다.
그런데 아무리 남자 친구가 제게 진심이어도 마음이 채워지질 않았다.
다정한 사람도 만나 보고 저밖에 모르는 남자도 만나 봤지만 가슴은 늘 허전했다.
상대에게 마음이 다해지지 않았다.
도한에게 그랬던 것만큼 좋아지지가 않았다.
마치 그가 제 심장의 절반을 떼어 간 것처럼 반쪽짜리 사랑밖에 할 수가 없었다.
사귄 건 고작 두 달이었는데.
어떻게 그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한 건지 사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5년이 지났으니 서른하나일 텐데.
이런저런 상념을 지우기 위해 사랑이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그만 접으려는데 익숙한, 그러나 이곳에서 들려선 안 될 목소리 하나가 그녀의 귀에 꽂혔다.
“안녕하십니까. 지도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