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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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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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Love
2023.05.15.
여름 방학이 시작됐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마치고 강의실을 나온 지우는 공대 앞에서 태훈을 만났다.
“시험은 잘 봤어?”
“그럭저럭요. 오빠는요?”
“나도 그냥 그렇지, 뭐.”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어색했다.
태훈은 지우의 눈치를 슬쩍 보곤 괜히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사랑이는 좀 어때?”
도한과 사랑이 헤어진 지 2주가 지났다.
그런 탓에 태훈은 지우를 만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도한이 갑자기 사랑에게 이별을 고하고 잠수를 타 버리는 바람에 괜히 난감해졌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요. 맨날 울기만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시험 준비도 잘하고.”
“정말 다행이다.”
“다행인 건지 모르겠어요. 저러다 갑자기 우울증이라도 올까 봐 불안해 죽겠다니까요.”
지우는 사랑이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라도 얼음이 갈라져 물속으로 빠져 버릴 것만 같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도한 오빠하고는 아직도 연락 안 돼요?”
“응.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 보내도 읽지도 않아.”
태훈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느 날 도한과 같이 저녁을 먹다가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말에 도한은 조금 전 사랑과 헤어지고 오는 길이라고 전했다.
헛소리인 줄만 알았던 태훈은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유학을 갈 거면 진작에 가든가. 우리 학교는 왜 들어와서.”
지우는 뒷말을 삼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 끝난 마당에 도한의 욕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그러게 말이다. 뜬금없이 무슨 유학인지……. 여태 아무 말도 없다가 이게 뭔 날벼락이냐고.”
태훈 역시 도한이 단순히 유학을 간다고만 알고 있었다.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가게 됐다는 말을 들었을 뿐, 자세한 사정은 묻지도 않았다.
워낙 집안 얘기는 하지 않는 친구라 물어본들 대답해 주지도 않았을 거다.
“벌써 떠났겠네요.”
“그렇겠지.”
태훈은 도한과 학교에서 저녁을 먹던 날이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그 후론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아무리 지독한이라 불렀다지만, 진짜로 이렇게 지독한 놈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참, 내일 사랑이랑 호텔에 간다고?”
태훈은 이제 그만 도한에 관한 생각을 떨쳐 내기로 했다.
저 혼자 서운해한들 이미 떠나 버린 친구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잘 지내는 방법밖엔 없었다.
“네. 도한 오빠 친구가 준 숙박권이라서 빨리 써 버리자고 했어요. 사랑이가 자꾸 그거 꺼내 보거든요. 도한 오빠랑 관련된 건 아예 다 없애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 가서 재미있게 놀고 와. 시험도 끝났으니까 사랑이 기분 전환도 좀 시켜 주고.”
“그럴게요.”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호텔 방에서 밤새 술이나 마시겠지만 사랑에겐 그런 시간도 필요했다.
도한과 헤어지고 집에서 술을 마신 이후로, 사랑은 언제 그랬나 싶게 예전으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소와 똑같이 생활했다.
그래서 지우는 더 불안하기만 했다.
겨우 그 하루 흘린 눈물로 첫사랑을 잊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몇 번이나 더 울고 망가져도 좋으니 지우는 사랑이 모든 걸 털어 냈으면 싶었다.
가슴 속의 도한을 모두 쏟아 내 더는 그를 떠올려도 아프지 않기를.
그렇게 깨끗하게 마음을 비우길 바랐다.
* * *
“와, 여기 진짜 고급스럽다.”
호텔 로비에 들어선 지우가 연신 감탄했다.
이런 곳엔 대체 어떤 사람이 오는 건가 싶었는데 바로 그곳에 자신이 서 있자 현실감이 없었다.
“네 덕에 내가 호강한다.”
지우는 사랑에게 팔짱을 끼고 활짝 웃었다.
사랑도 웃으며 프런트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공짜로 얻은 건데, 뭐.”
“그래도. 너 아니었음 내가 호텔에 어떻게 오겠어? 그것도 이렇게 비싼 곳엘.”
같은 생각인 사랑이 체크인을 하고 돌아섰다.
엘리베이터로 걸어가 버튼을 누르자 지우가 손에 들고 있는 편의점 봉투를 들어 보였다.
“우리 좀 없어 보이나? 왠지 여기 오는 사람들은 레스토랑에서 와인 마실 것 같은데.”
“뭐 어때. 그리고 레스토랑 가 봤자 불편하기만 해.”
사랑은 이 호텔 레스토랑에서 도한과 그의 친구들을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어른처럼 화장을 하고 옷을 갖춰 입고도 내내 어색해서 눈치를 살폈다.
그때 사랑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압도당해서 뭘 먹었는지, 음식이 맛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긴. 와인은 무슨 와인이냐. 스무 살은 맥주가 딱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창피한지 목소리가 작아지는 지우를 보며 사랑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스무 살이라는 마지막 말이 마음에 남아 웃음기를 지워 냈다.
‘이제 스무 살이야. 호텔은 무슨.’
사랑은 불현듯 도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저어 환청을 떨쳐 낸 그녀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스무 살도 호텔에 올 수 있다는 걸 보란 듯이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다가와 그녀를 아는 체했다.
“어?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사랑은 그녀에게 말을 건 남자를 한눈에 알아봤다.
박수호. 도한과 함께 만났던 그의 동기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사랑이 난감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도한에게서 우리가 헤어졌다는 걸 듣지 못한 걸까.
자신을 반가워하는 걸 보니 수호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 씨도 오늘 여기서 묵어요?”
“네. 전에 주신 숙박권 제가 쓰게 됐어요. 죄송해요.”
“죄송은요. 황금 같은 주말에 도한이를 또 차지한 제가 더 미안하죠. 출장이 취소돼서 오늘 동기들 전부 모았거든요.”
순간 지우가 놀란 눈으로 사랑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이 남자가 어떻게 도한과 같이 있을 거라는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미국에 간 거 아니었나.
그래서 연락도 안 된다고 했는데.
“도한 오빠 아직, 미국 안 갔어요?”
사랑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수호에게 물었다.
이곳 어딘가에 도한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녀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미국이요? 지도한 미국으로 여행 간대요?”
“……네?”
“창업하자고 나한테 회사 그만두라더니. 자기 혼자 여행 갈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아, 진짜 의리 없네, 지독한.”
사랑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수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못 알아들을 정도로 머리가 울렸다.
“엘리베이터 왔네요.”
그사이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수호가 먼저 발을 들였다.
잠시 정신이 나가 있던 지우는 재빨리 사랑의 손을 이끌었다.
수호와 지우가 각자 객실의 층수를 누르는데 사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 도한 오빠 잠깐만 볼 수 있을까요?”
“네?”
“잠깐이면 돼요. 10분만. 아니, 5분만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수호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사랑의 눈빛이 간절한 것도, 옆에서 친구가 그녀를 말리는 것도 이상하기만 했다.
“아. 네, 뭐.”
둘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수호는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이별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사랑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사랑. 너 어쩌려고.”
열림 버튼을 누르고 지우가 작게 속삭였다.
사랑을 데려올 수도, 그렇다고 따라나설 수도 없어 난감해하는 얼굴이었다.
“오래 안 걸릴 거야. 방에 가 있어.”
지우가 한 번 더 붙잡아 보려 했지만 사랑은 그대로 멀어져 갔다.
빈 복도에 발소리만이 울렸다.
객실이 어딘지도 모르고 수호의 뒤를 따르던 사랑은 그가 걸음을 멈추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앞의 문 너머에 도한이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유학을 가게 됐다고 헤어지자던 그가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가 있는지.
수호는 왜 그가 떠나는 걸 모르고 있는 건지.
사랑은 도한을 만나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서 연신 심호흡을 했다.
문 앞에 서 있던 수호가 벨을 눌렀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다.
“왜 이제…….”
모임을 주도한 수호가 가장 늦게 도착해서 인상을 쓰던 도한이 순간 말을 멈췄다.
말도 안 되게 그의 시야에 사랑이 들어왔다.
서로에게 시선이 고정된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 버리자 수호는 그제야 실수했다는 걸 알아챘다.
“저기, 그러니까, 로비에서 내가 사랑 씨를 만났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머뭇거리는 수호에게 도한이 눈을 옮겼다.
“들어가 봐. 다들 너 기다려.”
“어? 어. 그, 그래.”
자리를 피해 달라는 것 같아 수호는 사랑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객실로 들어갔다.
철컥 문이 닫히자 도한이 다시 사랑을 마주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그 역시 당황스러웠다.
학교를 그만두고 더는 사랑을 볼 수 없게 된 도한은 하루하루가 참 길게 흘러갔다.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아니 자면서도 그녀를 생각했다.
한 달을 그리워한 것 같은데 겨우 하루가 지나 있었고, 1년은 못 본 것 같은데 고작 일주일이 흘렀을 뿐이었다.
뭘 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아프게 한 벌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멀리서 한 번만 보고 올까.
조금 전 도한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무작정 집을 나섰다.
그리고 차에 올랐는데 수호로부터 오늘 동기들과 모이기로 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어차피 참석하지도 않을 테지만 단체 문자라고 생각하라는 수호의 말에 도한은 정신이 번쩍 났다.
자신이 지금 어딜 가려고 했었는지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미국으로 떠난 줄로만 아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학교에서 보면 곤란했다.
도한은 결국 사랑에게 가지 못하고 수호가 알려 준 호텔 쪽으로 차를 몰았다.
혼자서 술을 마셨다간 이번엔 진짜로 그녀를 찾아갈 것 같아서 동기들과 함께 있기로 했다.
그런데 어째서 눈앞에 이사랑이 있는 건지.
도한은 환영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국에, 안 갔네요.”
사랑은 그를 보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정말 도한이었다.
그토록 전화를 걸어도 목소리 한 번 들을 수 없었던 그가 바로 앞에 있었다.
사랑이 두 주먹을 꽉 쥐고 울지 않으려고 버티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아직 안 간 거예요? 아님 처음부터 갈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도한의 침묵에 사랑은 어느 정도 답을 짐작했다.
내가 귀찮았던 걸까.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떼어 내고 싶을 만큼 내가 지겨워졌던 건가.
허탈함이 밀려와 사랑은 그만 고개를 떨궜다.
그런 것도 모르고 질리게 전화를 해 댔으니 얼마나 성가셨을지.
헛숨이 터져 나온 그녀가 그만 돌아서려던 찰나, 시선 끝에 뭔가가 반짝였다.
도한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본 사랑은 곧 두 다리에 힘이 빠졌다.
커플링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왜 그와 헤어져야 했는지 이해하고 말았다.
다른 여자가 있었구나.
어쩌면 혜리가 아프다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사랑은 그가 깔끔한 이별을 위해 이런저런 핑계를 댔구나 싶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솔직하게 말하지 그랬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게 무슨…….”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도한은 사랑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제야 반지 때문이라는 걸 알아챘다.
“커플링. 맞죠?”
또다시 대답이 없자 사랑은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비참함이 밀려와 더는 그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와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버거워 그대로 돌아서는데 도한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가 힘을 주어 그녀를 돌려세웠다.
동시에 사랑이 도한의 뺨을 내리쳤다.
다른 여자와 반지를 나눠 낀 손으로 제 손목을 잡은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그녀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울음이 터져 나오려 해 사랑은 입술을 세게 물었다.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이미 가슴이 무너져 내렸는데 이따위 상처에 아플 리가.
“고마워요. 잊을 수 있게 해 줘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떠오르던 얼굴이었다.
꿈에서라도 듣고 싶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 시간 이후부턴 적어도 그를 그리워하지 않을 거다.
이제야 제대로 된 이별을 한 것 같았다.
사랑은 빠르게 복도를 벗어났다.
발소리가 멀어지다 더는 들리지 않자 도한이 벽에 툭 등을 기댔다.
어느새 왼쪽 뺨이 벌게졌지만 울고 있는 그녀를 보는 것보단 아프지 않았다.
도한은 왼손을 올려 반지를 바라봤다.
커플링이냐고 묻는 사랑의 질문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와 헤어진 다음 날 반지를 맞췄다.
서로의 이름을 새긴 커플링을.
내년 생일에 커플링을 선물로 받고 싶다던 사랑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책 없이 반지를 맞추고 혼자 끼고 다녔다.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고 하겠지만 그런 것쯤은 상관없었다.
온종일 그녀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들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도한은 반지에 각인된 이름을 매만졌다.
Love.
주문서에 여자 친구 이름을 사랑이라고 적자 직원이 추천해 준 표기였다.
“이사랑.”
나지막하게 읊조린 그가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더는 나를 좋아하지 않겠지.
더 이상 나는 이사랑의 세상 전부가 아니겠지.
도한은 사랑에게 쓰레기 같은 놈이 된 것보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야 한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