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여기서 그만하자 (39/63)


#38화. 여기서 그만하자
2023.05.12.


혜리는 오늘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학과장과 부모님의 사인만 있으면 간단하게 학교를 그만둘 수 있었다.

입학은 어렵고 힘들기만 했는데 그만두는 건 단 하루면 해결됐다.

휴학을 신청할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4년 후에 복학해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학교를 다니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그녀가 자퇴하겠다고 했을 때 경철은 놀라긴 했지만 찬성했다.

아픈 몸으로 학교에 다니는 딸이 걱정돼 내심 휴학하길 바란 그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혜리의 엄마를 같은 병으로 잃었기에 딸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이제 만족해?”

도한의 차가 집 앞에 멈추자 혜리가 물었다.

사랑의 전화번호도 지웠고 더는 마주칠 일도 없으니 속이 시원하냐고.


“나는 오빠 조건 다 들어줬어.”

그러니 이젠 네 차례라는 듯 혜리가 그에게 시선을 주곤 차에서 내렸다.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도한이 자신을 버렸던 죄를 묻기 위해 그와 사랑을 헤어지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도한으로부터 사과의 말을 들었다.


“미안하다면 다야.”

대문을 앞에 둔 혜리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도한의 차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혜리는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도한이 미웠고 사랑을 위해 자신을 학교에서 치워 버린 그가 괘씸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라 괴로웠다.

혜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이 바뀌었다.

사과를 받았으니 사랑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것과 이제 와서 사과가 무슨 소용이냐며 두 사람을 헤어지게 하겠다는 것.

정반대의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다퉜다.

지금도 마찬가지라 혜리는 머뭇거리며 집에 들어가길 망설여 했다. 그때 도한의 차가 움직였다.

혜리는 저도 모르게 차가 지나간 쪽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사이 멀어진 차는 곧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도한은 학교로 돌아왔다.

해가 길어져 오후 5시가 넘었는데도 하늘이 밝았다.

생기가 넘치는 6월의 캠퍼스를 걸으며 도한은 내일부터 모든 날이 흐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

그는 그만 그녀를 놓아주기로 했다.

아니, 그녀로부터 도망을 치기로 했다.


‘제가 만약 그 상황이면 사촌 오빠를 볼 때마다 도망쳤을 거예요. 끔찍하게 싫어서.’

‘겨우 6학년이 그걸 바라고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무서워요.’

그렇게 말하던 사랑을 보며 도한은 그녀가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버렸다.

사랑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닥칠 테니까.

그녀가 그를 끔찍하게 여기는 것.

모두가 그랬듯 저를 지독한 놈이라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

결국 도한은 사랑이 그런 눈빛을 하기 전에 멀리 도망가기로 했다.

그녀의 옆에서 끔찍이도 싫은 존재로 남는 것과 그녀를 평생 볼 수 없는 선택지 중에서 후자를 택한 것이다.

전자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왔다.

한 번 더 생각을 정리한 그가 정문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저 앞에 사랑과 윤재의 뒷모습이 보였다.

도한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가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이따금 서로를 보며 웃는 두 사람의 얼굴이 참 해맑았다.

둘은 순수함이 닮아 있었고 여전히 잘 어울렸다.

저와 함께 있을 땐 긴장하고 눈치 보던 사랑이 제자리를 찾은 듯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 너는 처음부터 정윤재 옆에 있어야 했어.

그 순리를 거스른 대가가 내일부터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 오빠.”

윤재와 헤어지고 뒤늦게 도한을 발견한 사랑이 놀란 눈을 했다.


“아까 집에 간 거 아니었어요?”

의아함과 반가움이 섞인 얼굴로 그녀가 그에게 달려왔다.

오전에 잠깐 만나기도 했고 한 시간 전에 통화도 했는데, 사랑은 오래전의 일인 것처럼 그를 반가워했다.


“할 얘기가 있어서.”

“저한테요?”

도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랑은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와 다르게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잠깐이면 돼.”

“그럼 카페로 갈까요?”

“그래.”

주위를 둘러본 도한이 근처에 보이는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사랑은 말없이 그를 쫓았다.

손을 안 잡는 것도, 혼자 먼저 앞서가는 것도 그답지 않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사랑은 어쩐지 듣기가 겁이 났다.

카페에 마주 앉아 테이블에 놓인 커피만 바라보길 5분째.

정적을 참지 못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할 얘기 있다면서요. 혹시 주말에 과제 하러 못 가요?”

<연애와 결혼> 마지막 과제를 호텔에서 하기로 했지만 다른 약속이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집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사랑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도한이 어렵게 입을 뗐다.


“못 갈 것 같다.”

“괜찮아요. 리포트 방학 전에만 내면 된다고 했으니까 아직 시간 있어요. 나중에 가요.”

“나중에도, 못 갈 것 같아.”

“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던 사랑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이 그녀가 두 눈을 깜빡였다.

도한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테이블 아래로 내린 두 손에 힘을 꽉 주어 주먹을 쥐었다.


“유학을 가게 됐어.”

며칠 동안 생각해 낸 게 겨우 이거였다.

자신이 말을 하고도 어이가 없어서 도한은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혜리가 곧 미국에서 수술을 해. 수술 후에 치료도 거기서 받게 될 거야. 그래서 아버지하고 나도 같이 가기로 했어.”

사랑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혜리가 수술을 할 정도로 아프다는 것도, 그래서 도한이 떠난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 언제요? 언제 미국에 가는데요?”

곧 수술을 한다는 혜리의 걱정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은 그러지 못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도한이 더 중요했다.


“다음 주.”

“다음, 주요? 그렇게 빨리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랑은 헛숨을 터트렸다.

커피잔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 언제 돌아와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그녀가 물었다.

벌써부터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도한은 도저히 사랑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조금 틀었다.


“안 돌아와.”

“……네?”

사랑의 떨리는 목소리에 그가 다시 그녀와 눈을 맞췄다.

사랑이 저를 마음껏 원망하고 미련 없이 잊을 수 있도록, 도한은 차갑게 이별을 고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황당하고 기가 막히겠지.

나도 납득이 가지 않는데 너는 오죽할까.

도한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이렇게 빨리 사랑의 손을 놓아야 할 줄 알았다면 그녀가 고백했을 때 받아 줄걸.

그보다 내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갈걸.

아니, 애초에 술 취한 신입생에게 어설픈 친절이나 베풀지 말걸.

온통 후회되는 일들뿐이었다.

그중 가장 후회되는 건,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지 않았다는 것.

도한은 혜리 앞에서 사랑의 이름을 내뱉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사랑이 오랜 저주를 풀어 주었지만, 정작 그녀에게는 이름을 불러 줄 수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헤어지자고 하는 주제에 다정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한은 사랑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이사랑’

언젠가는 소리 내어 불러 볼 수 있을까.


‘사랑해, 사랑아.’

너를 마주 보고 네 얼굴을 매만지며 속삭일 수 있는 날이 과연, 내 인생에 주어지긴 할까.

초점 잃은 눈을 한 사랑을 보며 도한은 목까지 차오른 말을 꾹꾹 눌렀다.


“돌아올 수도, 있잖아요. 그건 모르는 거잖아요.”

사랑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한이 헤어지자는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처럼 1년, 또는 2년 후에 그가 돌아올 수도 있을 거라고.


“기다릴게요. 저 기다릴 수 있어요. 전화도 자주 하고 방학 때 제가 오빠 보러 미국에 가도 되고.”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찬 눈물이 기어코 뚝뚝 떨어졌다.

사랑은 몇 번이나 눈가를 눌러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러다 결국은 헤어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하자.”

“아니요. 저는 못 해요. 이렇게 갑자기 그러면…….”

이대로 그와 헤어질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이별은 사랑의 감정이 끝나야 하는 거 아닌가.

여전히 그를 좋아하는데 왜 헤어져야 하는지 사랑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얘기 못 알아들을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도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충격을 받은 듯한 사랑을 보며 그는 이 순간이 진짜 마지막임을 확인했다.


“그럼 알아들은 거로 알고 먼저 가 볼게.”

도한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버리자 사랑은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쫓아가서 그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랑은 이러다 제 눈에 박혀 버린 그가 지워질 것만 같았다.


 

* * *



“그만 마셔. 너 많이 취했어.”

지우가 사랑의 술잔을 빼앗았다.

주말에 과제를 하러 도한과 호텔에 가게 됐다고 긴장과 기대를 번복하더니 그 주말에 사랑은 혼자 집에서 술을 마셨다.

바로 며칠 전에 도한과 헤어졌다면서.

지우는 믿어지지 않아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결국 이럴 줄 알았다며 화를 냈다.

그러다 곧 차라리 잘됐다면서 사랑과 같이 술을 퍼마셨다.


“그래? 나 취했어?”

사랑이 앉아서도 비틀거리며 헤헤 웃었다.


“근데 나 왜 이렇게 멀쩡해? 네가 하는 말도 다 알아듣고 여기가 어딘지도 다 알겠는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기억 못 하겠지.”

“아, 그런 거야?”

사랑은 미처 몰랐던 사실을 안 것처럼 감탄했다.


“그럼 내일이 되면 도한 오빠도 기억 안 날까, 지우야?”

도한의 이름에 인상을 찌푸린 지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놈. 욕이 절로 나왔다.

고작 두 달 남짓 사귈 거였으면서 뭐 하러 마음을 줬나 싶어 그가 괘씸했다.


“시간 지나면 기억 안 나. 그 오빠보다 백배는 더 괜찮은 남자 친구도 사귈 거고.”

누굴 만나도 도한보다 나을 거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지우는 사랑에게 잔을 돌려주었다.

오늘 같은 날 술을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나.

취하기라도 해야 마음이 덜 아프지.


“그러니까 잊어버려. 잊고 지내다 보면 내가 왜 그런 인간이랑 사귀었을까 하는 날이 올 테니까.”

지우가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자 사랑이 한입에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안 잊을래, 지우야.”

두 번째 술병도 벌써 반이나 비워졌다.

이렇게 많이 마신 건 처음이라 사랑은 점점 시야가 희미해졌다.

그런데도 왜 도한의 얼굴은 더 또렷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절대로 안 잊을 거야. 평생 기억하면서 보란 듯이 잘살 거야. 네 말대로 도한 오빠보다 백배는 더 괜찮은 남자 친구도 사귈 거고. 그 남자 친구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들을 거야. 그리고…….”

사랑은 술 한 잔을 더 마셨다.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니 정말 취했나 보다.

오늘까지만 울자.

이 눈물에 지금까지 내 세상이었던 지도한을 떠나보내자.

내일부터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해야 하니까.


“내 이름도 매일매일 불러 달라고 할 거야.”

“이름?”

“그래. 내 이름, 이사랑.”

그가 한 번도 불러 주지 않은 이름.

사귀는 동안, 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와 헤어지던 날까지 단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내 이름.

그의 목소리로 한 번만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이제는 영영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설마 오빠가 네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어?”

사랑이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우의 두 눈이 커졌다.


“말도 안 돼. 진짜 지독하다, 지독해. 어떻게 여자 친구 이름을 안 부를 수가 있어?”

“내가 오빠 여자 친구는 맞았을까?”

“뭐?”

지우가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두 달이 넘게 사귀었으면서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고.


“아니었을 수도 있어.”

“아니면. 아니면 대체 뭐였는데.”

사랑은 조금씩 몸에서 힘이 빠졌다.

눈이 자꾸만 감기고 자신의 말이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글쎄, 뭐였을까. 나는 그 사람한테…… 정말 뭐였을까.”

나를 좋아하긴 했을까.

나한테 진심인 적이 있긴 했을까.

그와 함께 있을 땐 분명 나를 좋아한다고 느꼈었는데, 헤어지고 나니 다 착각이었던 것만 같다.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사랑은 며칠 전부터 손에서 놓은 적이 없는 핸드폰을 켜 통화 기록을 열었다.

맨 위에 도한의 이름이 있었다.

수도 없이 전화를 걸었지만 한 번도 연결된 적 없는 이름.

그녀가 헛웃음을 흘리며 삭제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연락처를 삭제하겠냐고 묻는 화면 앞에서 사랑은 결국 취소에 손을 올렸다.

전화번호를 지운다고 해서 마음에서도 지워질 리가 없었다.

헤어지고 나니까 그가 더 보고만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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