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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나한테 여자는 오직 (38/63)


#37화. 나한테 여자는 오직
2023.05.08.



 
똑똑.

책상 앞에 앉아 시험공부를 하던 혜리는 노크 소리에 손을 멈칫했다.

경철은 늦게 들어온다고 했으니 제 방을 찾아올 사람은 도한밖에 없었다.

그가 왜 방으로 찾아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랑의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혜리는 잔뜩 화가 났을 그를 예상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녀가 문을 열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지독한 성격답게 도한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했다.


“이제 들어오는 거야?”

질문을 무시한 도한이 그녀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혜리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얼굴만 무표정할 뿐 도한의 눈빛은 살벌했다.

그의 시선이 책상에 머물자 혜리가 다가와 그를 마주했다.


“암이고 뭐고, 기말고사가 코앞이니까 공부를 하게 되네.”

당장 수술대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혜리는 평소처럼 일상을 유지했다.

오히려 곧 시험 기간이라는 게 마음 편했다.

해야 할 일이 주어지지 않으면 방에서 혼자 우울하기만 했을 테니까.

그렇게 수술 날짜만 기다리긴 싫었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혜리의 태연한 물음에 도한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곤 입을 열었다.


“전화번호 지워.”

예상보다 더 강력한 한 방에 혜리가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알아냈냐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그건 별로 안 궁금한가 봐?”

“지금 당장 지워. 내 눈앞에서.”

그러지 않으면 핸드폰을 박살 내겠다는 눈으로 그가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혜리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내가 왜? 이제야 좀 오빠 여친이랑 친해졌는데.”

“그럴 필요 없으니까 지우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친해질 필요가 없다니.

혜리는 설마 제 생각이 맞는지 직접 확인했다.


“헤어지겠다는 말이야?”

그러길 바란다고, 그렇게 만들 거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혜리는 도한이 정말 사랑과 헤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것도 이렇게 빨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둘이 같이 있었으면서.


“그래. 그러니까 번호 지워.”

그가 한결같이 사랑의 전화번호를 지우라고 말하자 혜리는 헛숨을 터트렸다.

그렇게도 들키기 싫은 건가.

그날의 일을 그 애가 아는 게 그토록 두려운 거냐고.

도한의 지나친 반응에 혜리는 마음이 더욱 비뚤어졌다.

그냥 사랑에게 전부 말해 버릴 걸 그랬다고 후회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원하는 대로 됐으니, 혜리는 그의 요구 하나쯤은 들어주기로 했다.

그녀가 책상에서 핸드폰을 가져왔다.

주소록을 열어 사랑의 이름을 찾아 삭제 버튼을 눌렀다.

곧 전화번호 하나가 사라졌다.


“지웠어. 이젠 오빠 차례야. 질질 끌지 말고 헤어져.”

혜리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졌다.

바라는 대로 됐는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용건 끝났으면 그만 나가 보라는 말을 하려고 그녀가 몸을 돌리는데 도한이 입을 열었다.


“조건이 하나 더 있어.”

“뭐?”

혜리가 얼굴을 구겼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조건을 운운하는지.

그럴 만한 처지가 아니지 않냐고 황당해하는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학교 그만둬.”

“뭐라고?”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면 수술하고 다른 학교 들어가.”

“오빠 지금 뭐라는 거야?”

혜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한 역시 저 때문에 다니던 대학을 자퇴했으니 똑같이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도한의 말은 그녀의 추측과 달랐다.


“굳이 그 학교에 다녀야겠다면 4년 후에 다시 입학해.”

“오빠.”

“일반 휴학은 3년까지 가능하고 질병으로 인한 휴학은 별도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알아보고 4년 후에 복학하든지.”

혜리는 도무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왜 4년 동안 내가 학교에 다니면 안 되는데?”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이사랑 때문에 그래? 그 애 졸업할 때까지 나랑 마주치는 일 없게 하려고?”

말도 안 된다고 여겼지만 그의 침묵이 답을 말해 주고 있었다.

혜리는 가만히 저를 내려다보는 도한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사랑을 배려하는 그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얼마나 만났다고.

고작 몇 개월 사귄 여자 친구를 위해 동생한테 학교를 그만두라니.

몸에 암세포가 있어도 1학기는 마치고 싶다고 했던 혜리는 도한에게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동정심마저 주지 않는 그가 죽을 만큼 미웠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 줘야 하는데? 싫어. 나는 앞으로도 우리 학교 다닐 거야. 오빠도 그냥 계속 그 애 만나. 절대로 헤어지지 말고.”

혜리는 그딴 조건 들어주지 않고도 두 사람을 헤어지게 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적어도 사랑이 도한을 끔찍하게 바라보게 할 수는 있었다.

저를 버렸던 사람이 사실 지도한이라고 말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지지 않을 기세로 혜리가 두 눈을 부릅뜨는데 도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 조건 들어주지 않으면.”

일말의 동요도 없는 그를 보며 혜리는 흠칫 놀랐다.

그가 무슨 말을 이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네가 지금껏 공황 장애라고 연기해 온 거, 아버지한테 얘기할 생각이야.”

“……뭐?”

순간 혜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책상에 손을 짚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버티기 힘들었는지 결국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지러움이 잦아들자 그녀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오빠는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동정심조차 주지 않았던 거구나.

혜리의 입에서 허탈한 숨이 흘러나왔다.


“언제부터 알았어?”

처음부터 거짓은 아니었다.

그가 그녀를 버렸던 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혜리는 한동안 불안 증세를 보였다.

그러다 발작이 있었고 병원에서 소아 공황 장애 진단을 받았다.

어린 나이라 약물 대신 꾸준한 심리 상담으로 치료를 받았고, 부모님의 노력이 더해져 완치에 가깝게 공황 장애를 극복했다.

하지만 엄마가 떠나고 나서부터 그녀는 다시 불안감을 호소했다.

경철과 도한은 엄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공황 장애가 재발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다시 병원으로 찾아가 약을 처방받았다.


“너 고2 때.”

“어떻게……?”

“네가 학교 가고 나서 아버지가 나한테 심부름을 시키셨어. 너한테 용돈 주고 오라고. 오늘 문제집 사야 한다고 했다면서. 그래서 바로 나갔는데 네가 골목을 지나자마자 쓰레기통에 약을 버리고 있었어.”

뜯지도 않은 채 줄줄이 이어진 약봉지 한 뭉치가 버려진 걸 보고 도한은 그녀가 아프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정말 세상에 비밀은 없네.”

그를 올려다보는 혜리의 두 눈에 허무감이 밀려들었다.

모두를 속일 만큼 완벽하게 연기해 왔다고 자부했는데 꽤 오래전에 들키고 말았다.


“그래. 나 지금까지 오빠랑 아빠 앞에서 공황 장애인 척했어.”

“대체 왜.”

“왜냐고?”

혜리는 원망 섞인 눈빛으로 도한을 쳐다봤다.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들이 억울하고 비참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빠가 사랑한 건 내가 아니라 엄마니까! 아빠가 날 이뻐한 건 엄마한테 사랑받고 싶어서잖아. 단지 엄마의 관심을 사기 위해서. 근데 그런 엄마가 죽었어. 아빠는 더 이상 날 아낄 이유가 없어졌다고. 그래서 그랬어. 불쌍하게라도 보이려고. 그래야 아빠랑 오빠가 날 안 버릴 거 같아서!”

악을 쓰는 그녀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혜리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갑자기 가슴이 답답한 척 굴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고도 하고 때론 발작을 연기하기도 했다.

자신을 버렸던 도한이 죄책감을 갖고 달라졌듯, 엄마의 죽음이 저를 동정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아빠한테 여자라도 생기면, 그 여자랑 같이 살기라도 하면 그때 나는 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니까.”

경철이 만약 재혼하게 된다면 더는 그의 딸로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친자식도 아닌 그녀를 경철의 새 부인이 받아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유치하게도 공황 장애를 연기하는 것이었다.


“아버지한테 여자는 평생 한 분이야.”

“아빠도 남자야. 오늘이라도 당장 다른 여자 데려올 수도 있는데 오빠가 그걸 어떻게 장담해?”

혜리는 아무리 경철이 엄마를 끔찍이 사랑했다 해도 언젠가는 그 마음이 끝날 거라 여겼다.

영원한 사랑 같은 건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도한을 똑바로 바라본 혜리의 두 눈이 오빠도 동의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 아들이니까.”

“뭐?”

“한 여자한테 집착하는 거. 아버지를 닮은 내가 지금 그러고 있으니까. 그래서 장담해.”

순간 해맑게 미소 짓는 사랑의 얼굴이 혜리의 머릿속을 스쳤다.

동시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에 헛숨이 터져 나왔다.


“오빠, 설마 그 신입생 얘기하는 거야? 겨우 몇 개월밖에 안 만났으면서 평생 그 애를 사랑하기라도 할 거라는 말이냐고.”

고작 스무 살짜리 애를 죽을 만큼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건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 혜리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도한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방 안에 내려앉았다.


“나한테 여자는 오직.”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혜리는 잠깐의 정적도 견딜 수 없을 만큼 긴장감에 휩싸였다.

곧 큰 파도가 저를 덮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는데 마침내 도한이 말했다.


“이사랑이야. 앞으로도 영원히.”

혜리는 바닷속에 잠긴 듯 귀가 먹먹했다.

사랑이라는 말을 내뱉지 못하는 그가 사랑의 이름을 얘기하자 지금 이 공간이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아버지한테 친자식은 의미가 없어. 그저 재수 없는 놈일 뿐이지. 그러니까 아버지가 널 버릴 일은 없다고. 아버지한테 너는, 자신이 평생을 사랑한 여자가 남겨 놓은 선물이니까.”

혜리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그녀는 엄마가 죽은 후 경철에게 짐 같은 존재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동정심이라도 얻어 어떻게든 경철의 가족으로 남고 싶었다.

이 세상에 핏줄이라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 힘겨운 노력의 순간들이 눈앞을 스쳐 혜리는 울컥하고 말았다.


“그런 아버지에게 실망을 안기고 싶지 않으면 내 조건 명심해.”

조금 전의 대화를 상기시키는 도한을 보며 혜리는 헛숨을 흘렸다.

잠깐이나마 그에게 감동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오빠, 진짜 지독하다. 암에 걸린 동생이 1학기는 마치고 싶다는데 학교를 그만두라는 말이 나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냐는 그녀의 눈빛에도 도한은 여전히 무감해 보였다.


“너는 지금 멀쩡하지만.”

그랬던 그의 표정이 변했다.

뭔가에 찔린 듯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 애는 곧, 많이 아플 테니까.”

힘겹게 말을 마친 도한이 그만 발을 움직였다.

혜리는 방을 나서려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저보다 사랑을 챙기는 그가 미워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마음이 복잡해진 그녀가 오늘따라 황량해 보이는 도한의 넓은 등을 바라봤다. 순간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혜리는 도한이 또 무슨 말을 할지 바짝 긴장했다.

지금 바로 대답을 하라는 건가.

당장 내일 학교를 자퇴하겠다는 확답이 필요한가.

그런 말들을 예상하는데 그가 말했다.


“미안해.”

혜리의 두 눈이 쏟아질 듯 커졌다.

환청을 들은 것만 같았다.

절대로 도한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라 믿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니. 뭐가? 대체 뭐가?

학교를 그만두라고 해서?

아니면 동생으로 받아 주지 못해서?

혜리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날, 네 손을 놓아서. 그곳에 널 혼자 두고 와서.”

그녀의 눈에서 순식간에 눈물이 쏟아졌다.

차오를 새도 없이, 고일 새도 없이 많은 눈물이 밀려들어 두 눈에 담지도 못하고 주르륵 쏟아 냈다.


“미안하다.”

멈추지 않는 눈물에 혜리는 결국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누군가 가슴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그날의 일을 언급한 적 없는 그였다.

그녀 역시 사과를 바란 적이 없었다.

자신을 버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누가 봐도 도한에게 그녀는 내다 버리고 싶을 만큼 미운 상대였으니까.

그런데 미안하다니.

13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갑자기 왜.

잘못을 인정할 거면 진작에 사과를 했어야지.

이 모든 게 부모님 때문이라고 마음에 증오심만 가득 채우기 전에.

혜리는 미안하다는 그의 한마디에 또다시 버림받을까 두려워했던 여덟 살로 돌아가 울부짖었다.

도한은 그런 그녀를 멀리 떨어져서 바라만 봤다.

다가가서 등을 토닥여 줄 자신은 아직 그에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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