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용서할 기회
(37/63)
36화. 용서할 기회
(37/63)
#36화. 용서할 기회
2023.05.05.
“다음에 또 봐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나온 혜리가 학생 회관 앞에서 사랑에게 인사를 전했다.
“네. 그럼 저는 가 볼게요.”
사랑은 다음 수업을 위해 도한을 남겨 두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대화를 나눈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사랑은 혜리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친하게 지낼 정도로 마음을 연 건 아니었지만 질투와 미움은 어느 정도 사라진 상태였다.
친남매가 아니라고 그동안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던 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녀가 멀어지자 혜리가 도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도 가 볼게.”
혜리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데 도한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따라와.”
다시 뒤돌아 도한을 마주한 혜리는 방금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수업 있어. 할 얘기 있으면…….”
이따 집에 가서 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도한이 듣지도 않고 그녀를 지나쳤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 혜리는 순순히 뒤를 따랐다.
강제로라도 끌고 갈 눈빛이었다.
그가 멈춰 선 곳은 대운동장이었다.
축제 때나 사람이 모이는 장소라 평소엔 인적이 드물었다.
오늘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혜리는 도한이 자신의 손을 놓았었던 한적한 시골길을 떠올렸다.
바람이 차가웠었던 과거와 달리 날이 더운 것만 빼면 그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원하는 게 뭐야.”
냉기가 흐르는 도한의 목소리에 혜리는 예전 기억을 떨쳐 냈다.
그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도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건드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사랑에게 접근하는 것.
그녀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
그래서 그녀가 도한을 끔찍하게 여기는 것.
그 종착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감지했을 테니, 지도한이 이토록 불안해하는 거겠지.
혜리는 만족스러우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바라는 게 뭐냐고.”
도한은 화가 치밀어오르는 걸 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흥분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게 혜리가 원하는 바일 것 같아 뜻대로 해 주고 싶지 않았다.
“글쎄. 내가 바라는 거라…….”
혜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딱히 바라는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은 곧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도한은 연애나 하고 있는 모습이 그저 싫을 뿐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앞에서는 동생을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온통 사랑을 담은 그의 눈빛이 거슬려서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잠깐의 정적 끝에 혜리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오빠가 그 신입생이랑 헤어지는 거?”
그 정도라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아 혜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 애가 오빠하고 내 사이를 의심하는 것 같던데. 내가 오빠 좋아한다고 하면 두 사람 헤어질 수 있을까?”
“너 나 좋아해서 이러는 거 아니잖아.”
그렇게라도 보여서 도한의 관심을 끌고 싶었던 혜리는 그마저도 틀려 버리자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둘이 헤어졌으면 좋겠어.”
“그래서 네가 얻는 게 뭔데.”
“오빠도 뭘 얻고자 날 버렸던 건 아니잖아.”
그 순간 도한은 누군가 제 머리를 세게 강타한 것만 같았다.
두 다리에 힘이 빠져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빠가 미워서, 그런 아빠가 사랑하는 여자의 딸인 내가 꼴도 보기 싫어서. 그래서 내 손을 놓았겠지.”
그가 오른손을 말아 주먹을 꽉 쥐었다.
여덟 살의 혜리를 버리고 왔던 그때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몰랐는데, 나중에 좀 크고 나니까 알겠더라고. 오빠가 왜 나를 버렸는지.”
흐린 미소를 띤 혜리가 말을 이었다.
“그게 아빠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방법이었던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못 보게 하는 거.”
혜리는 그 사실을 깨닫고 도한을 이해했다.
그가 왜 자신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는지, 왜 그때 우는 저를 내버려 두고 그토록 필사적으로 뛰었는지.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그날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혜리는 지금이라도 제 상처를 보상받길 원했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래서 나도 오빠를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하려고. 오빠가 그 애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바라는 걸 얘기했으니 이제 가 보겠다는 듯 혜리가 돌아섰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져 더 이상 들리지 않자 도한은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저는 얼마든지 망가져도 좋았다.
사랑과 헤어져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던 예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원래부터 그런 놈이었으니 상관없었다.
그녀가 미치도록 그립고 죽을 만큼 보고 싶겠지만 견딜 수는 있었다.
하지만 사랑이 저를 경멸한다면 그것만큼은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경철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이 저를 보며 착한 척 위선 떤다 여기고, 지독하다며 치를 떤다면 살아갈 힘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고 헤어질 수도 없었다.
상대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가 어떻게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도한은 어떤 결정도 내릴 수가 없었다.
* * *
“오빠.”
집에 가는 길에 사랑이 도한을 불렀다.
조금 전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온 사랑은 도한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살짝 놀랐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집에 데려다주고 싶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뜬금없지만 기분은 좋았다. 사랑은 도한의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걸으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런데 그는 듣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기분이 별로인지 표정도 좋지 않았다.
사랑은 제 목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다시 한번 불렀다.
“오빠.”
그제야 도한이 그녀에게 시선을 내렸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
“내가 하는 말 하나도 안 들은 거 같은데.”
“들었어.”
사랑이 못 믿겠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도한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들었다는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오늘 점심 지우랑 공대에서 먹었고. 이제 곧 기말고사라 도서관에 사람이 많아서 자리 잡기 힘들었고. 며칠 전에 우리 학교에서 광고 촬영을 했다는데 연예인을 못 봐서 아쉬웠고.”
뭐 하나 빠진 게 없어 사랑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랑 같이 있으면서 왜 다른 생각을 하느냐고 삐진 척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계획이 어긋나 버렸다.
듣기 능력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넘어가려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혜리 언니인데요?”
“……뭐?”
두 눈을 키운 도한이 우뚝 발을 세웠다.
설마 박혜리를 말하는 건가 싶어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사랑은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 전화 받기 괜찮아요?
“네. 집에 가는 길이에요.”
마치 잘 아는 사람과 통화하는 듯한 사랑의 모습에 도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혜리가 사랑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으며, 지금껏 무슨 얘기를 했는지 불안하기만 했다.
- 오빠가 전화를 안 받아서요. 혹시 같이 있나 해서.
“옆에 있는데, 바꿔 드릴까요?”
- 아니에요. 그냥 말만 좀 전해 줘요. 먼저 집에 가겠다고. 친구가 데려다준다고 해서요.
“아, 네. 알겠어요.”
- 미안해요. 귀찮게 전화해서.
괜찮다는 말로 통화를 마친 사랑이 도한에게 혜리의 말을 전했다.
“친구가 데려다준다고 먼저 집에 가겠대요. 오빠가 전화를 안 받아서 나한테 했다고…….”
도한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역시나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혜리가 의도적으로 사랑에게 전화를 했다는 걸 확인한 그는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부터 둘이 연락했어?”
“전에 아이스크림 같이 먹었던 날이요. 그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안 받았더니 메시지를 보냈더라고요. 오빠한테 내 번호 물어봤다고. 나중에 혹시라도 오빠랑 연락 안 되면 전화해도 되냐고 하던데요?”
사랑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도한과의 사이를 질투했을 정도로 혜리를 신경 쓰는 거 뻔히 알면서, 제게 말도 없이 전화번호를 준 그에게 조금은 섭섭했다.
“미안. 진짜로 연락할 줄은 몰랐어.”
도한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알려 주지 않았다고 하면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전화 와도 받지 마. 일일이 상대해 줄 필요 없어.”
“어떻게 그래요. 그리고 자주 연락 오는 것도 아니에요. 그날 이후로 오늘 처음 전화한 거예요.”
도한은 이런 일을 사전에 막지 못해서 사랑에게 미안했다.
혜리가 무슨 수로 사랑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지금의 전화는 그를 향한 경고였다.
사랑과 헤어지지 않겠다면 혜리가 직접 나서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도한은 눈앞의 사랑이 벌써부터 아련했다.
이제 그만 결정을 내릴 때였다.
도한은 충동적으로 사랑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말하기로 했다.
그땐 너무 어렸고 아버지가 미웠고 지금은 후회한다고.
사랑이 혜리로부터 모든 사실을 듣기 전에 그가 나서서 먼저 해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근데 그 사촌 오빠 말이에요.”
순간 도한의 온 신경이 뻣뻣해졌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리 사촌이라고 해도 어떻게 동생을 버리고 올 수가 있어요?”
사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쓰자 도한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까…….”
어린 나이에 저지른 실수였다고 변명하려 했지만 사랑은 고개를 저었다.
“6학년이면 다 알 나이예요. 시골길이었다잖아요. 계획적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고요.”
도한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인적이 드문 곳을 미리 알아보고 혜리와 함께 학교에 가는 척 집을 나와 버스를 탔으니까.
열세 살치고는 치밀하게도 세운 계획이었다.
“실종됐으면 어쩔 뻔했는지. 겨우 6학년이 그걸 바라고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무서워요.”
사랑은 치가 떨린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면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아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잘살고 있어요?”
피해자인 혜리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가해자는 멀쩡히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사랑은 혜리가 안쓰러워 얼굴도 모르는 그 사촌 오빠라는 사람이 벌을 받길 바랐다.
“글쎄.”
도한은 겨우 대답을 마쳤다.
그 한마디를 뱉어 내는데 목에서 통증이 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잘살고 있느냐고.
글쎄.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잘살든 못살든 당사자한테 사과는 꼭 했으면 좋겠네요.”
“그런다고 용서받을 수 있을까.”
도한은 혜리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괜찮다는 대답을 종용하는 것만 같아서.
자신은 그럴 자격도 없다고 여겨 왔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에 미안하다는 말을 감히 꺼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용서받는 게 중요해서가 아니에요.”
도한은 조금 놀란 눈으로 사랑을 바라봤다.
그럼 뭐가 중요하냐고 묻고 싶었다.
“혜리 언니에게 용서할 기회를 주는 게 중요하지. 그마저도 안 하면 그 사람은 진짜 나쁜 사람인 거예요.”
용서할 기회.
도한은 머릿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혜리에게 사과했더라면 나를 용서했을까.
나를 미워하지도, 사랑과 헤어지길 바라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몹쓸 병에 걸리지도 않았을지.
도한은 사랑의 집 앞까지 걸어오는 내내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지우랑 마트 가기로 해서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은데 어쩌죠.”
사랑은 도한과 함께 있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선약이 우선이었기에 그를 그만 보내야 했다.
“괜찮아.”
“그럼 내일 봐요.”
환하게 미소 짓는 그녀가 인사를 전했지만 도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돌아서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랑이 왜 그러냐는 얼굴로 도한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곧 그가 말했다.
“한 번만, 안아 주고 가.”
깜짝 놀란 사랑은 몇 번이나 두 눈을 깜빡였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안고 싶으면 언제 어디서든 안고, 키스하고 싶으면 느닷없이 입술부터 내리던 그였다.
그런데 안아 달라니.
사랑은 믿을 수가 없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곤 도한을 향해 팔을 벌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는 지금 위로가 필요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사랑은 도한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도한도 사랑을 제 품에 가득 담았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온기를, 향기를 기억하려는 것처럼 그는 그녀를 오래도록 놓아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