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궁금하지 않아? (36/63)


#35화. 궁금하지 않아?
2023.05.01.


집 앞에 주차한 도한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7시 40분.

조금 전 사랑과 저녁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을 뿐인데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경철이 집을 비우는 날이어서 그는 혼자 있을 혜리가 신경 쓰였다.

한 달 전이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

그가 이따금 시계를 쳐다보자 사랑이 그만 일어나자며 도한의 손을 이끌었다.

오늘 같이 저녁도 먹고 커피도 마셔서 너무 좋았다고 밝게 웃는 그녀를 보며 도한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도 그녀에게 소홀할 날들이 많을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도한이 핸드폰을 들어 사랑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했어.]

집에 들어가면 연락을 달라던 그녀의 말을 잊지 않고 따르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벌써요? 나도 이제 막 들어왔는데.]

[여태 뭐 하고.]

도한은 사랑을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그녀가 학교 정문에서 헤어지자고 했다.

학교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둔 그를 배려해서 사랑이 혼자 가겠다고 한 것이다.

도한은 주차장까지 걸어가느라 그녀와 헤어지고 40분이 지나서야 집에 도착한 저와 달리 사랑은 왜 이제야 들어갔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메시지는 읽었는데 그 후로 말이 없어 도한이 사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메시지 창을 열어 놓고 잠깐 자리를 비운 게 아닐까 생각이 들려던 찰나 통화가 연결됐다.


- 네.

“대답이 없어서.”

- 아, 그게…….

사랑이 말하길 주저하자 자연스레 도한의 호기심이 일어났다.


“뭐 했는데.”

학교 정문에서 곧바로 집에 갔으면 20분이 걸린다. 나머지 20분 동안 뭘 한 거냐고 묻자 사랑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 오는 길에 친구를 좀 만나서요.

도한은 친구라는 말에 누군가를 짐작하곤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정윤재?”

- 어? 어떻게 알았어요?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그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랑이 왜 답을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둘이 만날 때마다 대놓고 싫어했으니 숨길 만도 했다.


“만나서 뭐 했어?”

- 그냥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 먹었어요.

“아이스크림 하나 먹는 데 20분이나 걸렸네.”

- …….

“정윤재가 너 집까지 데려다주고?”

- 친구 집에 가는 길이라고 해서요. 일부러 데려다주려고 온 게 아니라.

“어쨌든 같이 갔다는 거고.”

- ……네.

사랑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도한은 질투를 하는 자신이 한심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비뚤어진 마음은 여전히 이어졌다.


“내일은 나랑 먹어.”

-네?

도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거리고 있을 그녀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헤어진 지 40분밖에 안 됐는데 벌써 보고 싶었다.

그대로 차를 몰고 사랑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나하고는 먹은 적 없잖아. 아이스크림.”

도한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유치해질 수 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태훈이 옆에 있었으면 뭐라고 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헛숨이 터져 나왔다.


- 알겠어요. 내일 같이 먹어요.

당혹감과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로 사랑이 달래듯이 말하자 도한은 그제야 수치심이 밀려왔다.


“내일 봐, 그럼.”

- 네.

더는 통화를 이어 가기가 힘들어져 그가 전화를 끊었다.

도한은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주위를 둘러봤다.

스물여섯이나 먹고 별짓을 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집 안이 고요했다.

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주방에서만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도한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혜리가 식탁 앞에 앉아 있어 저녁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했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맥주캔이었다.


“일찍 왔네. 밤에야 올 줄 알았는데.”

그녀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캔을 입에 가져가자 도한이 홱 낚아챘다.


“미쳤어?”

다음 달에 수술대에 오를 환자가 이게 무슨 짓이냐며 그가 남은 맥주를 개수대에 버렸다.

식탁엔 빈 캔이 하나 더 있었다.

도한은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났다.

경철에게서 재수 없는 놈이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이 집에 다시 들어온 건, 혜리가 무사히 수술을 마쳤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죄책감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안쓰러움도 있었다.

이제 겨우 스물하나에 큰 수술을 앞둔 동생.

어쨌거나 가족으로 묶인 사이였으니,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나름 잘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술이라니.

도한은 제 몸 하나 챙기지 않는 혜리에게 실망스러웠다.

지금껏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곳에서 버틴 건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못 마실 테니까 마지막으로 먹은 거야. 아빠도 안 계시고 해서.”

혜리의 변명에 도한이 헛숨을 터트렸다.

이미 마셔 버린 술을 어찌할 수도 없었다.

기가 막혀 방으로 올라가려는 그를 혜리가 불러세웠다.


“오빠.”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를 향했지만 혜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한과 눈을 맞췄다.


“그 신입생 이름이 이사랑이야?”

순간 그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것만으로 혜리는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우리 엄마랑 이름이 같네.”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신기하다. 이름이 같은 것도, 그 이름을 가진 애를 오빠가 좋아한다는 것도.”

혜리는 도한이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자신의 엄마 이름 때문이라는 것도.

경철이 집착에 가깝게 사랑한 여자, 채사랑.

그런 아버지가 미워서 그 여자의 딸인 저를 버린 주제에, 도한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좋아한다는 게 혜리는 우스웠다.


“뭐라고 불러? 사랑아? 오빠가 사랑한다는 말도 해?”

그렇게 부르고 말을 하는 도한이 상상이 가지 않는지 그녀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도한은 그녀의 질문을 무시해 버리고 돌아섰다.


“그 애도 알아? 오빠가 열세 살 때 동생을 내다 버린 거.”

몇 걸음 걷던 그가 멈칫 발을 세웠다.

도한이 천천히 몸을 돌리자 혜리가 싱긋 웃었다.


“모르나 보네. 내가 오빠 동생이라는 건 말을 했다기에 그것도 얘기했을 줄 알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도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혜리는 그런 그가 마음에 드는지 좀 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대신해 줄까 싶어서.”

“네가 왜.”

“그 애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자기 남자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지독한 인간인지…….”

도한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혜리는 알고 있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혜리가 사랑에게 사실을 얘기할 것 같아 도한은 심장이 차가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를 비웃듯 혜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궁금하지 않아? 그걸 알고도 그 애가 여전히 오빠를 좋아할지.”

그녀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도한을 바라봤다.

초점을 잃은 두 눈, 얼어붙은 얼굴.

바라던 모습이었지만, 겨우 이 정도로 눈빛이 흔들리는 그를 마주하니 혜리는 기분이 별로였다.

도한이 그만큼 사랑을 좋아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결국 그의 진심만 확인한 꼴이 되고 말았다.

혜리는 씁쓸한 웃음을 짓고서 그를 지나쳤다.

그녀가 사라지자 도한이 숨을 토해 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 목을 쥐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숨통을 조이려는 손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도한은 그 손의 주인이 혜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사랑일 수도.

만약 그렇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기에 도한은 불안했다.

사랑을 잃으면 그에게 남는 건 지독한 모습밖에 없을 테니까.

* * *

올해 첫 폭염 주의보가 내렸다.

사랑은 학생 회관 앞에 서서 한낮의 따가운 햇볕을 쬐었다.

아이스크림을 먹기에 더없이 좋을 날씨였다.

어제 도한이 자기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해서 사랑은 그를 기다리는 중이다.

투정을 부리는 듯한 도한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라 그녀의 입에서 웃음이 나왔다.

그사이 그가 앞에 나타났다.

도한을 직접 마주한 사랑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전화로 질투를 하던 남자 친구가 맞나 싶었다.

정말이지 얼굴로는 감정을 읽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왜.”

그의 말투 또한 딱딱해서 사랑이 미간을 좁혔다.

누군지 몰라도 별명 하나는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땐 영락없는 지독한이었다.


“어제 제 남친이 자기랑은 아이스크림 안 먹었으면서 다른 남자랑 먹었냐고 막 질투를 했거든요. 그래서 ‘아, 이 남자가 나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싶었는데 그 남친이 오늘은 저를 처음 보는 후배 보듯 해서요.”

그래서 좀 쳐다봤다는 말에 도한이 피식 웃었다.


“막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질투를 하긴 했지만 그렇게 표현할 정도는 아니지 않았나.

도한은 사랑의 손을 잡고 학생회관 안으로 들어서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처음 보는 후배 보듯 한다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오늘 이사랑은 더 예쁘기만 해서 아이스크림보다 그녀의 입술이 더 먹고 싶어졌으니까.


“그게 포인트가 아니라고요.”

“그럼 다른 남자가 포인트인가?”

“처음 보는 후배. 그거죠. 아니, 무슨 한국대도 합격한 사람이 그걸 몰라.”

 

 
사랑이 입을 삐죽 내밀자 그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럼 아이스크림 말고 다른 거 먹으러 갈까?”

“다른 거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며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한은 대답을 알려 주듯 사랑의 입술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눈빛으로 입술을 쓱 훑고 고개를 조금 비틀어 그 입술을 집어삼키는 상상을 했다.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사랑이 흠칫 놀라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입술이 닿은 것도 아닌데 도한의 눈길만으로도 키스를 한 것 같았다.

사랑은 조금 전 햇볕 아래 있을 때보다도 몸이 뜨거워져 얼른 가게 안으로 그를 이끌었다.

달아오른 열기를 식힐 수 있는 건 아이스크림밖에 없었다.


“나랑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면서요. 다른 건 다음에 먹고 오늘은…….”

당황한 그녀가 주문부터 하려고 발걸음을 서두르다 갑자기 멈춰 섰다.

도한이 무슨 일인가 싶어 사랑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진열대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여자들 사이에 혜리가 있었다.

도한은 어제 혜리가 했던 말들이 떠올라서 사랑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혜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반가워하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자주 보네요.”

혜리의 인사에 사랑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도서관 광장에서 도한과 키스를 나누는 걸 혜리가 봤을 터라 사랑은 얼굴을 붉혔다.


“오빠랑 사귄다면서요?”

“……네.”

전에는 아니라고 했는데, 다시 그렇다고 하는 것도 어쩐지 부끄러워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셋이서 밥 한번 먹고 싶은데 오빠가 싫어할 거 같고.”

혜리는 웃으며 도한을 한번 쳐다보곤 사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잠깐 아이스크림 같이 먹는 건 괜찮죠?”

“박혜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한이 나서자 난처함은 사랑의 몫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팽팽해져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의 날카로운 눈길이 혜리를 향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만 주시했다.


“안 돼요? 나랑 있는 거 불편해요?”

도한이 밖으로 나가 버리려고 사랑의 손을 잡아끌자 그녀가 힘을 주며 버텼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 먹을 시간 동안 같이 있는 건데 거절하는 것도 이상했다.

남자 친구의 여동생과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니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각자 주문한 아이스크림을 컵에 담아 온 그들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사랑은 고민되었다. 그때 혜리가 먼저 대화를 이끌었다.


“남자 친구 있으니까 좋아요?”

사랑은 옆에 앉은 도한을 힐끔거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뭐가 그렇게 좋은데요?”

“그냥 뭐, 같이 다닐 수 있고 주말에도 만날 수 있고…….”

“그런 건 친구와도 할 수 있는 건데.”

혜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이번엔 사랑이 물었다.


“남자 친구 없으세요?”

마치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는 혜리의 얼굴에 사랑이 의아해했다.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남자 친구가 없는 건지 그녀야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제가 남자를 좀 무서워해서요.”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그런 걸 물을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사랑은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혜리가 입을 뗐다.


“어렸을 때 사촌 오빠가 저를 어느 시골길에 버리고 왔거든요. 내가 싫다고.”

그 순간 도한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눈앞이 잠시 깜깜해졌다.

손끝이 떨리고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겨우 고개를 돌려 혜리를 바라봤다.


“어떻게 그런…….”

사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혜리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사람이 저를 파출소로 데려가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큰일 날 뻔했는데.”

“그러게요. 그래서 저는 남자가 좀 무서워요. 아직도 그 오빠를 보면 그때가 떠오르기도 하고.”

사랑은 도한이 왜 그렇게 혜리를 챙기는지 알 것 같았다.

자세한 사정도 모르고 다 큰 동생을 꼭 집까지 직접 데려다줘야 하는지 질투를 했던 게 미안해지고 말았다.


“오래전 일인데 지금껏 이런다는 게 바보 같죠?”

혜리가 자신이 한심하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짓자 사랑이 당황해했다.

충격적인 사건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는데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아니에요. 저라도 그럴 것 같아요. 제가 만약 그 상황이면 사촌 오빠를 볼 때마다 도망쳤을 거예요. 끔찍하게 싫어서.”

혜리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며 사랑에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눈을 옮겨 도한을 바라봤다.

살짝만 건드려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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