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너랑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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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너랑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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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너랑 같이
2023.04.28.
도한은 원룸을 정리하고 경철의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가끔이라도 그곳에 가서 사랑을 볼 수 있게끔 원룸을 아예 처분하진 않았다. 당분간은 방이 필요한 후배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이사에 사랑이 많이 서운해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혜리와 같은 대학에 들어온 이상 그녀에게 모든 걸 맞춰야 했다.
혜리가 아프기까지 해서 도한은 더욱 신경을 써야만 했다.
경철이 말한 대로 빚 갚는 심정으로.
하지만 그를 힘들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사랑이 보고 싶을 때 곧바로 달려갈 수 없다는 것.
도한은 전화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당장이라도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깐만 보고 올까.”
그가 제 방 침대에 누워 중얼거릴 때 핸드폰이 반짝였다.
도한은 몸을 일으켜 메시지를 확인했다.
사랑이 지우와 저녁을 먹고 있다며 사진 한 장을 보내 왔다.
지우가 찍어 줬는지 사진 속 사랑은 양손에 숟가락과 포크를 쥐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던 도한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갑자기 침대에서 내려왔다.
책상 위에 핸드폰을 툭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오빠.”
이어서 혜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한은 아쉬움이 묻은 손으로 열었던 옷장 문을 다시 닫곤 방문을 열어젖혔다.
“왜.”
혜리는 문 앞에서 저를 막아서는 도한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여자 친구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원룸에도 못 들어가게 하더니 이 방에도 마찬가지였다.
혜리가 찾아올 때마다 도한은 늘 문 앞에 그녀를 세워 둔 채 대화를 했다.
“아빠가 내려오래. 오늘 병원에 갔다 온 거 물으시려나 봐.”
도한과 혜리는 오후에 대학 병원을 다녀왔다.
혜리가 일주일 전에 다시 검사를 받았던 곳이었다.
의사는 검사 결과를 보더니 위암 초기라고 했다.
보통 위암은 단순한 소화 장애로 여겨 조기 진단이 어려운데, 빨리 검사를 받아 다행이라고도 했다.
의사는 책상에서 사람의 장기 중 위를 표현한 모형을 가져와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덧붙였다.
암을 둘러싼 부위의 3cm 정도를 절제해야 하고 림프절 전이 여부는 수술을 진행해 봐야 알 수 있다고.
그 외 수술 후 재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항암 치료를 실시하게 되며, 초기일 경우 완치율이 90% 이상일 정도로 생존율이 높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도 건넸다.
“수술 날짜랑 뭐 이것저것.”
수술은 두 달 후였다.
도한은 병원에서 지정해 준 날짜에 수술을 예약하고, 수술 전 검사일도 예약을 잡았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갔을 뿐인데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미뤄서 좋을 건 없었으니, 도한은 의사와 간호사의 말을 따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오빠가 아빠한테 말 좀 해 줘.”
“그래.”
병원에서 혜리가 무슨 정신이 있었을까 싶었던 도한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서 나온 그가 1층 거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혜리도 그를 따라가려다 문득 도한의 방에서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려 멈춰 섰다.
잠시 망설인 그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서 핸드폰이 계속해서 웅웅거렸다.
혜리는 발신인이 ‘이사랑’임을 확인하고서 이름 밑에 적힌 전화번호에 시선을 주었다.
만약 이사랑이 도한의 여자 친구라면, 언젠가 이 전화번호가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 * *
사랑은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뛰쳐나왔다.
도한과 도서관 광장에서 만나기로 해 마음이 급했다.
이사한 후로 그는 해가 지기 전에 혜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찍 들어가는 이유를 묻자 혜리가 몸이 안 좋아서 아버지가 걱정이 많다고 했다.
평소에도 자주 아파서 도한을 찾아왔던 혜리였었기에 사랑은 쉽게 수긍했다.
이것마저 질투를 하면 도한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집착이라고 스스로에게 경고하기도 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사랑이 걸음을 서둘렀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도한과 같이 있고 싶었다.
장미가 활짝 핀 화단 옆 벤치에 그가 앉아 있었다.
사랑은 한걸음에 달려가 도한의 옆에 앉았다.
“오래 기다렸어요?”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한에게 몸을 기댔다.
그의 팔이 등받이라도 되는 듯 편하게 힘을 뺐다.
“아니.”
도한이 숨이 가쁜 그녀를 보며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해 주었다.
그의 다정한 손길에 사랑은 더욱 가슴이 뛰었다.
그만 심장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아 그녀가 자세를 바로 했다.
“우리 이번 달 과제 아직 안 했는데. <연애와 결혼>이요.”
두 사람은 마지막 과제만을 남겨 둔 채였다.
리포트를 제출하고 기말고사를 보면 1학기는 끝이었다.
입학이 며칠 전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어 사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이 광장에 모여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떠났고, 도한을 만났으며, 그의 여자 친구가 되었다.
돌이켜 보니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이번 주말에 하자.”
“시간 괜찮아요?”
도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만에 하는 주말 데이트라 사랑은 벌써부터 기대감에 들떴다.
“어디 갈까요? 그동안 제가 가고 싶은 곳만 갔으니까 이번엔 오빠가 정해요. 당구도 좋고 게임도 좋으니까 오빠 하고 싶은 거로.”
그와 함께라면 뭐든 좋다고 사랑이 눈을 빛냈다.
도한은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손을 잡았다.
“후회할 텐데.”
“안 할게요. 약속해요.”
사랑은 잠깐이지만 윤재에게 당구를 배우기도 했고, 게임은 못 하지만 지루해하지 않고 옆에서 함께 즐길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무턱대고 도한에게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제 됐냐며 그녀가 두 눈에 힘을 주자 도한이 피식 웃었다.
그는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사랑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내가 가고 싶은 곳.”
사랑은 새끼손가락을 풀고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콘서트 티켓같이 생긴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종이를 반쯤 꺼냈을 때야 그 티켓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호텔 숙박권.
도한의 친구인 아영이 그에게 줬던 생일 선물이었다.
그가 가고 싶은 곳은 바로 호텔이었다.
“……정말 여기서 데이트를 하자고요?”
당황한 사랑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가 생일날에도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었지만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약속한다며.”
설마 벌써 후회하는 거냐는 듯 도한이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랑은 장난이 아닌 것 같아 입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한 게 불과 몇 분 전이라 무효라고 우기기에도 민망했다.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갈게요.”
“억지로 가는 거면 안 가고.”
“아니에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단지 약속 때문이면 갈 필요 없어.”
도한이 사랑의 손에서 봉투를 가져가려 하자 그녀가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다.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반응한 것 같았다.
혹시라도 그가 저 때문에 서운했을까 봐 미안하기도 했다.
둘 다 성인이고 연인인데 호텔에 못 갈 이유가 뭐가 있을까.
강의명 자체가 <연애와 결혼>이니 호텔도 충분히 데이트 장소가 될 수 있었다.
“나도 가고 싶어요. 궁금하기도 하고.”
부모님과 여행을 다닐 때 주로 펜션과 리조트를 이용했었던 사랑은 호텔에 묵어 본 적이 없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곳이라 호기심의 장소이기도 했다.
진심을 담은 대답이었는데 도한이 의심의 눈빛을 보냈다.
그가 믿지 못하자 사랑은 적극적으로 마음을 꺼내 보였다.
“진짜예요. 욕조에서 거품 목욕도 하고 싶고, 샤워 가운 입고 야경도 구경하고 싶고. 그리고 호텔 이불은 다 새하얗던데 어떤 느낌인지 덮어 보고도 싶고. 또 호텔 조식도 먹어 보고 싶고.”
“이불이 하얀색인 건 어떻게 아는데.”
“그, 그야 드라마나 영화 보면 그렇잖아요.”
사랑은 괜히 뜨끔했다.
호텔엔 가 본 적도 없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억울하기도 했다.
도한은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다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저녁이라도 먹고 헤어지려면 지금 움직여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랑 똑같네. 조식은 빼고.”
“네?”
사랑이 조금 전 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되새기기도 전에 그가 친절히 알려 주었다.
“너랑 같이 욕조에 들어가는 거. 너랑 같이 샤워 가운을 입고 함께 야경 구경하는 거. 그리고 너하고 새하얀 호텔 이불 같이 덮는 거.”
그녀가 입을 떡 벌렸다.
분명 자신이 한 말이 맞긴 한데 ‘같이’가 들어가니까 뜻이 야릇하게 달라졌다.
게다가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히 상상되는 바람에 사랑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를 지켜보던 도한이 더는 참지 못하고 사랑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는 부드러운 감촉과 쪽 소리에 놀란 그녀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도 많은데 뭐 하는 거예요.”
아는 사람이라도 지나갈까 봐 사랑은 안절부절못했다.
창피함과 두근거림이 뒤섞여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람이 많으니까 이 정도만 하는 거야.”
사람이 없었으면 잡아먹었을 거라는 듯, 도한이 사랑의 입술에 시선을 주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이 그를 자극했는지 도한이 다시 고개를 내렸다.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찰나 사랑이 손을 올려 그의 입을 막았다.
그가 못마땅한 얼굴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마지막 과제 때 실컷 해요. 여기서 말고.”
사랑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한을 진정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빠르게 그녀의 손을 내리고 입술을 찾았다.
맞닿기만 하고 떨어졌던 아까와 달리 도한은 사랑의 아랫입술을 물고서 힘 있게 빨아 당기곤 천천히 놓아주었다.
이번엔 그녀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눈빛이 변한 그가 다시 고개를 내리려 하자 사랑이 기겁하며 도망쳤다.
붙잡히면 이번에야말로 잡아먹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열심히 뛰던 그녀가 얼마 가지 못하고 우뚝 발을 세웠다.
바로 앞에 혜리가 있었다.
당황한 사랑이 뒤를 힐끔거리곤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혜리가 조금 전의 모습을 봤을 것 같아 사랑은 얼굴을 붉혔다.
얼마 전 혜리가 지켜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그에게 안겨 있기도 했지만 직접 마주하자 더욱 창피했다.
그사이 도한이 사랑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직 끝날 시간 아니잖아.”
“휴강이래.”
혜리가 수업 듣고 있을 시간에 사랑과 이른 저녁을 먹으려고 했던 도한은 아쉬웠다.
예상보다 빨리 사랑과 헤어져야 했다.
그의 감정을 읽은 혜리가 미소를 지으며 도한에게 말했다.
“집에는 나 혼자 갈게.”
그가 조금 놀란 듯 혜리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가 아까보다도 더 환하게 웃었다.
“아빠 내일 들어오시잖아. 그러니까 여자 친구랑 데이트하고 오라고.”
도한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택시 타고 가. 늦지 않게 들어갈 테니까.”
그가 사랑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혜리를 지나쳤다.
얼떨결에 끌려가게 된 사랑은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혜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혜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도한이 저를 혼자 두고 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거다.
사랑에게 미안하다며 먼저 가 보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혼자 남겨진 건 사랑이 아닌 자신이었다.
혜리는 도한으로부터 또다시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주먹 쥔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가 뒤돌아 어느새 멀어진 도한과 사랑을 눈으로 좇았다.
두 사람의 다정한 뒷모습에 혜리의 두 눈이 이내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