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여자 친구가 싫어해 (34/63)


#33화. 여자 친구가 싫어해
2023.04.24.



“점심 뭐 먹을래?”

공대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며 지우가 물었다.


“아무거나.”

사랑은 입맛이 없었다.

요 며칠 도한을 만나지 못해 힘이 없었다.

지난번 학교에서 데이트 과제를 한 이후로 벌써 사흘째였다.

주말에는 그녀가 부모님 집에 다녀와 전화 통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일이면 <연애와 결혼> 강의실에서 볼 수 있으니 조금만 더 참자고 생각했는데, 사랑은 어젯밤 도한으로부터 수업을 못 들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집에 일이 있어서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문자를 끝으로 그에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사랑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지 걱정되면서도, 또 그만큼 도한이 보고 싶었다.

겨우 사흘 못 봤을 뿐인데 3년이나 못 본 것처럼 그리웠다.

그의 여자 친구가 되면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를 혼자 좋아하던 그때로.


“그럼 체대 식당 어때? 윤재한테 연락해 봐.”

“거기 말고 다른 데 가자.”

“왜, 가까워서 좋은데. 맛도 있고.”

오늘 공대 식당 점심 메뉴가 별로라서 밖에 나가 먹을 생각이었던 지우는 사랑이 거절하자 아쉬웠다.


“도한 오빠가 나 윤재 만나는 거 싫어한단 말이야.”

“뭐?”

지우가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지난번에 윤재랑 둘이 술 마셨잖아.”

“그래서 오빠가 질투해?”

질투라는 단어가 도한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날 분명히 질투의 모습을 보였기에 사랑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도한 오빠가? 그 지독한 지도한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지우가 입을 떡 벌렸다.

사랑은 그런 친구가 못마땅해 눈썹을 찌푸렸다.


“오빠 안 지독해. 그렇게 말하지 마.”

그래도 남자 친구라고 편을 드는 사랑을 보며 지우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미안. 그럼 너 이제 윤재랑 밥도 못 먹어?”

“그런 건 아닌데…….”

공대 건물에서 나와 길을 따라 내려오던 사랑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우뚝 발을 세웠다.


“왜 그래?”

사랑이 뭔가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지우가 이상하게 여기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길 건너에 도한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혜리와 함께였다.

지우의 표정도 사랑 못지않게 굳어졌다.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은 평범한 선후배로 보이지 않았다.

도한은 몰라도 혜리는 그를 좋아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도한을 보며 저렇게 행복한 얼굴을 할 수가 없었다.

지우가 사랑을 힐끔거렸다.

저도 그렇게 느끼는데 도한의 여자 친구인 사랑은 오죽할까.

지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고, 사랑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나 마나 도한일 것이었다.

사랑이 핸드폰을 귀에 대고 도한에게 시선을 옮기자 지우의 눈길도 그를 향했다.

제발 받아라.

지우가 속으로 간절히 부탁하는 사이 도한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제발 받아요, 오빠.

지금 전화를 안 받으면 혜리와의 사이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그가 핸드폰을 터치했다.

그리고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지우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랑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싶어 지우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봤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목소리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사랑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두 눈은 여전히 도한과 혜리를 향한 채로.


“지우야.”

“어? 어. 왜?”

넋을 놓고 있던 지우가 놀라서 황급히 대답했다.


“저 사람 도한 오빠 맞지?”

“으, 응. 맞는 것 같아.”

“그 옆에는 박혜리 언니고.”

“그, 그래.”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닐 수가 없었다.

도한과 혜리 모두 존재감을 확실히 나타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두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켜 준 지우는 가슴이 떨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한의 생일이라며 사랑이 선물도 만들어 주고, 그의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던 거로 알고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지금이라도 그가 사랑에게 전화해서 실수로 못 받았다고 해명해 주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사이 도한과 혜리는 그녀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우야.”

또다시 자신을 부르는 사랑의 목소리에 지우는 난처했다.

뭘 물어도 제대로 대답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저 두 사람 말이야…….”

머뭇거리던 사랑이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우의 눈에 그들이 남매로 보이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겠지.

내가 너무 예민한 거겠지.

사랑은 쓸데없이 오해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어? 어. 그, 그래. 빨리 가자.”

지우가 다급히 사랑에게 팔짱을 끼고 도한과 혜리의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배고파 죽을 것 같다고, 공대 식당은 대체 왜 밥이 그 모양이냐고 쉬지 않고 투덜대면서도 지우는 이따금 뒤를 힐끔거렸다.

사랑이 도한과 사귄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게 뒤늦게 후회스러웠다.

본인은 여자 후배랑 잘도 같이 다니면서 사랑이 윤재를 만나는 건 왜 싫어하는지.

그럴 자격이나 있는지.

지우는 도한이 괘씸했다.


 

* * *

도한은 혜리를 데리고 학교 근처의 한정식집을 찾았다.

학교 식당 밥 말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이라는 경철의 성화에 일단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경철은 주말에도 도한을 불러 험한 말을 쏟아 냈다.

마지막에는 아들에게 원룸을 정리하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했다.

혜리가 1학기까진 마무리하길 원했고, 수술한다 해도 어차피 몇 개월 후가 될 테니, 그동안 도한이 그녀와 함께 학교를 오갈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아픈 딸을 혼자 다니게 하는 건 경철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 너무 비싸다. 대학생이 오기엔 좀 부담스럽네.”

혜리는 도한의 눈치가 보여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때문에 고생하는 도한에게 미안하면서도 같이 점심을 먹을 수 있어서 기뻤다.

비록 그는 아무런 말도 없고 그저 밥만 먹고 있지만 그래도 좋았다.


“밥 다 먹고 나 오빠 방에 가 있으면 안 돼?”

혜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던 도한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4시에 친구 만나기로 했는데 집에 갔다 오기엔 번거로워서.”

“집으로 가. 데려다줄 테니까.”

“오빠 오후에 수업 있잖아.”

“상관없어.”

“내가 미안해서 그러지. 나 데리고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오빠는 수업 가니까, 그냥 오빠 방에서 쉬고 있을게.”

“안 돼.”

도한의 단호한 목소리에 혜리는 내심 서운했다.

정말 안 되겠냐고 한 번 더 부탁해 보려는데 그가 말했다.


“여자 친구가 싫어해.”

혜리는 방금 도한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여자 친구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도, 그 여자를 배려하는 것도 당황스럽기만 했다.


“혹시, 오빠 그 신입생 만나?”

도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리가 놀랍다는 듯이 헛숨을 흘렸다.

사랑은 도한과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했지만,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볼 때마다 그녀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데 어느새 연인이 되었다니.

순수해 보이던 사랑을 떠올리는 혜리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황당했다.

그만큼 사랑과 도한은 어울리지 않았다.


“많이 좋아하나 봐. 여자 친구가 싫어한다고 동생도 방에 못 가게 하고.”

딱히 부정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혜리는 심사가 뒤틀렸다.

지금까지 도한에게 여자 친구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런 마음이 든 건 처음이었다.

그가 저보다 사랑을 챙기는 모습에 짜증이 났다.


“내가 동생이라고 말하면 되잖아. 그럼 이해하겠지.”

혜리는 도한이 학교에서 저를 그저 아는 후배라고 얘기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도 복잡한 가족사를 알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 친구들에게 도한을 오빠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혜리가 그렇게 물은 건 그를 한번 떠본 것뿐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아무리 여자 친구라도 도한이 저와 남매라는 걸 밝힐 리가 없을 테니까.


“말했어.”

“뭐?”

“이미 알고 있다고.”

혜리는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왜, 라는 말이 입에만 맴돌 뿐 뱉어지지 않았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

도한은 초점을 잃은 그녀를 내버려 두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혜리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병원에서 암 선고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왜 하필 나인지, 죽으면 어떡하지 따위의 분노와 슬픔이 아니었다.

도한에게 동정심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처연한 희열이었다.

죄책감에 이어 동정하는 마음까지 얻으면 도한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혜리는 경철의 집에서 처음 도한을 만났을 때부터, 아니 만나기도 전부터 그가 좋았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엄마는 항상 바빴고, 그로 인해 그녀는 늘 외로웠다.

그러다 아빠가 되어 주겠다는 아저씨를 만나 기뻤는데, 그 아저씨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에 더욱 가슴이 뛰었다.

재혼을 한 엄마는 일을 그만두고 혜리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기다 친자식처럼 아껴 주는 새아빠와 멋진 오빠, 좋은 집까지.

무엇 하나 흠잡을 것 없는 완벽한 일상이었다.

경철이 도한에게 무관심한 것 같았지만 여덟 살의 시선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토록 완벽한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믿고 의지했던 오빠에게 한순간에 버림을 받은 것이다.

혜리는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다시 버려질까 봐 불안함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날의 일로 도한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걸 알아챘다.

무감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그의 눈빛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있었다.

오빠가 미안해한다는 걸.

그때부터 혜리는 안정을 찾았다.

시골길에서 혼자 울고 있던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끔찍했지만, 그 일로 인해 도한의 관심을 받게 돼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 오빠는 내 말이면 무조건 들어주겠구나, 하는 우월감도 가졌다.

경철이 대신 도한에게 분노를 쏟는 덕에 그녀는 불쌍하고 착한 동생으로 남을 수 있었다.

지금껏 그래 왔는데.

지금까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물컵을 쥔 혜리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컵에 든 물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울분이 치솟았다.


“여자 친구?”

혜리가 테이블에 컵을 세게 내려놓고 헛웃음을 지었다.

누군 몸속에 암세포가 있다는데 팔자 좋게 사랑 타령이라니.

도한에게서 동정심이라도 얻을 수 있을 거라며 기뻐했던 혜리는 속이 뒤틀렸다.

자신이 죽는다 해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도한이 여자 친구에 대해 말할 때, 그의 두 눈이 깊어지는 걸 보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따뜻한 눈빛이었으므로.

* * *

집 앞에 다다른 도한이 스마트 키를 눌러 차 문을 열었다.

혜리는 조수석에, 그는 운전석에 오르려는데 멀리서 사랑이 걸어오고 있었다.


“먼저 타고 있어.”

그가 열었던 운전석 문을 닫고 어딘가로 향했다. 혜리는 움직이는 그를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도한과 사랑이 마주 선 모습을 본 혜리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다 이내 미소를 짓고서 사랑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랑도 고개 숙여 인사를 받았다.

혜리가 조수석에 오르자 사랑이 도한을 바라보며 애써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사랑은 사흘 만에 보는 남자 친구가 낯설었다.

그가 혜리와 함께 있을 때 제 전화를 받지 않았던 순간이 떠올라 다시금 가슴이 아렸다.

그때 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를 오래 붙잡아 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 혜리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 같아서.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도한이 사랑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없는데 아픈 사람처럼 안색이 파리했다.

며칠 내내 경철에게 불려 가느라 사랑에게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한 그는 더욱 미안했다.


“점심 먹은 게 체했나 봐요.”

사랑이 대충 둘러대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이 평소보다 차가워서 도한은 체했다는 그녀의 말을 믿었다.


“약은.”

“약 먹을 정도는 아니고요.”

사랑은 도한의 차에 타고 있는 혜리가 신경 쓰여서 이제 그만 그를 보내려고 했다.


“가 봐요. 바쁜 것 같은데.”

그녀가 차를 쳐다보자 도한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갔다 와서 전화할게.”

“네.”

고개를 끄덕인 사랑이 돌아서는 그를 다급히 불렀다.


“오빠.”

그녀의 목소리에 도한이 다시 사랑을 마주했다.

왜 그러느냐는 그의 눈빛에 사랑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 한 번만 안아 주세요.”

사랑은 혜리에게 보란 듯이 그와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유치하지만 도한은 내 남자 친구라는 걸 확실히 알려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제 마음을 도한이 알아 줬으면 했다.

그의 여동생에게 질투를 한다는 게 우습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은 지금 당장 도한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막상 말을 하고 나니 창피했다.

그녀가 그냥 해 본 말이라고, 신경 쓰지 말고 가라고 하려 했으나, 도한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한 발 다가와 사랑을 품에 안았다.

심지어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사랑은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와 맞닿은 가슴으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자 이제야 살 것 같았다.


“키스도 해 줄까?”

두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던 사랑이 깜짝 놀라 얼른 그에게서 떨어졌다.

혜리가 보는 앞에서 키스까지는 무리였다.

지금도 충분히 낯이 뜨거웠다.


“아, 아니요. 됐어요.”

도한이 웃으며 빨개진 사랑의 볼을 어루만졌다.


“들어가서 쉬어. 약도 먹고.”

“네.”

사랑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내린 채 끄덕였다.

도한은 그런 사랑에게 입 맞추고 싶은 걸 참고서 돌아섰다.

그의 차 안에서는 혜리가 그들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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