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내 세상의 전부 (32/63)


#31화. 내 세상의 전부
2023.04.17.


사랑은 공대 앞에서 도한을 기다렸다.

마지막 수업 시간이 같아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녀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다가 날짜를 보고는 조금 놀랐다.

다음 주가 벌써 5월의 마지막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제출해야 하는 <연애와 결혼> 과제를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도한과 진짜 연애를 하다 보니 일상이 데이트였기에, 데이트 과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사랑은 급히 데이트 장소를 검색했다.

완연한 봄이라 주말에 가 볼 만한 곳은 많았다.

하지만 이번 주는 지우와 집에 내려가기로 해서 주말 데이트를 하기엔 어려웠다.

평일에 수업이 끝나고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찾아봐야 하는데,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데가 없었다.

사랑은 무심히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 학교가 이렇게 이뻤나?”

빼곡한 시간표에 따라 발걸음을 재촉하느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하늘보단 바닥을 볼 때가 많았다.

도한과 함께 있을 땐 오직 그를 눈에 담았기에 사랑은 풍경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녀가 해가 지는 주황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그 아래로는 초록의 나무들과 절정을 맞이한 꽃들, 그리고 생기 넘치는 학생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

그 순간 사랑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꼭 어딜 가야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멀리 갈 것도 없이 캠퍼스에서 하면 될 일이었다.

고민이 해결돼 그녀가 기뻐하는 찰나에 도한이 공대 건물을 나왔다.

그는 사랑의 손부터 잡고서 길을 따라 내려갔다.


“우리 학교에 입학한 이유가 캠퍼스가 이뻐서라면서요?”

사랑이 태훈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때 지우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겠냐고 해서 궁금하기도 했었다.

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혜리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혜리가 동생이라는 사실을 사랑에게 밝히긴 했지만, 그 이상은 숨기고 싶었다.

아버지를 향한 배신감 때문에, 어린 동생을 멀리 데리고 가서 버리고 온 적이 있다고 하면 사랑이 저를 끔찍하게 여길 것만 같았다.

도한은 그 순간, 착한 척 위선 떠는 거로밖에 안 보인다고 했던 경철의 말이 불현듯 스쳤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사랑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으니까.

결국 제 욕심에 과거의 잘못을 감추고 있으니 위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생각을 떨쳐 낸 도한이 굳은 표정을 지워 내며 물었다.


“<연애와 결혼> 이번 달 과제 우리 학교에서 하려고요.”

“여기서?”

“네. 우리가 캠퍼스 커플이니까 의미도 있고, 멀리 안 가도 되니까 편해서 좋고. 또 오빠가 우리 학교 들어온 이유이기도 하니까.”

“언제? 너 주말에 집에 내려간다며.”

“말 나온 김에 지금 하죠, 뭐.”

“지금?”

“날씨도 좋고, 우린 지금 데이트 중이니까 문제 될 거 없잖아요.”

데이트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사랑이 그와 잡은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과제를 거저 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여서 도한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냥 이렇게 걷기만 하면 리포트는 뭐라고 쓸 건데.”

“그건 데이트 다 끝나 봐야 알죠.”

새침한 그녀의 대답에 도한이 잡고 있던 사랑의 손을 당겼다.

캠퍼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광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가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더니 1층에 상가들이 즐비한 기숙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에서 멈춰 섰다.


“이번 과제가 세 번째인가?”

“네. 이번에 내면 다음 달이 마지막이에요.”

뜬금없는 질문에 사랑이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리포트도 변화를 줘야 하지 않겠어?”

“변화요?”

“그래. 남들이랑 비슷하면 재미없잖아. 뭔가 특별한 걸 써야지.”

사랑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저보다 선배이니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노하우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다른 조보다 우리가 유리하기도 하고.”

그가 재수강이라서?

그런 이유를 짐작하는 그녀에게 도한이 속삭였다.


“우린 진짜 사귀는 사이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는.”

그제야 그의 생각을 알아챈 사랑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교수님께 제출하는 리포트에 ‘더 많은 것’을 어떻게 쓰겠다는 건지.

그녀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도한이 사랑을 데리고 기숙사 건물로 향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과제 하러.”

“여기서 무슨 과제를 해요.”

“오늘 지하 카페가 문을 닫았거든.”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사랑이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에 발을 들인 그녀는 저절로 알아 버렸다.

카페가 영업하지 않아서 지하 전체에 불이 꺼진 그곳은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조용했다.

그가 조금 전에 말했던 ‘더 많은 것’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그래도 설마. 카페 문이 닫힌 줄 모르고 내려오는 사람이 분명 있을 텐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도한이 사랑을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 벽에 세웠다.

사랑은 혼자였다면 무서웠겠지만 그와 함께였기에 다른 의미로 가슴이 뛰었다.

어둠 속에서 오롯이 저를 바라보는 도한으로 인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누군가 올 것 같은 불안함까지 더해져 그녀의 두 눈이 이리저리 방황했다.


 


“누가 오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눈치가 있으면 그냥 가겠지.”

“그래도, 경비 아저씨가 오시면…….”

“과제 중이라고 하지, 뭐.”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그대로 사랑의 입술을 삼켰다.

그러곤 허리를 끌어당겨 좀 더 깊이 숨결을 빨아들였다.

도한은 오늘따라 그녀의 입술이 더욱 달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자신이 이 어린 신입생에게 빠져들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 작은 입술에 이토록 집착하게 될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한껏 물고 집요하게 키스를 퍼붓자 사랑은 살짝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대로 주저앉을 것처럼 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잔뜩 긴장했던 몸이 스르르 그에게 안겼다.

머리가 핑그르르 돌면서 더는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녀가 그를 살짝 밀었다.


“오빠는 정말…….”

“정말 뭐.”

“키스를 너무 잘해요.”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불퉁하게 말하자 도한이 작게 웃었다.


“그게 불만이야?”

“네.”

사랑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도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내려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더는 하지 말라는 듯 그녀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사랑은 아직도 그가 입술을 부딪쳐 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몰랐다.

스물여섯의 그는 능숙했고, 그가 첫 남자 친구인 스무 살의 그녀는 어설프기만 했다.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걸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번 키스를 나눌 때면 사랑은 늘 부끄럽고 위축되었다.

이런 주제에 그의 생일엔 대체 어떻게…….

그때가 떠오르자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근데 지금 이거. 과제 중인 거예요?”

“학교에서 데이트하자며.”

“그렇긴 한데, 이걸 어떻게 리포트에 써요.”

“왜. 강의명이 연애와 결혼인데. 키스는 필수지.”

아무리 그래도 리포트에 이런 내용을 담을 수 없었기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 혹시…….”

“혹시 뭐.”

“재수강이라 과제 점수 잘 받으려고 나랑 사귀는 건 아니죠?”

“뭐?”

“갑자기 그런 게 아닌가 싶어서요.”

황당한 도한이 헛숨을 터트렸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사랑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금껏 저를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으로 본 건가.

도한은 어이가 없어서 속이 다 쓰렸다.


“키스 못 하는 여자는 별로라면서요. 근데 저는 아직도 형편없으니까.”

경험이 많으면 잘하는 게 맞는 건가.

그럼 얼마나 더 해야 잘할 수 있을까.

사랑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편없진 않아.”

조금은 희망적인 이야기에 그녀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연습이 더 필요하지만.”

많이 좋아졌다거나 그래도 좋다는 대답을 기대했던 사랑은 절망스러웠다.

도한은 다시 어깨가 축 처진 그녀를 보며 몰래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의 키스는 지금도 충분히 황홀했다.

하지만 연습 핑계를 대서라도 매일같이 입을 맞추고 싶었다.

아무리 키스를 퍼부어도 갈증이 나니까.

하면 할수록 더 갖고 싶고 더욱 그녀를 원하니까.

사랑에겐 미안하지만, 도한은 당분간 이렇게라도 그녀를 안고 싶은 제 욕심을 마음껏 채울 생각이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해 볼까. 연습.”

사랑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도한의 두 눈을 바라보며 움찔했다.

조금 전 키스에도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는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연습을 하겠다니.

그럼 그건 연습의 연습이었다는 말이야?

더 생각할 틈도 없이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시작부터 빈틈없이 밀어붙이는 힘에 사랑은 이게 진짜구나 싶었다.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배워야 이렇게 아찔한 키스를 할 수 있을까.

이런 기분을 저 혼자만 느낀다는 게 미안한 사랑은 최선을 다해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그에게도 이 느낌을 전해 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 *

두 사람은 기숙사 지하에서 한참을 머물다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키스를 하는 동안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사랑은 자꾸만 뒤로 돌아 방금 빠져나온 건물을 힐끔거렸다.

저 안에서 나쁜 짓이라도 벌이고 나온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CCTV라도 있었으면 어쩌지?

있었다 해도 어두워서 안 보였으려나?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그녀가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그녀와 달리 도한은 여유로워 보였다.

사랑은 그 모습이 괘씸하기도 하면서 부러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그를 볼 때마다 자신은 왜 하필 스무 살일까 침울했다.

스물넷이나 스물다섯이었다면 그와 더 어울렸을 것만 같다.


“다음 달엔 어디로 갈까요?”

마지막 데이트 과제를 해야 하는 6월에는 기말고사와 여름방학이 있었다.

아무래도 바쁜 한 달이 될 테니 과제부터 끝내 놓는 게 좋을 듯했다.

사랑의 손을 잡고 어둠이 내려앉은 캠퍼스를 걷고 있던 도한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딱히 떠오르는 장소가 없었다.

지금껏 그가 먼저 과제를 위한 장소를 알아본 건 사랑과 놀이공원 야간 개장에 갔을 때뿐이었다.

그땐 사랑이 도한의 여자 친구가 아니었으니 진짜 데이트에서는 그래 본 일이 없었다.

계획을 세워서 여자 친구를 만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처럼 의미 있는 장소면 좋겠는데. 신입생 오티 숙소에 가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첫 키스를 했던 도한의 집에서 데이트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아쉬워하는 사랑에게 그가 의외의 말을 했다.


“나 너 거기서 처음 본 거 아닌데.”

“네?”

이게 무슨 소리일까.

분명 눈 내리는 날 숙소 앞에서 처음 그를 마주쳤는데.

사랑은 멈춰 서서 잔뜩 커진 눈으로 도한을 올려다봤다.


“도서관 광장에서 버스 기다리면서 봤어.”

“저를요?”

그녀도 그때 그의 뒷모습을 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만났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었던 그날 밤이 첫 만남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렇게 말한 건데, 도한도 도서관 광장에서 저를 봤다고 해
사랑이 크게 놀랐다.


“언제 출발하나 지루해하고 있는데 멀리서 여자 둘이 방방 뛰며 시끄럽게 굴더라고.”

딱 봐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입생들이었다.

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 반가운 목소리를 한껏 높여 도한의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긴 생머리에 키가 큰 여자 하나와 단발머리에 모자를 쓴 아담한 키의 여자 하나였다.

그중 눈에 들어온 건 단발머리의 여자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각각 얼굴에 화장을 한 다른 여학생들과는 달리, 단발머리 여자는 화장기 하나 없이 뽀얀 피부를 자랑했다.

솜털이 보일 것만 같은 앳된 얼굴에 그려진 미소는 보는 것만으로도 청량했다.

한마디로 순수 그 자체였다.

도한은 이상하게도 그 신입생에게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 숙소 앞에서 그 신입생을 다시 만났다.

술에 취하긴 했지만 여전히 싱그러운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로 얼굴에 아기 같은 솜털이 보였다.

그래서 그답지 않게 말을 걸고, 어울리지 않게 담요를 던져 주었던 것 같다.

도한은 그때 잠깐 스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 난 또. 나한테 첫눈에 반했나 싶었는데 단지 시끄러워서였다니.”

사랑은 조금 실망했다.

로맨틱한 전개를 기대했는데 결과가 참 허무했다.


“기억에 남을 만큼 강렬한 첫인상이었으니까 첫눈에 반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에요. 첫눈에 반하는 건 그런 게 아니거든요.”

“그럼 어떤 건데.”

잘 아는 것 같으니 어디 한번 설명해 보라는 그의 말에 사랑은 그날의 도한을 떠올렸다.


“그 사람을 보자마자 눈이 머는 거요. 그 사람에게서 빛이 나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리는 거요. 동시에 가슴이 울리면서 내 세상이 거기서 딱 멈추는 거요. 그 시간 이후부터는 내 눈에 그 사람이 박혀 버려서 뭘 봐도 그 사람으로 보이는 거요. 그렇게 그 사람이 내 세상의 전부가 돼 버리는 거요.”

사랑은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마음을 전부 꺼내 버렸으니 민망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건 그런 거더라고요.”

도한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제게 시선을 고정한 그녀를 보며 가슴이 아려 왔다.

누군가의 진심을 전해 들으면 이토록 마음이 뜨거워진다는 사실을, 스물여섯에서야 처음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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