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이런 거. 그리고 이런 거 (31/63)


#30화. 이런 거. 그리고 이런 거
2023.04.14.


도한은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왔다.

수건으로 대충 머리카락을 말리는데 먼저 씻고 나온 사랑이 어느새 옷을 갖춰 입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케이크에 초까지 꽂고 막 불을 붙이는 참이었다.


“빨리 와요.”

어서 오라는 그녀의 손짓에 도한이 피식 웃으며 사랑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스물여섯 번째 생일 축하해요. 노래도 불러 줄까요?”

“됐어.”

그가 곧바로 입김을 후, 불어 촛불을 끄자 사랑이 얼굴을 찌푸렸다.


 


“소원도 안 빌고 끄면 어떻게 해요. 다시 해요, 다시.”

이건 무효라며 그녀가 하나 남은 성냥을 꺼내는데 도한이 초를 모두 빼 버렸다.

사랑은 허무함과 원망을 담아 눈을 흘겼다.


“빌었어.”

“정말요?”

“그래. 그러니까 이제 먹자.”

케이크를 자르는 그를 보며 사랑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묻고 싶었는데 대답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도한이 포크로 입에 넣어 주는 케이크를 받아먹으며 사랑은 가방에서 선물 상자를 슬쩍 꺼냈다.


“다음엔 더 좋은 거로 줄게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도한의 친구들을 만나고 오니 제 선물이 더욱 볼품없었다.

호텔 레스토랑과 호텔 숙박권에 비하면 그야말로 초등학생이 주는 선물 같았다.

차라리 직접 만들지 말고 완제품을 살걸.

사랑은 뒤늦게 후회를 했다.


“선물은 아까도 받았는데.”

도한의 한마디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 전 그에게 안겼던 순간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실 사랑은 바로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생일인데 케이크가 빠질 수 없어서 부끄러움을 참고 버티는 중이었다.

그런데 도한이 그때를 언급하는 바람에 또다시 가슴이 뛰었다.


“고마워. 마음에 들어.”

“뭔 줄 알고요.”

“뭐든, 네가 주는 건 다 마음에 들어.”

도한의 눈빛이 짙어지자 사랑은 심장이 떨려 와 시선을 피했다.

빨리 케이크만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케이크를 크게 잘라 입에 넣었다.

사르르 녹는 생크림을 열심히 오물거리는데 그가 그녀의 입가를 매만졌다.

입술에 묻은 크림을 닦아 준 것이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시, 시간이 벌써 이렇게……. 저는 그만 가 볼게요.”

사랑은 있지도 않은 시계를 보는 척 손목을 내려다보곤 서둘러 포크를 내려놨다.

하지만 곧 도한에게 붙잡혔다.


“한 시간만 더 있다가 가.”

도한이 사랑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을 따라 솜털이 곤두서는 걸 느낀 사랑이 바짝 긴장했다.


“하, 한 시간 동안 뭐 하게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 도한은 사랑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생크림보다 더 부드러운 감촉과 달콤함이 그의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이런 거.”

그가 고개를 조금 틀어 그녀의 볼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이런 거.”

신경이 올올이 긴장하는 감각에 사랑이 숨을 들이켰다.

그사이 그녀의 등이 바닥에 닿았다.

설마 또?

감히 예상할 수도 없는 다음 상황에 사랑의 눈빛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도한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옷 안 구겨지게 조심할게.”

지금 그게 문제냐고 사랑이 눈살을 찌푸리자 그가 웃으며 그녀의 눈에 입을 맞췄다.


“겁먹지 마. 키스만 할 거니까.”

그 키스라는 게 입술에만 하는 게 맞는 건지 사랑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간파당했는지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에 할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도한은 두 눈이 잔뜩 커지는 사랑에게 고개를 내렸다.

그가 입술을 한껏 머금고 느릿하게 숨결을 빨아들이는 탓에 사랑의 발끝까지 찌르르 전기가 통했다.

지금까지 도한과 수도 없이 키스를 했지만, 누운 채로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는 건 차원이 달랐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술에 취한 듯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조금 전 침대에서는 대체 무슨 용기로 그에게 매달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키스가 점점 짙어질수록 사랑의 숨이 차올랐다.

도한이 잠깐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냥 갈걸 그랬다.”

“……어디를요?”

사랑이 달리기라도 한 듯 거친 숨을 몰아서 쉬는데 그가 말했다.


“호텔.”

순간 사랑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저 단어만 들으면 열이 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 과제 할 때 갈까?”

“말도 안 돼.”

그녀가 크게 뜬 눈으로 인상을 구겼다.

호텔에서 무슨 데이트를 하며 리포트에는 뭐라고 적을 건지.

교수님한테 그 리포트를 제출할 생각에 사랑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왜. 잘할 자신 있는데.”

그녀가 할 말을 잃은 채 꽁꽁 얼어붙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곤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리포트 잘 쓸 자신 있다고.”

“아. 리, 리포트요.”

사랑은 얼굴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방금 머릿속에서 상상한 호텔 방에서의 도한과 자신의 모습이 펑 사라지면서 창피함이 밀려들었다.


“너 지금 무슨 생각 했는데.”

“네? 아,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근데 왜 얼굴이 빨개.”

“더, 더워서요. 벌써 여름인가. 하하…….”

사랑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엉뚱한 상상력에 부끄러워서 죽고만 싶었다.

도한은 그런 그녀가 마냥 귀여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언제 갈지 생각해 놔.”

“……호텔이요?”

“그래. 너랑 갈 거니까.”

“……과제 하러요?”

언제나 예측 불가한 그녀 때문에 도한은 웃음이 나왔다.


“아니. 너랑 이런 거 하러.”

답을 알려 주겠다는 듯 그가 사랑의 입술을 한껏 베어 물었다.

한 시간만 더 데리고 있으려고 했는데 벌써 10분이나 지나 버려서 도한은 시간을 멈추고만 싶었다.

키스만 하기에도 50분은 턱없이 부족하니까.

* * *

한 시간을 꽉 채우고 나서야 사랑은 도한의 집을 벗어났다.

하지만 곧장 그녀의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의 배려 가득한 손길로 원피스는 무사했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살결에 키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상태로 집에 갔다간 당분간 지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창피했다.

그녀가 도한의 집에서 나서기 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울상을 짓자 그는 그녀를 데리고 나와 집 앞 공원을 걸었다.

그렇게 둘은 의도치 않게 밤 산책을 하게 됐다.


“아까 만났던 오빠 친구들이요.”

도한의 손을 잡고 소나무 길을 걷던 사랑이 지나가는 커플을 보고 수호와 아영을 떠올렸다.


“일부러 같은 직장에 들어간 거예요?”

사랑은 두 사람이 동갑내기 연인이라는 것보다 같은 직장에 다닌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남자 친구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다니.

꿈만 같은 이야기라 어떤 기분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수호가 김아영 따라간 거지. 대학 다닐 때부터 둘이 유명했거든. 하도 붙어 다녀서 졸업 전에 결혼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

“그럼 오래 사귀었겠네요?”

“1학년 때부터였으니까 6년.”

“와. 그럼 그 언니는 남자 친구가 군대 갔을 때도 기다린 거예요?”

도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랑은 두 사람이 더욱 부러웠다.


“곧 결혼하겠네요.”

“아마도.”

사랑은 마음속으로 두 사람을 축하하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물여섯이면 결혼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라는 게 괜히 슬펐다.

도한도 스물여섯인데.

졸업하면 그는 서른이 될 터였다.

그가 누구와 결혼을 하게 될진 모르겠지만 그게 저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자 사랑의 가슴이 뻐근해졌다.


“친구들이 다 부러워하겠어요. 같은 직장 다니면서 사귀니까.”

“다들 반대했지. 수호한테 다른 회사로 가라고.”

“왜요?”

이유가 궁금한 그녀가 도한을 올려다봤다.


“헤어지면 서로 불편하잖아.”

“아.”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랑이 짧게 탄식했다.

하지만 대놓고 그렇게 얘기한 그의 친구들이 미워서 저라도 수호와 아영의 편을 들어 주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두 사람 너무 부러운데. 남자 친구랑 같은 직장에 다니면 회사 가는 길이 얼마나 즐겁겠어요. 둘이 꼭 결혼했으면 좋겠다.”

사랑은 도한과 한 직장에 다니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그녀의 머릿속도 아는 건지 상상은 짧게 끝이 나고 말았다.

도한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너는 생일이 언제야.”

“2월 19일이요.”

사랑이 그에게 잊지 못할 생일을 만들어 준 것처럼 그 역시 그래 주고 싶었다.

그런데 생일이 이미 지나 버려서 도한은 아쉬운 마음이 크게 남았다.


“어렸을 땐 제 생일이 2월인 게 너무 싫었어요.”

“왜?”

“학교 다니는 중에 생일이면 친구들이 축하해 줄 텐데 하필 방학 때잖아요. 그것도 종업식이 지난 봄 방학. 새 학기 준비한다고 바쁜데 제 생일을 기억이나 하겠어요? 15일, 20일처럼 기억하기 쉬운 숫자도 아니고.”

어릴 땐 선물이라고 해 봐야 학용품 정도였지만, 사랑은 그마저도 받지 못하는 게 서운했다.

때론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정성스럽게 편지까지 써서 선물을 줬는데, 정작 내 생일을 기억하는 친구들은 별로 없어서.

가장 친한 친구인 지우조차도 뒤늦게 챙겨 줄 때가 많았다.


“내가 기억할게. 내 생일이랑 날짜는 같으니까 잊어버리진 않겠네.”

오늘은 5월 19일이었다.

사랑은 도한과 제 생일 날짜가 같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이거 좀 운명 같은데?

제 생각이 유치하다는 걸 깨닫고 사랑은 웃음이 나왔다.


“그때 가 봐야 알죠, 뭐. 제 생일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냐고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받고 싶은 선물 있으면 얘기해 봐. 그것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랑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뭐가 좋을까.

첫 남자 친구한테 받는 생일 선물이라.

상상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뭘 받아도 감동일 것 같았다.


“음.”

근데 왜 떠오르는 게 없지.

꽤 오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도한과 눈을 맞췄다.


“커플링이요.”

사랑은 꼭 그와 반지를 나눠 끼고 싶었다.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의 연애를 더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도한만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할 것 같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이런 제 생각이 철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랬다.

사랑이 떨리는 마음으로 도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다. 커플링은 좀 그렇고. 다른 거 받을래요.”

아무래도 그가 커플링을 좋아하지 않는 듯해 사랑은 말을 바꿨다.

반지를 끼고 있는 도한을 상상해 보니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급히 다른 걸 생각했다.


“다른 거 뭐.”

도한의 재촉에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키스요.”

용기 내서 내지르긴 했는데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사랑은 얼굴을 푹 숙였다.

미쳤다, 이사랑.

스킨십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생일 선물로 키스를 받겠다니.

순수하게 인형이라든지, 우아하게 꽃다발이라든지, 성숙하게 향수라든지.

세상에 많고 많은 선물 중에 왜 하필 음흉하게 키스를 생각해 냈는지, 사랑은 제 머리가 원망스러웠다.

뭐라도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았는데 마침 떠오른 게 키스였다.

생일에 나누는 입맞춤은 더욱 특별할 것 같아서.

그녀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한은 한 손으로 사랑의 뺨을 감싸 자신을 바라보게끔 했다.

그러곤 천천히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에 쪽 입을 맞댔다.


“지, 지금 말고 생일에 받겠다고요.”

벤치 바로 옆에 가로등이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일 것 같아 사랑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도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맞췄다.


“이건 올해 생일 선물.”

지나가 버린 스무 살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듯 그가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것도 모자라 지금까지의 생일을 한꺼번에 챙길 기세로 도한은 몇 번이나 사랑에게 선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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