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호텔 숙박권 (29/63)


#28화. 호텔 숙박권
2023.04.07.


저를 빤히 쳐다보는 도한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던 사랑이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래도 오버를 한 게 아닐까.

평소와 다른 진한 화장이 영 신경 쓰였다.

결혼식 하객 같은 옷차림도 부끄럽긴 마찬가지였다.

스물여섯인 도한의 친구들에게 어리게만 보이는 게 싫어서 난생처음으로 숍을 다녀왔다.

아침 일찍부터 지우가 화장을 해 줬지만 아무래도 어색했다.

지우도 안 되겠는지 결국 사랑을 끌고 메이크업을 받을 수 있는 숍을 찾았다.

전문가의 손길은 그야말로 훌륭했다.

이렇게까지 해야겠냐며 지우에게 눈살을 찌푸렸던 사랑은 헤어스타일까지 완성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친구의 말을 듣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물여섯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스무 살로 보이진 않았다.

사랑은 화장 하나로 기적을 만들어 낸 선생님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지우가 추천해 준 원피스까지 입으니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그대로 회사에 출근해도 손색없을 나이로 보였다.

도한이 저로 인해 친구들에게 창피할까 봐 걱정이었던 사랑은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막상 그의 앞에 서니 자신감을 잃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눈엔 여전히 신입생처럼 보일까 봐 긴장이 됐다.


“많이 이상해요?”

도한이 말이 없자 사랑은 초조했다.

그냥 평소대로 나올 걸 그랬나.

괜히 돈만 낭비한 게 아닐까.

사랑은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이상해.”

도한의 무심한 한 마디에 사랑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안 어울리는구나.

다시 옷을 갈아입고 올 생각에 그녀가 한숨을 내쉬는데 도한이 한 발 다가왔다.

사랑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그가 단번에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도한은 당황하는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입술을 한껏 머금었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강하게 빨아들이는 힘에 사랑은 가슴이 뛰었다.

해가 지지 않은 오후 5시라 누가 보면 어쩌나 싶어 심장이 더욱 요동쳤다.

그런 마음도 몰라주고 도한의 입술은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사랑은 공들인 화장이 지워질까 봐 그를 살짝 떨어뜨렸다.

한참이나 입을 맞추고도 아쉬운지 도한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러곤 사랑의 입술을 엄지로 쓱 건드리며 붉게 번진 립스틱을 닦아 주었다.


“립스틱이 너무 진해.”

그런 이유로 키스를 퍼부었다는 말에 사랑은 얼굴을 붉혔다.

그것 말고는 괜찮다는 뜻인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제 가자.”

“네.”

사랑은 도한이 문을 열어 준 조수석에 올라탔다.

잠시 후 그가 운전석으로 들어와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설마 여기서 또 키스를 하는 건가 싶어 사랑이 움찔하는데 도한이 안전벨트를 채워 줬다.


“고, 고마워요.”

차를 탈 일이 없었던 사랑은 안전벨트를 해야 한다는 걸 생각지도 못했다.

조금 전의 뜨거웠던 키스로 머릿속이 엉망이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어른처럼 보이고 싶었는데, 어쩐지 시작부터 망한 것 같아서 그녀가 몰래 얼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한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자신이 아는 이사랑 같아서.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저녁 약속이고 뭐고 이대로 집에 데려가고만 싶었다.

그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데 누군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도한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온 혜리였다.

그녀가 힘껏 주먹을 쥔 탓에 손에 들려진 종이 가방이 무참히 구겨졌다.

도한에게 줄 생일 선물이었다.


 

* * *

약속 장소는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도한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선 사랑은 주위를 힐끔거렸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어깨가 움츠려졌다.

그나마 차려입고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생일에 지우와 갔었던 분식집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공간이었다.

스물여섯이면 이런 곳에서 친구를 만나는 건가.

사랑은 도한의 친구들을 만나기도 전에 주눅이 들었다.


“오랜만이다.”

테이블 앞에 멈춰 선 그가 나란히 앉아 있는 남자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바짝 긴장한 사랑이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녀의 인사에 두 사람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그중 남자가 도한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진짜 여차 친구 데려왔네.”

“같이 온다고 했잖아.”

도한은 사랑에게 자리를 권하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정말일 줄은 몰랐지. 네가 언제 우리 만날 때 누구 데려온 적 있었냐.”

“나도 안 믿었잖아. 수호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

수호와 그의 여자 친구인 아영이 사랑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사랑은 호기심 어린 그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반가워요. 도한이 예전 동기 박수호예요.”

“나는 김아영이에요. 나도 지도한이랑 같은 과였어요.”

두 사람의 소개에 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랑입니다. 저도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수호와 아영은 순간 도한에게 시선을 옮겼다.

‘사랑’이라는 말을 도한이 꺼린다는 걸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당황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와 반대로 도한이 태연하게 물을 마셨다. 그들은 다시 사랑을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같은 날은 둘이 데이트해야 하는데 저희가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하죠. 친구들끼리 만나시는데.”

사랑이 그들을 어려워하자 수호는 괜히 도한에게 핀잔을 줬다.


“너는 여자 친구가 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그럼 우리가 다른 날 만나자고 했을 거 아냐.”

“오늘밖에 시간 안 된다며.”

수호가 답답하다는 듯 헛숨을 터트렸다.

같은 마음이었던 아영 역시 말이 안 통하는 도한 대신 사랑과 대화를 나눴다.


“얘랑 대체 어떻게 만나요? 나 같으면 남자 친구가 생일에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하면 화날 거 같은데. 안 싸웠어요?”

“싸울 시간도 없었어요. 약속 있다는 걸 어제 알아서. 그리고 오늘이 생일이라는 것도 저한테는 말을 안 해 줬거든요.”

사랑이 차분하게 설명을 마치자 수호와 아영이 입을 떡 벌렸다.

도한이 별난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자 친구한테까지 그럴 줄이야.

그런데 정작 사랑은 개의치 않는 듯해 둘이 참 잘 어울려 보였다.


“누가 지독한 아니랄까 봐. 생일인 건 왜 말 안 했냐? 여자 친구 서운하게.”

아영은 같은 여자로서 도한이 괘씸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사랑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싶어서.

여기까지 같이 온 걸 보면 남자 친구의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게 당연한 마음이라 아영이 도한에게 눈을 흘겼다.


“주문이나 하자. 배고프다.”

“저게 진짜. 아니, 이런 애랑 도대체 어떻게 만나는 거예요?”

아영은 무심하게 메뉴판을 보고 있는 도한이 얄미워 사랑에게 따지듯 물었다.

조금 전에도 같은 질문을 받았던 사랑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의문이라 아영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가 없었다.

그를 보자마자 좋아하게 되어 버려서 어떤 말로도 설명이 불가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곧 테이블이 세팅되었다.

식사가 시작되고 나서도 수호는 여전히 사랑이 이 자리를 불편해하는 게 느껴졌다.


“저희 원래 이런 데서 안 만나요. 저랑 아영이 직장이 이 호텔 계열사인데 이번 달이랑 다음 달만 여기가 임직원 할인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예약했지, 안 그랬으면 그냥 삼겹살이나 먹으러 갔을 거예요.”

“아, 그럼 세 명 예약하셨을 텐데. 제 건 제가 낼게요.”

편하게 식사를 해도 된다는 뜻이었는데 사랑이 더욱 미안해했다. 수호는 빠르게 손을 내저으며 눈으로 도한을 가리켰다.


“얘보고 내라고 하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직장 다니는 우리보다 얘가 훨씬 돈이 많거든요. 고등학교 때 만든 앱으로 돈 벌어서 주식 투자했다가 떼돈 벌었잖아요. 부러운 놈.”

사랑도 부러운 눈으로 도한을 쳐다봤다.

저는 언제 졸업해서 취업을 하고 월급을 모으나 싶어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따라 그가 더 멀게만 느껴졌다.

이런 애랑 도대체 어떻게 만나냐던 아영의 질문은 자신이 아닌 도한에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가 대체 나 같은 신입생을 왜 만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참. 깜빡하기 전에 선물 줘야지.”

맛있는 음식에 빠져 있던 아영이 뭔가 생각난 것처럼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생일 축하해. 이것도 직원 할인으로 산 거니까 부담 갖진 말고.”

“뭐 하러 선물까지. 고맙다.”

도한이 봉투를 열어 보는데 수호가 불쑥 말을 얹었다.


“이 호텔 숙박권이야. 마침 여자 친구도 있으니까 잘됐네.”

수호의 짓궂은 농담에 물을 마시던 사랑은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그녀가 새빨개진 얼굴로 연신 기침을 하자 도한이 수호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스무 살이야. 호텔은 무슨.”

민망하긴 도한도 마찬가지였다.

선물은 고마운데 왜 하필 호텔 숙박권인지.

안 그래도 평소와 다른 이사랑 때문에 내내 가슴이 떨려 미치겠는데.

도한의 머릿속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야한 상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호텔 룸에 들어서자마자 사랑의 입술을 집어삼키고는 그녀를 침대로 쓰러뜨리는 장면.

얼굴에 열이 오르고 온몸이 뜨거워져 그가 물을 벌컥 들이켰다.


“뭐? 스무 살?”

수호가 쏟아질 것 같은 눈을 하고서 목소리를 높이자 옆에서 아영도 놀라서 입을 벌렸다.


“사랑 씨, 스무 살이에요? 1학년?”

“네.”

사랑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저래 당황스러워서 얼굴의 열기가 가라앉질 않았다.

차마 말을 잇질 못하는 수호 대신 아영이 겨우 말을 꺼냈다.


“세상에. 이거 완전 도둑놈 아냐.”

아영은 사랑이 자신들보다 한두 살 아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를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진한 화장 속에 앳된 얼굴이 숨겨져 있었다.

도한이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헤어질 때까지도 몰랐을 거다.


“여섯 살 차이가 왜 도둑놈이야.”

도한은 아영의 말에 동의는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그가 대놓고 인상을 쓰자 수호가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터트렸다.


“이건 진짜 충격이다.”

“뭐가. 열 살도 아니고 스무 살인데.”

그게 왜 충격적인 일이냐며 도한이 나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띠동갑도 아니고 겨우 여섯 살 차이에 발끈하는 친구들이 못마땅했다.

수호는 고개를 떨군 사랑을 힐끔 보고는 그만 놀란 얼굴을 지웠다.


“그래. 여섯 살이면 뭐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지. 우리 형은 여자 친구랑 일곱 살 차이 난다더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호는 여전히 도한을 도둑놈 보듯 했다.

서른둘과 스물다섯인 형과 형의 여자 친구는 이해가 가는데 스물여섯의 지도한이 스무 살 여자 친구를 만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다른 놈도 아니고 지독한이라서.

무뚝뚝하고 차갑기만 한 그 성격을 신입생이 어떻게 감당할지 사랑이 걱정되기까지 했다.

수호와 아영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랑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그녀가 부디 도한으로부터 상처받지 않길 바랐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랑은 말이 없었다.

깜깜한 차창 너머 어딘가에 시선을 던져 놓을 뿐이었다.

도한은 그녀가 잠이 든 줄 알고 조용히 운전을 했다.

집 앞에서 차가 멈췄을 때 사랑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했다.

도한은 사랑과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몇 시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나누었던 키스가 아쉬워서 집으로 데려가 이어 가고 싶었다.

아영이 챙겨 준 생일 케이크를 같이 먹자고 손을 이끌까.

오늘 정말 예쁘다고 칭찬하면 따라와 줄까.

이제 와서 그러기엔 너무 늦었나 싶어 도한은 한숨을 삼켰다.

그가 무슨 말로 사랑을 붙잡을까 고심하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들어가 볼게요.”

도한은 허탈한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사랑이 화가 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생일이라는 걸 알리지 않은 것도, 친구들과 선약이 있다는 걸 미리 말하지 않은 것도 뒤늦게 미안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서 차마 붙잡지 못했다.

결국 도한은 사랑을 그대로 혼자 보내고 집에 들어갔다.

책상 위에 케이크를 툭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앉은 그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이라도 사랑에게 전화해서 잠깐 좀 보자고 할까.

도한은 핸드폰을 들었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침대 위로 던지듯 내려놨다.

그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혹시 혜리인가 싶어 그가 미간을 좁히며 일어섰다.

도한은 아무런 기대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사랑이 서 있었다.

순간 도한의 심장이 폭주했다.

너무 빠르게 뛰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데 사랑이 대뜸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기세에 눌린 도한이 뒷걸음질을 쳤다.

굳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랑에 맞춰 그가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도한이 무슨 일이냐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데 갑자기 사랑이 그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그 힘에 밀려 침대에 다리가 닿은 도한은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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