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스물다섯의 이사랑 (28/63)


#27화. 스물다섯의 이사랑
2023.04.03.


도한의 예상은 하루 만에 맞아떨어졌다.

다음 날 사랑과 나란히 도서관을 나온 그는 우연히 재성과 마주쳤다.

그녀와 소개팅을 했던 건축과 한재성을.


“안녕하세요, 형. 어? 안녕.”

재성은 도한에게 인사하고 나서야 뒤늦게 사랑을 알아봤다.

얼마 전 소개팅에서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다시 보니 꽤 괜찮았다.

한 번 만났던 사이라서 반갑기도 했다.


“아. 안녕하세요.”

사랑도 재성을 기억하고 고개를 숙였다.

도한만 못마땅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그때 내가 너무 빨리 일어나서 계속 미안하더라.”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갑자기 재성이 사랑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전화번호 알려 줄래? 내가 밥 한번 살게.”

사랑이 도한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렇게 빨리 그의 질투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의도치 않게 재성까지 도와주고 있어서 그녀는 기대가 컸다.

사랑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재성의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옆에 있던 도한이 그 손을 낚아채 꽉 잡았다.


“내 여자 친구 번호는 알아서 뭐 하게.”

“……네? 여자 친구요?”

재성은 넋이 나간 얼굴로 도한과 사랑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입을 떡 벌렸다.


“그래. 알아서 뭐 할 거냐고.”

“둘이 사귀는 사이예요?”

“보면 몰라?”

도한이 잡고 있는 손을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사랑은 겨우 웃음을 참았다.

유치하지만 역시 기분이 좋았다.

질투하는 남자 친구를 보는 게 이렇게 뿌듯할 수가.


“그, 그렇구나. 죄송해요. 형 여친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

둘이 안 어울린다는 말이 재성의 얼굴에 쓰여 있어 도한은 미간을 좁혔다.


“내 이상형이 곰 같은 여자라.”

그러니 저리 비키라는 듯, 도한은 재성을 남겨 두고 사랑과 함께 도서관 계단을 내려갔다.


“내가 곰이에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좋은 소리는 아닌 것 같아 사랑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여우지. 그걸 한재성이 몰라봐서 다행이고.”

이건 또 무슨 소리래.

계속해서 뜻 모를 말만 하던 도한이 갑자기 그녀 쪽으로 홱 시선을 돌렸다.

사랑은 질투로 활활 타오르는 그의 두 눈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다른 남자한테 전화번호 알려 주지 마.”

“알려 주면 어쩔 건데요?”

사랑은 일부러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약 올렸다.

그녀의 도발에 도한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남자 앞에서 키스해 버릴 거야.”

사랑은 순간 얼어붙었다가 얼른 입꼬리를 내렸다.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눈길이 정말로 제 입술로 향해 있었다. 사랑은 재빨리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를 놀린 죄로 지금 당장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 * *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서며 지우가 사랑에게 물었다.


“주말에 집에 내려갈까 하는데 같이 안 갈래?”

“갑자기 집에는 왜? 무슨 일 있어?”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개강하고 정신없어서 여태 못 내려가 봤잖아.”

“그래. 나도 가지, 뭐.”

사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태훈을 마주쳤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그가 지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늘 수업 다 끝났어?”

“네. 이제 저녁 먹으러 가려고요.”

“좋겠다. 나는 하나 더 남았는데. 참, 주말에 네가 보고 싶다던 영화 개봉하더라. 그때 약속 있어?”

“사랑이랑 집에 내려가기로 했는데.”

“그래? 그럼 평일에 보러 갈까?”

“네. 수요일에 알바 안 하니까 그날 가요.”

태훈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사랑이 너도 집에 간다고?”

“네. 왜 그러세요?”

태훈이 마치 가면 안 될 것처럼 말하자 사랑은 의아했다.


“도한이 생일이 토요일이잖아. 몰랐어?”

“생일이요?”

“응.”

사랑은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본인이 말을 안 해 주니 알 수가 있나.

물어본 적이 없어서 미안하면서도, 당장 생일이 주말인데도 알려 주지 않은 도한에게 서운했다.

태훈에게 듣지 않았다면 아마 끝까지 모른 채로 지나갔을 거다.

도한이 직접 말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여태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니.

사랑은 조금 전 지우와 선약을 했지만 지킬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남자 친구의 생일을 그냥 지나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지우야. 집에는 다음 주에 가면 안 될까?”

“그래. 그러자.”

“미안.”

“도한 오빠 생일이라는데 할 수 없지.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지우는 이해했다.

저라도 남자 친구의 생일엔 함께 보내고 싶을 테니까.


“근데 너 도한 오빠한테 선물은 뭐 할 거야?”

“선물? 그러게. 뭐 하지? 태훈 오빠, 무슨 선물을 해야 좋아할까요?”

사랑은 처음 하는 연애라 그런 쪽으로는 무지했다.

남자들이 여자 친구한테 어떤 선물을 기대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글쎄. 지도한이 뭘 받고 좋아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아, 도한 오빠는 그동안 선물 많이 받았겠구나.”

“어? 그, 그게…….”

태훈은 실수했다 싶어 말을 더듬었다.

워낙 인기가 많은 친구라 여자들로부터 선물 받는 게 일상이어서 저도 모르게 툭 내뱉고 말았다.


“사랑이 네가 주는 건 뭐든 좋아할 거야.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도한에게 사랑은 특별한 것 같으니 아마도 지금까지와는 다르지 않을까.

태훈이 어색하게 웃자 사랑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도한의 생일 선물로 뭘 준비해야 할지 벌써부터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 * *

사랑은 일주일 내내 선물 고민을 했다.

첫 남자 친구의 생일인 만큼 특별한 걸 주고 싶었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건 직접 만든 인형 열쇠고리였다.

아마도 이런 선물은 누구도 주지 않았을 거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무사히 선물은 완성했으나 문제는 도한이 아직까지도 그의 생일을 말해 주지 않았다는 거였다.

당장 내일이 생일인데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사랑은 그가 먼저 말해 주길 기다렸지만 이쯤 되니 포기해야 했다.

할 수 없이 도한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녀가 슬쩍 운을 뗐다.


“내일 주말인데 뭐 해요?”

대체 언제까지 말을 안 해 줄 작정인가 싶어 사랑은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약속이 있어.”

그녀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생일이라고 말은 안 해 줘도 당연히 저와 같이 시간을 보낼 거라 여겼는데 조금 충격이었다.


“누구랑요?”

“친구들. 전에 다니던 대학 동기.”

“점심에요?”

“저녁 같이 먹기로 했어.”

점심에 잠깐 만나는 것도 아니고 저녁 약속이라니.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자 도한이 설명을 덧붙였다.


“월급 탔다고 밥 산다고 해서. 곧 해외 출장이라 내일밖에 시간이 안 된다고 갑자기 연락이 왔어.”

도한은 주말에 선약이 있다는 걸 사랑에게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했다.

데이트는 일요일에 해도 되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실망한 표정을 보니 내일 저를 만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나 난감해하자 사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일 점심은 저랑 같이 먹어요.”

이미 약속을 잡았다는데 어쩌겠는가.

사랑은 내일 꼭 도한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어서 잠깐이라도 그를 만나고자 했다.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고, 그의 집에서 케이크에 초를 꽂아 소원을 빌고, 선물도 주고 싶었는데.

상상 속 계획이 모두 무산돼 사랑은 침울해졌다.

그런데 도한이 그마저도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울컥했다.


“점심도 안 돼요? 오빠 생일인데?”

사랑의 억울한 목소리에 도한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어떻게 알았어.”

“태훈 오빠한테 들었어요.”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랑에게 부담이 될까 봐 말하지 않았는데 태훈이 그새 떠벌렸을 줄은 몰랐다.

태어난 걸 한 번도 감사히 여긴 적이 없었기에 그에게 생일은 불편한 날이었다.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날.

달력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나한테 왜 말을 안 해 줘요? 모르고 지나갈 뻔했잖아요.”

“뭐 중요한 날이라고.”

“1년에 딱 하루인데 당연히 중요하죠.”

“어제도 오늘도 1년에 딱 하루야.”

그런 말이 아니지 않냐고 사랑이 눈을 흘겼다.

도한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화가 난 듯 보이는 이사랑은 처음이라 더는 말하지 않았다.

남자 친구의 생일을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을 왜 몰라 주냐고 그녀가 눈빛으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사랑에겐 첫 연애이고 첫 남자 친구라, 도한은 더욱 미안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생일은 불행을 확인하는 날일 뿐이니 신경 쓸 것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제 와서 친구들과의 약속을 취소하겠다고 하면 그것 역시 부담스러워할 테고.

그가 고민하는 사이 긴 정적이 흘렀다.

사랑은 속상한 얼굴을 하고서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도한이 먼저 침묵을 깼다.


“내일 같이 갈래?”

예상치 못한 말에 사랑이 잔뜩 커진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언제 화가 났었나 싶게 그녀의 표정엔 기대감이 역력했다.


“정말 같이 가도 돼요?”

“너만 불편하지 않으면 여자 친구 데려간다고 할게.”

“하나도 안 불편해요. 갈게요. 같이 갈래요.”

사랑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한이 친구들에게 저를 소개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여자 친구 자격으로 가는 거라서.

그의 생일을 함께 축하해 줄 수 있어서.

뿌듯하고 기쁜 마음이 흘러넘쳐 사랑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도한은 활짝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신 안 볼 것처럼 눈길도 주지 않더니, 같이 가겠느냐는 한마디에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내일 그녀를 혼자 두고 가 버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

도한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사랑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까.

* * *

다음 날, 도한은 동기에게 전화해서 여자 친구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 소식에 흥분한 동기가 사랑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도한은 직접 보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저녁에 만나기로 한 동기는 두 명으로, 서로 연인인 사이였다.

한국대에 다녔을 때 친하게 지냈었는데, 하필이면 오늘밖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해서 생일에 약속을 잡았다.

정말 출장 때문인지, 그 핑계로 생일 축하를 해 주고 싶어서 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생일이니까 만나자고 하면 그가 거절할 걸 알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컸다.

도한은 그걸 알면서도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놀고먹는 대학생이 바쁘신 직장인의 스케줄을 바꾸게 할 순 없으니까.

덕분에 그는 동기들에게 처음으로 여자 친구를 소개하게 됐다.

도한은 외출 준비를 마치고 차 키를 챙겨 집을 나섰다.

평소였다면 지하철을 탔겠지만 오늘은 차를 가져갈 생각이었다.

혜리를 챙기고 다니라면서 경철이 사 준 차라 그동안은 아무도 태우지 않았었다.

개인적인 일로는 그 차를 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하루만 예외를 두기로 했다.

제 친구들을 만나 긴장할 사랑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도한은 원룸 건물에서 나와 주차된 차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하는데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를 든 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안 늦었죠?”

도한은 사랑의 물음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분명 이사랑이 맞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가 아니었다.

5년 후의 그녀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스무 살의 신입생이 아닌, 스물다섯의 사회 초년생인 이사랑과 마주하는 듯했다.

평소보다 진한 화장과 단정한 원피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하얗게 드러난 목선.

어색하기는커녕 지나치게 잘 어울려서 도한의 가슴이 떨렸다.

동시에 그녀가 지금 스무 살인 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제 여자 친구가 늘 이런 모습이라면 세상 모든 남자들을 경계하느라 불안해서 살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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