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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보고 싶었어 (27/63)


#26화. 보고 싶었어
2023.03.31.


사랑은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와 1층 현관문을 열었다.

핸드폰을 켜고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갑자기 커다란 손이 불쑥 나타나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깜짝 놀란 사랑이 고개를 들자 눈앞에 도한이 있었다.


“여기 있었어요?”

“집에 들어가는 길에 전화한 거야.”

바로 앞에 선 그에게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얼굴을 살펴보니 꽤 취한 것 같았다.

왜 이 오빠는 취해도 멋있지?

살짝 풀린 두 눈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뭐냐고.

사랑은 이 와중에 그에게 또 반하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술 많이 마셨어요?”

“별로.”

“아닌 거 같은데.”

“왜. 취한 것 같아?”

“네.”

“어딜 봐서.”

도한은 평소보다 많이 마시긴 했지만 취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같이 마신 친구들도 멀쩡해 보인다고 했는데, 왜 이사랑만 아니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서 미간을 좁혔다.


“맨정신으로는 그런 말 안 하니까요.”

“그런 말이 뭔데.”

“보고 싶다고.”

도한이 대꾸하지 않자 사랑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 왜 그런 말을 지우한테 해요?”

“누가 내 전화 피하래?”

이번엔 그녀가 침묵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유가 뭐야.”

“무슨 이유요.”

“거짓말까지 하면서 내 전화 안 받은 이유.”

“거짓말인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예요?”

“너 이 시간에 안 자잖아. 과제나 하고 있었겠지.”

우리 집에 감시 카메라라도 설치했나.

아니면 도청 장치?

사랑은 이상한 의심이 들 정도로 그의 직감이 무서웠다.

이제 도한에게는 거짓말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빠가 화났을 것 같아서요.”

“내가 왜.”

“낮에 학관에서 제가 오빠 부려 먹었잖아요…….”

사랑은 지금이라도 해명을 하고 싶었다.

그 일로 밤에 잠도 못 잘 뻔했는데, 이렇게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땐 정말 죄송했어요.”

“사과 안 해도 돼. 김태훈 짓인 거 다 아니까.”

바닥에 시선을 내리고 있던 사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었다.

어쩐지 그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네 생각이었다고 해도 상관없고.”

“네?”

“나 마음껏 부려 먹어도 된다고.”

사랑이 넋을 놓고 눈만 깜빡이자 도한이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방향이 그의 집 쪽이라 사랑은 당혹스러웠다.

잠깐 사이에 별별 상상을 다 하는데 다행히 그냥 지나쳤다.


“공원.”

“거긴 왜요?”

“집에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

“……왜요?”

사랑이 도한을 슬쩍 쳐다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히 침이 꼴깍 넘어가고 가슴이 뛰었다.


“그럼 집으로 갈까?”

도한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심히 말했다.

알면서 모른 척하지 말라는 듯이.

그제야 사랑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공원 가요, 공원. 집보다는 공원이 좋죠. 나무도 많고 사람도 많고.”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그녀를 보며 도한이 피식 웃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사랑을 제집으로 데려가고 싶은 욕심이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하지만 그러기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그녀를 배려하지 못할 것 같아 애초에 집에 들이지 말아야 했다.

후회 없는 내일을 맞이하려면 그에게는 이 선택이 최선이었다.

공원까지 가는 내내 사랑은 도한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오빠 술 마시니까 사람이 좀 달라진 것 같아서요.”

“어떻게.”

“착하게.”

술을 안 마셨을 땐 나쁜 놈이라는 뜻일까. 엉뚱한 그녀의 말에 도한은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물론 좋다는 거죠.”

“착한 남자 좋아해?”

“아니요.”

그렇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사랑의 대답에 그가 의아해했다.


“착하든 나쁘든 오빠가 좋은데요.”

사랑은 이상형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지도한이 좋을 뿐.

예상치 못한 그녀의 고백에 어느새 도한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매번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사랑인 거 같아서.

오늘따라 그녀의 마음에 미안했다.

도한이 우뚝 발을 세우자 사랑도 그를 따라서 멈췄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남자 한 명이 뛰어왔다.

뭐가 그리 급한지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달려오는 남자는 곧 사랑과 부딪칠 것만 같았다.

점점 커지는 발소리에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사랑은 미처 피할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순간 도한이 움직여 그녀를 감쌌다.

퍽.

그 남자의 가방에 맞았는지 큰 소리와 함께 도한이 몸을 움찔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사랑이 급히 빠져나와 그를 살폈다.


“괜찮아요?”

다치기라도 했는지 그가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아.”

도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와 부딪쳤던 남자가 연신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가 보세요.”

남자가 경황이 없어 보여 도한은 그를 그냥 보냈다.

그런데 팔이 따끔거렸다.

남자의 가방에 부딪히면서 날카로운 무언가에 맨살이 스친 것 같았다.

확인을 해 보려고 도한이 고개를 내리는데 사랑이 먼저 그의 팔을 보고는 흥분했다.


“피 나잖아요! 다친 거예요?”

“그런가 봐.”

“자기 팔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사랑은 목소리를 높이고는 아까 그 남자를 쫓아갈 기세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도한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 가.”

“아까 그 사람 불러와야죠. 이렇게 다쳤는데.”

“병원 갈 정도도 아닌데 뭘.”

별거 아니라는 말에 사랑은 속이 상했다.

핸드폰만 겨우 들고나오는 바람에 피를 닦을 만한 것도 없었다.


“편의점에 다녀올 테니까 있어 봐요.”

“괜찮다니까.”

사랑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기어이 편의점에 다녀왔다.

돌아와 보니 도한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옆에 앉아 상처에 약을 발랐다.

저 때문에 다친 거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랑은 그와 부딪쳤던 남자에게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가방에 뭐가 있었던 거야.”

도한의 상처를 보던 그녀는 제 팔이 쓰라린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꽤 아플 것 같은데, 취한 탓인지 원래 무감한 건지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뭐가 너 때문이야.”

밴드를 붙이는 사랑의 손이 작게 떨렸다.

눈물이 고여서 시야가 흐려진 탓이었다.


 


“그러게 왜 나서요. 그냥 가만히 있지.”

“그럼 네가 다치잖아.”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겠어요.”

사랑이 훌쩍이며 눈물을 쓱 닦았다.

이 정도인 게 천만다행이지,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무서웠다.


“네가 다쳤으면 아까 그 X끼는 내 손에 죽었어.”

밴드와 약을 정리하던 사랑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 그가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가늠하기란 어려웠다.

그런데 만약 내가 다쳤다면 그 남자는 자기 손에 죽었을 거라니.

도한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어 낯설었다.


“오빠 욕도 할 줄 알아요?”

사랑은 민망한 마음에 다른 말이 나오고 말았다.

왠지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욕이라고.”

남자들끼리 이 정도는 애교였다.

도한은 그나마 그 이외의 욕은 하지 않는 편이라 사랑의 반응이 억울했다.

하지만 곧 그 말을 괜히 했다며 후회했다.

이사랑에게만큼은 조금의 거친 모습도 보여 주고 싶지가 않았다.


“미안. 조심할게.”

그가 사과할 줄은 몰랐기에 사랑은 조금 놀랐다.

정말 술 때문인지 그가 순해졌다.

그런 모습이 적응되지 않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으니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고 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어.”

취기 때문인지 도한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그와 마주한 사랑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도 가끔 이 사람이 제 남자 친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처럼 그가 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순간이 그랬다.

전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술 마시면서 온통 네 생각뿐이었어. 아니, 오늘 수업 들으면서도 교수님 말씀은 하나도 안 들리더라. 너 보고 싶어서.”

사랑의 두 눈이 잔뜩 커졌다.

머릿속이 하얘질 만큼 달콤한 말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손잡고 싶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미친놈처럼 계속 그랬다고 내가.”

이 오빠, 정말 술 마시고 온 거 맞나?

술이 아니라 뭐 이상한 거라도 먹은 게 아닐까?

아니면 팔을 다치면서 머리도 다쳤던 건가.

하지만 그녀에게 고정된 도한의 두 눈에는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진지해서 취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아닌가? 설마 이게 술주정인가?

사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관찰했다.


“오빠.”

“왜.”

“내가 누군지는 아는 거죠?”

“뭐?”

도한은 어이가 없어 인상을 구겼다.

늘 사랑이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오늘은 제가 얘기해 주려고 했다.

테스트할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못 믿고 있으니 진심을 전하고자.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사고가 나서 도한은 타이밍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이제라도 마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사랑에게 주정뱅이 취급을 당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한테 하는 말이 맞나 싶어서요.”

“그럼 내가 이런 얘길 누구한테 해. 당연히 내 여자 친구한테 하지.”

“평소에나 잘하지.”

사랑의 중얼거림에 도한이 헛숨을 터트렸다.

내가 술을 마신 건지 이사랑이 취한 건지 모르겠다며.


“일어나요. 집에나 가게.”

낯간지러운 말을 듣고 있으려니 사랑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차라리 무심한 도한이 더 나은 것 같았다.

다정한 그는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그녀가 그만 일어나려는데 곧 손목을 붙잡혔다.


“아직 얘기 안 끝났어.”

“뭐가 더 남았어요?”

여기서 더 오글거릴 게 있냐는 듯 사랑이 화들짝 놀라자 도한이 눈썹을 찌푸렸다.


“알았어요. 하세요. 들을게요.”

이러다 그가 진짜 화를 낼 것 같아 사랑은 애써 활짝 웃었다.

도한은 마음을 가라앉힐 겸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사랑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가슴에서 꺼냈다.


“좋아해.”

이번엔 또 어떤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할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그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너 좋아해. 아주 많이.”

한 번으로 끝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더 자주 이 말을 해 줬어야 했다고.

도한은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전에도 말했는데 네가 잊어버린 거 같아서.”

“그, 그걸 어떻게 잊어요.”

사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직 여름은 오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온몸이 뜨거운지 모를 일이었다.


“근데 테스트는 왜 해.”

“그거야, 태훈 오빠랑 지우가 궁금하다고 해서요. 오빠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물이랑 냅킨 가져다주면 많이 좋아하는 건가?”

“그럼 어떻게 알 수 있는데요.”

겉으로 다정함이 드러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태훈이 일을 꾸민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사랑은 나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랑 그렇게 키스를 했는데도 모르면 어떡해.”

“오빠는 타고난 거잖아요. 그리고, 나한테만 했겠나, 뭐.”

예전 여자 친구들하고도 많이, 게다가 잘했겠지.

그러니 키스로 애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너 지금 질투해?”

“제가요? 아닌데요. 제가 무슨 질투를…….”

“억울하네.”

“뭐가요?”

“나만 너 질투하니까.”

아무래도 오늘 이 오빠가 작정을 했나 보다.

어떻게 하는 말마다 사람 마음을 간질이고 설레게 하는지.

사랑은 이게 술주정이라면 어쩌다 한 번쯤은 그가 취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말로 억울해요. 내가 다른 남자랑 뭘 했다고.”

“정윤재랑 둘이 술 마셨잖아. 나하고는 안 마셨으면서.”

그러네. 둘이서 술을 마신 적은 없네.

반박할 수 없는 사랑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정윤재 군대 가면 편지도 써 줄 거잖아. 나한테는 안 써 줬으면서.”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도한이 군대에 있을 때는 그를 알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편지를 쓴단 말인가.

사랑은 어이가 없어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네가 처음 본 남자한테 전화번호 주는 거. 다른 남자한테 당구 배우는 거. 다른 남자한테 인사하는 거, 웃어 주는 거, 친하게 지내는 거. 전부 다 싫어.”

세상에. 이 남자 질투심이 장난이 아니다.

지난번 윤재와 술을 마셨던 날 이런 모습을 보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참았던 감정을 쏟아 내는 도한의 모습에 사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그에게 이토록 신경 쓰이는 존재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와. 그럼 앞으로 더 질투 나게 만들어야겠다.”

“뭐?”

“그래야 오빠가 날 좋아한다고 느낄 것 같아요.”

도한이 기가 막힌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것도 많은데 왜 하필 질투로.”

“나는 그게 가장 마음에 드니까요.”

해맑게 웃는 그녀를 보며 도한은 할 말을 잃었다.

차라리 키스를 더 해 달라고 하지.

왠지 앞으로 질투의 화신이 될 것만 같은 불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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