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지도한 테스트 (26/63)


#25화. 지도한 테스트
2023.03.27.


사랑과 지우는 학생회관 식당 앞에서 도한과 태훈을 만났다.

같이 점심을 먹기로 미리 약속을 했었다.

네 사람 모두 식권을 구매하고 음식을 받아왔다.

점심시간이 막 시작돼 사람이 몰려 구석진 테이블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어? 수저를 안 가지고 왔네.”

어수선한 분위기라 정신이 없어 사랑은 수저와 젓가락을 깜빡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다시 가지러 가려는데 옆에서 도한이 먼저 일어섰다.


“앉아 있어.”

그가 저만치 멀어지자 맞은편에 있던 지우와 태훈이 눈을 크게 떴다.


“와. 도한 오빠 의외다.”

“그러게. 나도 놀랐다.”

사랑도 같은 처지라 도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때문에 번거롭게 해 미안하기도 했다.


“사랑아, 너 오늘 지도한 테스트 한번 안 해 볼래?”

“테스트요?”

태훈은 재미있는 일이라도 꾸미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지우와 사랑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말똥거릴 뿐이었다.


“저 지독한 놈이 너한테 과연 얼마나 빠져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하나 마나 한 테스트인 것 같아 사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히려 지우가 나서며 관심을 가졌다.


“궁금해요, 궁금해.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태훈은 도한의 위치를 확인하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녀들에게 소곤거렸다.


“도한이 오면 이번엔 물 좀 갖다 달라고 해 봐.”

“네? 수저 가져오는 것도 한참 걸리는데 또 갔다 오라고 하라고요?”

사랑은 그를 두 번이나 고생시킬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가 제 말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밥도 아직 안 먹었는데 무슨 물이야.

분명 다 먹고 나가면서 마시라고 하겠지.


“그리고 물 가져오면 다음엔 냅킨도 갖다 달라고 해.”

“또요?”

그녀가 기겁을 하자 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 번이나 네 부탁 들어줄 정도면 너한테 홀딱 빠진 거지, 뭐.”

“그래도 그건 좀. 저 도한 오빠 무서운데요. 화내면 어떡해요.”

사랑이 울상을 짓자 지우가 끼어들었다.


“남자 친구가 그 정도도 못 해 주냐 뭐. 도한 오빠가 어떻게 나올지 너도 궁금하지 않아?”

“그러다 나한테 실망했다고 헤어지자고 하면 그땐 어떻게 해.”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나올까.”

지우가 손을 내젓자 태훈이 그녀들에게 도한이 오고 있다고 속삭였다.

순식간에 셋은 자세를 바로 했다.

도한이 자리로 돌아와 사랑에게 수저와 젓가락을 건넸다.


“고마워요.”

그사이 지우가 테이블 아래로 사랑의 발을 툭 찼다.

빨리 말을 해 보라는 뜻이라는 걸 알아들은 사랑은 머뭇거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기. 오빠.”

이제 막 밥을 한 수저 떠올린 도한이 왜 그러냐는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물 좀 가져다주시면 안 돼요?”

사랑은 긴장한 탓에 주변의 소음이 갑자기 사라진 기분이었다.

도한이 아무 말 없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어 식은땀이 흐르고 눈빛이 흔들렸다.


“아, 아까부터 목이 말라서요.”

“알았어.”

그녀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늘어놓았는데 도한이 일어섰다.


“너희도 갖다줘?”

“아니. 난 됐어.”

“저도 괜찮아요.”

태훈과 지우가 차례로 대답하자 도한은 곧장 정수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랑은 연신 심호흡을 했다.


“세상에. 오빠, 도한 오빠 원래 연애할 때 저래요?”

“잘은 모르지만 아닐걸?”

식당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아 반대쪽에 있는 수저통이나 입구에 있는 정수기까지 가려면 한참이었다.

그걸 마다하지 않고 벌써 두 번이나 걸음을 옮기는 도한이 지우는 대단해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지도한이라 더욱 놀랄 일이었다.


“사랑아, 다음엔 냅킨. 알겠지?”

“그만하자, 이제. 오빠 밥 언제 먹으라고.”

“아직 시간 많은데, 뭐. 딱 한 번만 더 해 봐. 이번에도 성공하면 진짜 인정.”

“뭘.”

“도한 오빠가 너한테 진심이라는 거.”

사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자신이 없는데 궁금하긴 했다.

어느새 도한이 돌아왔고 사랑은 물컵을 받고선 미친 척 말을 뱉었다.


“냅킨도 갖다주세요.”

두 번도 어려웠는데 세 번은 더욱 그랬다.

사랑은 심장이 쿵쾅거려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릴 것 같았다. 부러 목소리에 힘을 줬더니 부탁이 아닌 화를 내는 것처럼 들렸다.

자신이 말하고도 흠칫 놀랐다.

아. 난 몰라.

이제 어떡하면 좋아.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너는 손발이 없냐고 할 것만 같았다.

사랑이 괜히 저 두 사람 말을 들었다고 후회하고 있을 찰나에 옆에서 그가 일어났다.


“기다려.”

도한이 정말로 냅킨을 가지러 가자 남은 세 사람은 넋을 놓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말도 안 돼. 저거 지도한 맞아?”

“웬일이야. 도한 오빠가 저렇게 자상하다고?”

태훈과 지우가 기막혀하는 동안 사랑은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테스트는 대성공이었다.

* * *

학생회관을 나온 도한은 태훈과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지우와 사랑은 교양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로 간 후였다.


“김태훈.”

도한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태훈이 고개를 돌렸다.


“애한테 이상한 짓 좀 시키지 마.”

“눈치 빠른 놈. 내가 시킨 건 어떻게 알았냐.”

조금 전의 테스트를 두고 한 말이라는 걸 알아챈 태훈이 웃으며 대꾸했다.


“너 말고 누가 그런 짓을 해.”

도한은 사랑이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거짓말을 못 하는 그녀라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일부러 부려먹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 다녀왔다.

냅킨을 부탁했을 땐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더라.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김태훈 짓이 분명했다.


“어쨌든 용케 테스트 통화했다, 너.”

“그런 테스트를 왜 하는 건데.”

“사랑이가 너 어려워해서.”

“뭐?”

도한이 멈춰 서서 태훈을 바라봤다.


“너 수저 가지러 갔을 때 사랑이가 안절부절못하더라고. 미안해서.”

태훈은 그런 후배가 안쓰러워서 테스트를 해 보자고 제안했다.

어쩐지 도한이라면 사랑이 원하는 걸 다 들어줄 것 같아서.

아닐 수도 있었지만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내가 이것저것 부탁해 보라고 했더니 네가 무섭다더라. 그러다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냐고.”

도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은 하나도 받지 못한 듯했다.


“그러니까 사랑이한테 잘하라고.”

거짓말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제 앞에서는 늘 생글생글 웃었으면서, 정작 그녀의 마음은 웃지 않고 있었다.

도한은 어이없는 테스트였지만 그나마 통과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집에서 노트북으로 과제를 하고 있던 사랑이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닥에 엎드려 핸드폰을 보고 있던 지우가 그 소리에 눈을 들었다.


“왜 그래. 뭐가 잘 안 돼?”

과제가 어려운가 싶어 지우가 궁금해하는데, 사랑이 노트북을 닫고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한 오빠 말이야.”

“오빠가 또 왜. 너한테 뭐라고 했어?”

지우는 도한의 이름을 들으면 자동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낮에 학생회관 식당에서 사랑에게 자상한 모습을 봤는데도 그의 이미지는 여전히 ‘지독한’이었다.


“아니. 아무래도 그 테스트 괜히 한 것 같아서.”

“대성공이었는데 왜.”

“그 이후로 연락이 없어. 화난 거 아닐까?”

사랑은 오후 내내 불편했다.

점심을 먹고 바로 강의가 있어서 문제의 테스트를 끝내고 도한과 식당 앞에서 헤어져야만 했다.

같이 있었다면 해명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녀가 수업이 끝나면 이번엔 도한이 수업이 있고.

저녁엔 또 그가 약속이 있고.

그런 식으로 엇갈리다 보니 8시인 지금까지 그것에 관해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럼 네가 먼저 전화해 봐.”

“진짜 화났으면 어떡해.”

“도한 오빠가 그렇게 무서워?”

지우가 답답한 마음에 일어나 앉았다.

저렇게 벌벌 떨면서 대체 어떻게 사귀기로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빠가 무서운 게 아니라 날 싫어할까 봐 그러지. 안 그래도 내가 더 좋아하는데.”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랑은 벌써 이별이 두려웠다.

자신과 언제 헤어져도 도한은 상관없을 것만 같아서.

그에게 조금이라도 잘못 보이면 가차 없이 저를 떼어 낼 것 같아서.


“아까 보니까 오빠도 너 좋아하던데, 뭐.”

지우는 사실 지금이라도 사랑이 도한과 그만 만났으면 싶었다.

저렇게 불안해하면서까지 왜 만나야 하는지.

혼자서 끙끙 앓는 친구가 안쓰러웠지만 안 그래도 마음 안 좋은 애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꾹 참았다.


“그래. 좋아하지. 그러니까 사귀자고 했겠지. 근데 그게…….”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지 않겠냐고 얘기하려는데 핸드폰이 울려 말을 멈췄다.

사랑은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흠칫 놀랐다.


“어, 어떡해. 도한 오빠야.”

“뭘 어떡해. 빨리 받아 봐.”

핸드폰이 마치 금방이라도 터져 버리는 폭탄이라도 되는 듯 사랑은 두 손 위에 올려놓고 어쩔 줄을 몰랐다.


“나 못 받겠어.”

“뭐?”

“안 받을래.”

사랑이 고개까지 저으며 핸드폰을 책상 위에 툭 내려놓자 지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사이 전화가 끊겼다.

그런데 다시 벨이 울렸다.


“정말 안 받을 거야?”

지우가 물어보는 동안에도 전화가 끊겼다가 또 울렸다.

이 오빠 진짜 지독하다.


“받을 때까지 할 것 같은데?”

사랑은 그제야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좀 받아 봐.”

“뭐? 내가?”

“응. 네가 받아서 나 잔다고 해.”

“그냥 네가 받…….”

지우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랑이 통화 버튼을 눌러 버렸다.

할 수 없이 지우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저 지우예요.”

지우가 이렇게까지 해야겠냐며 사랑에게 눈을 흘기는데 나른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 왜 네가 받아.

“사랑이 조금 전에 잠들었거든요.”

- 벌써?

“네. 오늘 좀 피곤하다고…….”

지우는 핸드폰 스피커를 손으로 가리고 사랑에게 ‘술 마신 거 같은데?’라고 속삭였다.

사랑은 직접 전화를 받지 못해서 아쉬웠다.

술 취한 목소리는 한 번도 못 들어 봤는데.

취기가 오른 도한을 본 적도 없어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도한에게서 말이 없자 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사랑이 일어나면 제가 전해 줄게요.”

사랑은 그가 전화한 용건을 직접 듣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혹시라도 식당에서 있었던 일 때문은 아닌가 싶어서 자신이 통화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숨을 죽였다.


- 보고 싶어서.

“……네?”

잘못 듣기라도 한 것처럼 지우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되물었다.

앞에서는 사랑이 입 모양으로 ‘왜?’를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


-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아. 그, 그렇구나. 아, 알겠어요. 그, 그렇게 전할게요.”

지우가 연신 말을 더듬고 전화를 끊자 사랑이 득달같이 물었다.


“왜? 뭐라는데. 다신 자기 볼 생각도 하지 말래? 오빠 화 많이 난 것 같아?”

사랑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지우를 재촉했다.

대체 무슨 말을 들었기에 얼굴이 사색이 됐는지.

꽤 충격적인 게 틀림없었다.


“도한 오빠가…….”

“어. 오빠가 뭐.”

“너…….”

“나 뭐. 오빠가 나 뭐, 지우야.”

답답해 죽겠다며 사랑이 지우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무조건 내일 도한에게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는데 지우가 말했다.


“보고 싶대.”

“뭐? 뭐가 보고 싶다고?”

“너.”

“……나?”

사랑이 넋을 놓다가 뒤늦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빠가 너 보고 싶어서 전화했대.”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사랑이 놀라서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술 마시고 나한테 전화한 이유가 화가 나서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어서라고?

이제야 정확히 이해한 그녀가 얼굴을 구겼다.


“하아. 내가 받을걸.”

저가 받았어야 했다.

보고 싶다는 그 말을 직접 들었어야 했다.

이렇게 아까울 수가. 이렇게 억울할 수가.

사랑은 지우의 손에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가져와 곧장 도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잔다고 했잖아.”

“아 몰라. 깼다고 하지, 뭐.”

통화 버튼을 다급히도 누르는 친구를 보며 지우는 헛숨을 터트렸다.

도한이 전화를 받았는지 금세 사랑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예요.”

- 조금 전에 잠들었다며.

“벨소리에 깼어요.”

- 거짓말 잘하네, 이제.

거짓말인 걸 어떻게 알았나 싶어 사랑은 뜨끔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디예요?”

- 왜.

“나 보고 싶다면서요.”

- 넌 내 목소리도 듣기 싫어서 강지우한테 전화 넘겼잖아.

귀신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중요한 게 아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암튼 어디냐고요.”

- 나올 거 아니면 물어보지 마.

“나갈게요. 나가고 있어요.”

사랑은 재빨리 일어나 신발부터 신었다.

그런 그녀를 지우가 황당하게 쳐다봤다.


“10분만 기다려요.”

- 내가 어디 있는 줄 알고 10분이래.

“학교 근처겠죠, 뭐. 일단 나가서 다시 전화할게요.”

사랑은 전화를 끊자마자 지우에게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학교까지 걸어서 20분이나 걸리는데 어떻게 10분 만에 가겠다는 건지.

지우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쟤 혼자 뭘 걱정한 거야.”

오늘의 테스트로 도한이 자길 싫어할까 봐 불안해하던 사랑을 떠올리자 지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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