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다른 남자랑 술 마시지 마
(25/63)
24화. 다른 남자랑 술 마시지 마
(25/63)
#24화. 다른 남자랑 술 마시지 마
2023.03.24.
“고3 때는 시간이 그렇게 안 가더니 대학 오니까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냐.”
취기로 얼굴이 붉어진 사랑이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5월이다.
아니지. 그러고 보니 3개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구나.
그중 가장 큰 사건은 당연히 남자 친구를 사귄 일이다.
그것도 첫눈에 반해서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 말도 안 되게 사귀게 된 어마어마한 사건.
대학에 가면 남자 친구부터 사귈 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는데 진짜 이루어지다니.
사랑은 아직도 꿈만 같았다.
“누가 들으면 너 곧 졸업하는 줄 알겠다.”
집에 데려다주느라 그녀의 옆에서 발을 맞춰 걷던 윤재가 피식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성으로 좋아했었는데 이젠 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어느 동성 친구보다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그런 사이.
평생의 친구를 만난 것 같아 윤재는 만족스러웠다.
“졸업? 와, 그건 말만 들어도 까마득하다.”
“까마득하지. 나는 군대도 다녀와야 하는데.”
군대라는 말에 거의 집 앞까지 다가온 사랑이 멈춰 섰다.
“너 언제 입대하는데?”
“1학년 마치고 다녀오려고. 어차피 가야 할 거 빨리 갔다 오는 게 좋잖아.”
지금 당장 간다는 것도 아닌데 사랑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벌써 친구를 잃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울한 거로 치면 본인이 더할 테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 군대 간다니까 서운해?”
윤재는 강의실에서 처음 사랑을 봤을 때 귀엽다고 생각했다.
매주 화요일마다 만나다 보니 점점 그날이 기다려지고 설렜다.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마음이 자라났다.
그런데 이젠 여동생 같은 느낌이랄까.
어렸을 때부터 여동생 있는 친구가 부러웠던 윤재는 사랑과 있으면 꼭 그녀의 오빠가 된 기분이 들었다.
“어. 서운해.”
“오. 이사랑이 나를 그렇게나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야?”
“너 없으면 체대 식당 못 가잖아.”
“뭐?”
잠깐이나마 감동한 윤재가 눈썹을 팍 찌푸렸다.
“나한테 여자 동기 좀 소개해 주고 가라. 같이 체대 가서 밥 좀 먹게.”
사랑이 약을 올리자 윤재가 괘씸하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군대 가면 편지 써 주겠다는 말은 못 할망정 뭐가 어쩌고 어째?”
분이 안 풀린 윤재가 사랑의 목에 팔을 감아 괴롭혔다. 그 느낌이 간지러웠던 사랑이 까르르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 편지 쓸 테니까 이것 좀 놔 봐.”
“편지는 무슨. 나보다 체대 식당 밥이 더 중요한 애한테 뭘 바라냐.”
“진짜 쓸게. 약속해, 약속.”
겨우 빠져나온 사랑이 얼른 윤재에게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제 됐지? 편지 꼭 쓸게. 두 번, 세 번 쓸게.”
“1년 넘게 있는데 왜 두 번, 세 번이야. 이십 번, 삼십 번 써.”
“야, 내가 뭐 네 여친이냐? 너 군대 갈 때 여친 생기면 내 편지에 답장도 안 할 거면서.”
“군대 가기 전에 무슨 여친을 사귀냐. 양심이 있지.”
“그건 너도 모르는 일이고. 갑자기 첫눈에 반하는 여자가 있을지 어떻게 알아.”
“너처럼?”
“응.”
“그래도 난 안 사귈래.”
“왜?”
“사귀고 군대 가 버리면 남은 사람은 외로울 거 아냐.”
“오, 정윤재. 좀 멋있는데?”
친남매처럼 티격태격하며 윤재와 다시 발걸음을 옮긴 사랑이 얼마 가지 않아 우뚝 멈췄다.
어두워서 몰랐는데 도한이 집 앞에 서 있었다.
조금 당황한 윤재는 도한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랑에게 인사를 전했다.
“들어가.”
“응. 강의실에서 보자.”
돌아서서 멀어지는 윤재를 도한이 가만히 지켜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두 사람은 훨씬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둘이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도 모자라 스스럼없이 장난을 칠 수 있는.
손까지 잡았던가. 그것도 사랑이 먼저 정윤재의 손을.
답답한 마음에 잠깐 밖에 나온 도한은 못 볼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친구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속에서 열이 나는 것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았다.
“왜 나와 있어요?”
사랑은 조금 전 윤재와 장난을 친 게 마음에 걸렸다.
바람을 피우다 들킨 것도 아닌데 도한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그런데 그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단둘이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상관하지 않는다더니 사실이었다.
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확인하고 나니 왠지 가슴이 허전했다.
사랑은 내가 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과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건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씁쓸함은 배가 되었다.
“그냥.”
혹시 저를 기다린 건 아닐까 기대했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잔뜩 부풀었던 사랑의 마음에서 바람이 픽 빠졌다.
보고 싶었다는 말은 아무래도 다음 연애에서나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럼 그냥 계세요. 저는 들어가 볼게요.”
사랑이 입을 삐죽 내밀고 돌아섰다.
그러자 도한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돌려세웠다.
왜요. 뭐요.
그녀가 반항 가득한 두 눈으로 올려다보는데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조금 매서워 보였다.
어라? 화났나?
설마 윤재 때문에?
또다시 가슴이 속절없이 두근거리자 사랑은 그럴 리 없다고 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런데 그가 엄청난 말을 내뱉었다.
이 또한 다음 남자 친구에게서나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던.
“너 앞으로는 다른 남자랑 술 마시지 마.”
질투의 말을.
* * *
술을 마신 탓일까.
사랑은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아니, 술 때문이 아니라 방금 들은 말이 도한에게서 나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놀라워 순간 어지러웠다.
그녀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랑 단둘이 술 마셔도 상관 안 한다면서요.”
도한이 대답이 없자 그녀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는, 오빠 여친 아닌 거예요?”
자신의 말을 번복하기가 난처해서 조용히 있던 도한은 어이없는 질문에 헛숨을 터트렸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건지.
잔뜩 얼어붙은 얼굴, 불안에 떨고 있는 눈빛.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나랑 키스까지 해 놓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러니까요.
무려 키스까지 했는데 여자 친구가 아니라고 하면 진짜 나쁜 놈인 거라고요.
사랑은 다행이다 여기면서도, 그럼 아까 한 말은 대체 뭘까 궁금했다.
진짜 질투였나?
도한의 성격상 그건 더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확인은 해야 했다.
“혹시 내가 윤재랑 술 마시는 게 싫어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가 잠시 시간을 두고 말했다.
“어.”
그 짧은 대답에 사랑의 두 눈이 커졌다.
“내가 윤재랑 같이 있는 거 보면 기분 나빠요?”
“그래.”
“정말 내가 윤재…….”
거듭되는 긍정의 대답에 흥분한 사랑이 연신 질문을 퍼부을 때였다. 갑자기 도한이 고개를 내려 입을 맞춰 왔다.
입술을 한껏 물더니 아프지 않게 빨아당기고는 벌어진 입술 사이를 조금 거칠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키스에 놀라 사랑이 휘청하는 바람에 그만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 친구 이름 그만 불러. 듣기 싫으니까.”
명백한 질투였다.
도한의 일그러진 얼굴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사랑은 방금 그가 입을 맞췄을 때보다 더 가슴이 뛰었다.
내가 정말 이 남자의 여자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사귀고 있었으니 진작부터 여자 친구였지만 그 사실이 더 명확해진 느낌이랄까.
마치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지도한의 여자 친구 자격증을 발급받은 것만 같았다.
사랑은 대단한 시험이라도 통과한 듯 기쁘면서도 울컥했다.
“알았어요. 오빠 앞에서는 이름도 안 부르고 둘이서는 술도 안 마실게요.”
사랑은 물기 어린 눈을 하고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 친구의 질투가 고맙고 뿌듯했다.
그만큼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손도 잡지 마.”
“네? 제가 언제 윤, 손을 잡았다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저도 모르게 윤재의 이름을 부를 뻔해서 얼른 말을 삼켰다.
“잡았어. 조금 전에. 네가 먼저.”
사랑은 곰곰이 떠올려 보다가 작게 입을 벌렸다.
“아. 그건 손잡은 게 아니라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한 건데요.”
“무슨 약속.”
“군대 가면 편지 써 주겠다고요.”
“네가 왜.”
“친구니까요.”
“쓰지 마.”
“네?”
“쓰지 말라고. 편지.”
굳은 표정의 도한이 단호하게 말하자 사랑은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질투심이 많은 남자인 줄은 몰랐는데.
그동안은 대체 어떻게 참은 거지?
도한의 낯선 모습이 놀라워 그녀가 넋을 놓는 동안 그가 말을 이었다.
“왜 대답 안 해.”
“그게, 군대 가면 편지 한 통으로도 힘이 된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쓰지 말라고. 네 편지 읽고 다른 남자가 힘내는 거 싫으니까.”
이 오빠가 오늘 정말 작정을 했나.
얼굴은 무표정인데 내뱉는 말들마다 화가 나 보였다.
사랑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달싹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친구인데.”
“그럼 한 번만 써.”
“두 번, 세 번 쓰겠다고 벌써 약속했는데요.”
도한이 눈썹을 찌푸리자 그녀가 재빨리 변명했다.
“그나마 이십 번, 삼십 번 쓰라는 거 내가 네 여친이냐면서 거부했다고요.”
그러니 좀 봐 달라는 태도에 도한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친구로서 예의상.”
“세 번.”
사랑이 곧바로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이왕 선심 쓰는 김에 세 번으로 합시다, 남친님.
나도 체면이 있지. 남자 친구가 싫어해서 편지를 못 쓰겠다고 어떻게 말하란 말인가.
두 번은 너무 적고, 적당한 간격을 두면 군 복무 기간 동안 세 번으로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도한은 그녀의 미소에 넘어가지 않았다.
“한 번.”
“알았어요, 알았어. 두 번. 두 번만 쓸게요. 이제 됐죠?”
세 번으로 늘리려다가 오히려 한 번으로 줄어들자 사랑이 다급히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뭐, 연락할 방법이 편지만 있는 건 아니니까.
편지는 두 번만 쓰고 가끔 통화를 하면 되지.
“전화 와도 받지 말고.”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도한이 정확하게 지적하자 사랑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귀신이 따로 없었다.
“오는 전화를 어떻게 안 받아요.”
“그럼 수신 거부해 놓든가.”
이젠 아예 억지까지 부리고 있었다.
사랑의 미간이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차라리 절교를 하라고 하지 그래요?”
“그럴래?”
도한이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물었다. 사랑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는 오빠는 이성 친구 많을 거잖아요.”
사랑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윤재 손을 잡은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그에게는 전 여자 친구도 많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질투에 눈이 멀 사람은 도한이 아니라 그녀였다.
“그 친구들 이름은 막 부르죠? 내 이름은 불러 주지도 않으면서.”
사랑은 술김에 마음속에 쌓아 둔 서운함을 꺼냈다.
지금껏 그는 내 이름을 한 번도 불러 주지 않았다.
내 앞에서 다른 여자 이름은 잘도 얘기하면서.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우가 전에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도한은 연애할 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결국엔 여자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지독하다고 떠나 버린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사랑인 내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 게 아닐까.
그렇게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다른 여자들처럼 지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를 떠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거다.
적어도 그런 이유로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이 남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거면 된 거라고. 그 이상은 바라지 않기로 했다.
그의 여자 친구가 된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취기가 오른 탓인지 가슴 밑바닥에 아주 얇게 쌓인 먼지 같은 서운함이 나풀댔다.
사랑은 뒤늦게 투정 부린 걸 후회했다.
미안해하는 도한의 표정을 본 순간 괜한 말을 했다 싶었다.
“그만 들어갈게요. 저 취했나 봐요.”
반짝 정신을 차린 사랑이 서둘러 자리를 뜨자 도한이 그녀를 붙잡았다.
“조금만 있다가 들어가.”
“……왜요?”
사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멀리 보이는 가로등에 손목을 대고 있는 것처럼 그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키스하고 싶어서 기다렸어.”
사랑의 두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지는데 도한이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사랑의 이름을 불러 주고 싶었다. ‘사랑아.’ 하고.
그런데 목구멍에서 맴돌기만 했다.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다.
그 이름을 말하려고만 하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먼저 떠올랐고, 뒤이어 숨죽여 우는 어머니가 아른거렸다.
온몸이 차가워지면서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도한은 사랑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대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키스로라도 그 죄를 갚고자 정성스럽게 입술을 탐했다.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숨결을 나누며 그는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이사랑. 사랑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