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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쿨한 남자 친구 (24/63)


#23화. 쿨한 남자 친구
2023.03.20.


사랑은 윤재가 지난주 <한자의 이해> 수업에 결석하는 바람에 놓친 수업 내용 필기한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악필인 탓에 윤재가 글씨를 못 알아봐서 옆에 앉아 알려 주었고, 윤재는 그런 그녀를 놀리는 중이었다.

그러다 태훈과 도한이 다가온 것이다.

사랑은 괜히 뜨끔했다.

물론 도한은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윤재와 둘이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윤재에게도 미안했다.

아직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알게 돼서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오늘 말하려고 했는데.

사랑은 갑자기 나타나서 뜬금없이 데이트라는 말을 꺼낸 도한이 조금은 야속했다.


“윤재야, 나 아까 그 오빠랑 사귀고 있어.”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윤재는 괜찮다며 웃어 주었다.


“남자 친구 엄청 잘생겼네. 축하해.”

“고마워.”

윤재는 사랑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와 이뤄질 것 같지 않아서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고백했던 것뿐이라 쉽게 마음이 정리됐다.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정리해서 그런지 다시 편한 친구의 감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만, 도한이 사랑의 남자 친구라는 게 놀라웠다.


“근데 사랑아.”

“응?”

윤재는 무언가 말하길 주저했다.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이라 물어는 봐야겠는데 실례되는 질문이라 망설여졌다.


“네 남자 친구 말이야. 그때 그 사람 아니야?”

“누구?”

“전에 내가 너 집에 데려다줬을 때 봤던, 어떤 여자 업고 있었던 사람.”

사랑은 순간 손끝이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윤재와 함께 있을 때 도한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기에, 그 어느 날 중 하루를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술 취한 혜리를 업고 집으로 데려가던 도한을 말하고 있었다.

사랑은 당황스러웠다.


“으, 응. 맞아. 그날 그 언니가 많이 취해서. 그 언니 집이 멀어서. 그래서 오빠가 집으로 데려갔대. 오빠는 친구 집에서 자고.”

윤재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그녀는 그날의 일을 해명하고 있었다.

혜리가 도한의 여동생이라고 말하면 이해할 일이었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기에 지켜야 했다.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랑을 보며 윤재는 한숨을 삼켰다.

왠지 사랑의 남자 친구는 느낌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는 남자가 봐야 안다던데.

사랑에게 어울리는 남자는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순 없어 윤재는 그저 이해하는 척했다.


“그렇구나.”

사랑은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다.

충분히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이었는데 더 캐묻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


“그나저나 네 남친이 기분 나쁘면 어쩌냐. 마침 우리 둘이 옆에 앉았는데.”

“괜찮아. 오빠는 그런 거 상관 안 해.”

“그래? 난 내 여친이 다른 남자랑 같이 있으면 기분 나쁠 것 같은데.”

“나도 그런데 오빠는 아니래.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하고 단둘이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신경 안 쓴다고 하더라고.”

키스를 부탁하는 것만 아니라면.

사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질투하는 건 저 혼자만의 몫이었다.


“네 남친 정말 쿨하구나.”

윤재는 웃으며 도한을 칭찬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본인도 다른 여자랑 단둘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일이 많다는 뜻이겠지.

서로가 누굴 만나든 터치하지 않는 연애만 해 왔다는 게 아닐까.

주위에 그런 선배들이 꽤 있었다.

진심이라고는 전혀 없고 다른 목적만 가지고 여자 친구를 사귀는 남자 선배들을 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지곤 했는데.

도한도 그쪽 부류인 것 같았다.

윤재는 저도 모르게 사랑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수업을 마치고 사랑은 도서관을 찾았다.

도한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앞에 나와 있는 그를 보고 핸드폰을 내렸다.


“같이 공부하자고 오라는 거 아니었어요?”

열람실에서 기다릴 줄 알았는데 그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사랑이 의아해하자 도한은 그녀의 손을 잡고 도서관을 등진 채 걸었다.


“무슨 데이트를 공부하면서 해.”

“그럼 왜 여기로 오라고…….”

도서관으로 오라고 했으니 당연히 공부할 줄 알았지, 누가 앞에서 만나기만 할 줄 알았나.

사랑은 조금 전 올라온 언덕을 다시 내려가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럴 거면 강의실이나 정문에서 만나자고 하든가.


“그냥, 그때 도서관이 생각나서.”

정말 그런 이유였다.

점심을 먹으러 학생회관으로 가는 길에 지나쳤던 건물이 도서관이라 머릿속에 떠오른 장소가 그곳이었던 것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 단순함 때문에 도한 역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멀고 먼 도서관으로 와야 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사랑의 옆에 있는 윤재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덕분에 같이 있던 태훈이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웬 질투냐며 웃음을 터트렸었다.


“아까 보니까 그 친구 좀 놀라는 것 같던데.”

“네?”

어쨌든 도한의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걷고 있는 지금이 너무 좋아 사랑은 금세 얼굴이 밝아졌다.

잡힌 손을 앞뒤로 흔들고 싶을 정도였다.


“남자 친구 있다고 얘기 안 했어?”

“아, 윤재요? 네.”

무슨 말인지 가만 듣고 있던 그녀는 뒤늦게 이해했다.


“왜?”

“얘기 꺼내기가 좀 그래서요.”

“너한테 고백했던 친구라?”

“네. 미안하기도 하고…….”

“그게 미안할 일인가. 좋아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사랑은 가슴이 따끔거렸다.

도한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했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고 상처 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차피 받아 줄 마음이 아니라면 단호하게 말하는 편이 낫지.”

도한은 윤재를 생각하며 뱉은 말이었다.

사랑이 윤재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게 보기 싫어서.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정윤재를 바로 옆에 두고 그렇게 웃어 주면 어떤 남자가 미련을 안 가질까.

그런 여지를 주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또한 질투겠지.

도한은 오늘의 자신이 못마땅해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누구처럼요?”

“뭐?”

사랑이 그를 보며 설핏 미소를 짓자 도한은 가슴이 아린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가 뒷말을 더 보태진 않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사랑이 힘겹게 한 고백을 무참히 짓밟았던 자신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두 눈이 그때 받은 상처를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도한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랑은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화제를 돌렸다.


“윤재가 오빠 정말 쿨하대요.”

일부러 환하게 웃는 그녀를 도한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솔직하기만 했던 사랑이 저를 만나면서 조금씩 감정을 숨기는 게 눈에 보였다.


“나한테 남자 친구 생겨서 이제 밥도 같이 못 먹는 거 아니냐고 하길래, 내가 다른 남자랑 단둘이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오빠는 신경 안 쓰는 성격이라고 했거든요.”

틀렸다.

그건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 친구들한테만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그러니 ‘내가 다른 남자랑’이라는 전제로 시작하는 그 문장은 틀렸다.


“그래서 이번 주에 윤재랑 술 마시기로 했어요. 밥은 같이 먹었어도 술은 아직 못 마셔 봤거든요. 개강한 지가 언젠데.”

도한은 해사하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또 한 번 가슴이 쓰라렸다.

나는 대체 무슨 자격으로 너를 그리도 아프게 했을까.

지금껏 사랑에게 무심히 뱉은 말들이 모두 저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 * *

게임이 한창 진행 중인 모니터를 앞에 두고 도한은 핸드폰만 내려다보았다.

오후 6시 45분.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자 숫자가 46으로 바뀌었다.

그게 못마땅한지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다 죽었잖아.”

PC방에서 도한과 나란히 앉아 같은 팀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태훈이 소리를 쳤다.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도한의 캐릭터가 나 좀 죽여 달라고 상대 팀 앞에 나타나는 바람에 허무하게 지고 말았다.

열이 바짝 오른 태훈의 목소리에 도한은 그제야 핸드폰에서 시선을 뗐다.


“너 오늘 무슨 일 있냐? 왜 하루 종일 정신 나간 놈처럼 그래.”

강의실에서도 내내 집중하지 못하더니.

그런 모습은 또 처음이라 낯설었다.


“그만 나가자. 재미없다.”

도한이 일어나서 먼저 걸어가자 태훈은 얼굴을 구겼다.

집에 가는 사람 붙잡아 놓고 게임이나 하러 가자고 할 때는 언제고.

태훈이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오는데 도한이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전화라도 있어?”

“아니.”

“근데 왜 핸드폰을 죽일 듯이 쳐다봐.”

“내가 언제.”

“저녁 먹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제 행동을 들킨 게 멋쩍어 도한은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맥주나 한잔하러 가자. 내가 살게.”

그가 한숨을 내쉬고 적당한 곳을 찾아 길을 걸었다.

그러다 어느 가게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어 태훈도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치킨과 맥주를 파는 곳이라 들어가려는 줄 알았는데, 도한이 보고 있는 건 유리창 너머의 두 사람이었다.


“어? 사랑이랑 그 체대생이네.”

사랑이 친구와 맥주잔을 부딪치며 여느 때보다 해맑게 웃고 있었다.


“오늘 둘이 만나는 거 알고 있었어?”

“어.”

역시 지도한이네.

나 같으면 내 여친이 다른 남자랑 저렇게 친하게 지내는 꼴은 절대 못 볼 것 같은데.

단둘이 술을 마시는 건 더더욱.


“누가 보면 저 체대생이 사랑이 남친인 줄 알겠다.”

속마음이 저도 모르게 밖으로 나와 태훈은 도한에게 살짝 미안했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의 여자 친구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닌가.

그렇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상만사 별로 관심 없는 지도한인데 뭐 어떤가.


“우리도 여기 들어가자. 멀리 가기도 귀찮은데.”

태훈이 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도한이 대답도 없이 반대 방향으로 가 버렸다.

저걸 진짜.

하여간 뭐든 자기 마음대로지.

안 그래도 게임에서 져 분이 안 풀린 태훈은 이를 갈며 도한을 쫓아갔다.


“그냥 저기로 가자니까. 넌 어차피 신경도 안 쓰잖아. 아, 저 체대생이 불편하려나? 너야 원래 세상 쿨한 놈이니까 그렇다 쳐도 저 체대생은 껄끄러울 수도 있겠다. 사랑이한테 마음 있는 거 같은데.”

성큼성큼 걷기만 하던 도한이 우뚝 멈춰 섰다.

술 한잔할 마땅한 곳을 찾았나 싶어 태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도 불편해.”

“뭐?”

아무리 봐도 음식점이 보이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태훈은 도한의 말에 귀 기울였다.


“내 여친한테 마음 있는 놈 얼굴 보는 거 나도 불편하다고.”

그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도한은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기분 나빠진 스스로가 낯설었다.

오전부터 그랬다.

12시가 첫 수업이라 느긋하게 집을 나선 그는 사랑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마지막 수업이 몇 시인지 물었고 5시 반에 끝난다기에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시간표가 달라서 점심은 같이 못 먹어도 저녁은 늘 함께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사랑의 답을 보고 도한은 걸음을 멈췄다.


[오늘 윤재 만나기로 했어요.]

아. 오늘이 그날인가.

개강한 지가 언젠데 아직 정윤재와 술을 못 마셔 봤다며, 이번 주에 마시기로 했다던 그날이.

도한은 저도 모르게 만나지 말라는 답을 쓰다가 곧 지워 버렸다.

정윤재와 잘 어울린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젠 친구로서의 관계마저 막으려고 드는지.

자신이 그럴 자격이나 있는 놈인지 한심했다.

결국 알겠다고 간단히 답을 보내고 다시 학교로 발을 옮겼지만, 그 후로 그의 머릿속은 온통 한 장면으로 꽉 차 있었다.

조금 전 유리창 너머로 봤던 바로 그 장면.

사랑과 윤재가 마주 보며 웃는 그 모습.

두 사람이 만나고 있을 시간부터는 핸드폰으로 시간만 쳐다보았다.

지금쯤 만났겠지.

밥을 먹고 있으려나.

아니면 바로 술을 마시고 있을까.

얼마나 마셨을까.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설마 정윤재가 술김에 다시 고백을 하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대처할까.

안쓰러운 마음에 정윤재를 안아 주고 토닥여 주려나.

그러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도한은 끝없이 이어지는 상상에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헐. 너 지독한 맞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태훈이 입을 벌렸다.

지도한이 누구던가.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걸 목격해도, 심지어 그 남자와 키스하는 걸 직접 보고서도 표정의 변화가 없던 지독한 놈이다.

그런데 겨우 사랑이 친구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봤다고 이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다니.


“설마, 너. 오늘 하루 종일 정신 나가 있었던 것도 사랑이 때문이었어? 저 두 사람이 저녁에 만나기로 해서?”

도한이 말없이 시선을 피하자 태훈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살다 보니 지도한이 당황하는 걸 다 보네.

태훈의 웃음소리가 점점 배를 부여잡아야 할 정도로 커졌다.

그럴수록 도한의 미간에 주름이 늘어났다.


“그렇게 사랑이가 좋냐?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것만 봐도 질투 날만큼?”

“그냥 다른 남자가 아니잖아.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놈이라고.”

“그래서 불안해?”

“너라면 안 불안하겠냐.”

“나야 당연히 불안하지. 근데 너는 내가 아니잖아. 지독한 지도한이지.”

더 얘기해서 뭐 하겠나 싶어 도한이 그만 걸음을 재촉했다.

태훈은 피식피식 웃으며 그를 졸졸 따라갔다.


“그렇게 불안하면 사랑이한테 전화해서 나오라고 해.”

“됐다.”

“너 아까부터 사랑이 연락 기다리고 있잖아.”

“됐다고.”

도한이 무심한 척 앞만 보며 걷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사랑인가 싶어 그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냈다.

이제 집에 들어간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하며 액정을 봤지만 그녀가 아니었다.

실망하는 도한에게 고개를 들이민 태훈은 메시지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불안해하지 말고 전화 주세요. 누구나 당일 대출. OO캐피탈 김 팀장]

“전화 달란다. 김 팀장님께서.”

태훈의 놀림에 도한은 애써 화를 참으며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태훈은 친구의 새로운 모습이 그저 즐거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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