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너 이제 내 후배 아니야 내 여자 친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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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너 이제 내 후배 아니야 내 여자 친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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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너 이제 내 후배 아니야 내 여자 친구지
2023.03.17.
도한은 어제의 키스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 전날엔 사랑이 도망치는 바람에 아쉬워서 못 잤다지만 어제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첫 키스나 다름없는 그녀가 눈도 못 감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욕심껏 입술을 탐했다.
이상하게 갈증이 멈추질 않았다.
입술을 아무리 베어 물어도 점점 더 깊숙한 곳을 찾게 됐다.
키스할 줄 모른다는 그녀의 말은 정말이었다.
사랑은 온몸이 바짝 굳은 채 입술 한번 움직이지 못했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벤치를 잡은 손등엔 뼈가 도드라져 있을 정도였다.
그걸 다 알면서도 그녀의 입술을 오랫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부족했던 걸까.
자는 내내 뒤척거릴 만큼 사랑이 보고 싶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뒤늦게 알아채서인지.
참았던 숨을 한 번에 토해 내듯 그녀에게 향하는 진심이 이런 식으로 쏟아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한은 겨우 아침을 맞이했고, 사랑을 볼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녀는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평소처럼 생글생글 웃지도 않고 재잘재잘 떠들지도 않았다.
처음엔 그저 어제 마신 술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보다 했다.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자꾸 한숨을 내쉬고 시간만 확인하는 걸 보기 전까진.
아무래도 후회하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해 실수로 사귀기로 했던 게 아닐까.
자고 일어나니 모든 걸 없던 일로 하고 싶었을 수도.
도한은 사랑이 제게 억지로 끌려다니는 것 같아 일단은 집으로 보내려 했다.
집 앞에서 참지 못하고 결국 서운함을 내비치고 말았지만.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들었다.
그녀가 눈물까지 보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가만 들어보니 오늘의 데이트는 좋았지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내색하지 않았단다.
기가 막힐 뿐이었다.
이 와중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이사랑이 미치도록 예뻐서 키스하고 싶은 나는 과연 정상일까.
도한은 키스 대신 사랑을 와락 껴안았다.
흠칫 놀라는 게 느껴져 더 꽉 끌어안았다.
“다행이네.”
사랑도 그렇게 생각했다.
오해가 풀려서 정말 다행이라고.
하마터면 어제 사귀고 오늘 헤어질 뻔했다.
“나만 좋았을까 봐 걱정했는데.”
“아. 영화요?”
“아니.”
도한은 팔을 풀고 눈물로 얼룩진 사랑의 눈가를 손으로 쓱 쓸었다.
그녀가 몸을 작게 떨면서 그에게 궁금한 시선을 보냈다.
“키스.”
도한의 눈길이 제 입술로 향하자 사랑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피식 웃었다.
오늘 여러 번 놀라게 하는 것 같아서 조금은 미안했다.
“나하고 연습하랬더니 꿈에서 하면 어떡해.”
“그, 그래도 서, 선배님이랑 한 거잖아요.”
사랑은 조금 전 자신이 내뱉은 말들이 이제야 제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서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할 것들까지 모조리 나오고 말았다.
신비주의는 무슨.
쿨한 모습은 애초에 무리였다.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가슴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고 말았으니.
괜히 연애 초짜겠나.
사랑은 어설프게 어른인 척 굴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
“꿈인 걸 저보고 어쩌라고요.”
“그거 말고.”
“그럼 뭘…….”
“좋으면 웃고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자고 해.”
도한이 사랑의 손을 잡았다.
아침에 손잡았을 때 좋아서 기절할 뻔했다는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아 미소가 그려졌다.
“난 그런 너를 좋아하는 거니까.”
솔직하고 꾸밈없는 그런 너를 좋아한다.
그러니 내 눈치는 보지 말길.
너한테 싫증이 날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선배님 소리도 그만해. 너 이제 내 후배 아니야. 내 여자 친구지.”
도한이 대답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사랑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하고 싶은 건?”
“네? 지금이요?”
“그래. 말해 봐.”
사랑은 잠시 고민했다.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른 그 말을 정말 얘기해도 되는지를 고민했다.
그가 어서 말해 보라며 눈으로 재촉하자 사랑은 용기를 냈다.
“키스요.”
시선을 떨구지 않고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솔직한 나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의 말을 착실하게 따랐을 뿐이라는 듯이.
의외의 대답에 도한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껏해야 카페에 가자고 하거나 쇼핑하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무려 키스라니.
뭐, 나야 고맙지만.
“그것도 다행이네. 나하고 생각이 같아서.”
도한은 기꺼이 그녀의 입술로 고개를 내렸다.
* * *
“말도 안 돼.”
태훈은 몇 번째 같은 말만 되뇌었다.
주말에 지우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도한과 사랑이 사귄다고.
처음엔 지우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걸 누가 믿겠냐고 핀잔을 줬더니, 지우는 답답했는지 직접 확인을 해 보란다.
태훈은 어쩔 수 없이 도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우가 그러는데 네가 사랑이랑 사귄대.’
말을 하면서도 태훈은 어이가 없어 헛숨을 터트렸다.
‘맞아.’
‘뭐?’
‘사귀는 거 맞다고.’
‘말도 안 돼!’
그때부터 태훈은 이 말을 끊임없이 내뱉고 있었다.
도한과 같은 강의를 듣고 학생회관 식당으로 걸어가던 태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가 그렇게 말이 안 되는데.”
사랑과 사귀는 게 뭐가 그리도 말이 안 된다는 건지.
도한은 어디 그 이유나 좀 들어 보자며 눈썹을 찌푸렸다.
반면 태훈은 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둘이 너무 안 어울리잖아.”
“어디가. 어떻게.”
“사랑이는 성격도 좋고 애가 착하잖아.”
“나는 성격 더럽고 나쁜 놈이라고 들린다?”
“너도 알고 있던 사실 아니었어?”
태훈이 정색하자 도한은 헛웃음이 나왔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이런 취급을 받으니 할 말이 없었다.
“암튼 그런 사랑이가 너랑 사귄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것도 첫 남자 친구라면서. 왜 하필 처음부터 가시밭길을 가겠다는 거야, 그 어린 양이.”
태훈은 진심으로 사랑이 안타까웠다.
자신이 도한의 친구면서도 오히려 후배인 사랑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미안하다.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놈이라서.”
사랑이 이미 저로 인해 여러 번 상처를 받았기에 도한은 가시밭길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잠깐. 사랑이가 전에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자기 말고 다른 남자 좋아하라고 했다고 했잖아. 그게 설마 너냐?”
도한이 대답이 없자 태훈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그날 내가 사랑이한테 소개팅시켜 주겠다고 했을 때 너 가만히 있었잖아. 이거 진짜 형편없는 놈이네.”
“양심이 있는 거지.”
“하, 그래서 재성이한테 재수 없게 굴었냐? 재성이가 사랑이 자기 취향 아니라고 해서?”
도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더 말해 봤자 추해지기만 할 뿐이다.
이런 놈을 좋아하는 사랑을 말리기에도 늦은 듯해 태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말이 너무 뻔한데. 사랑이 앞으로 어쩌냐.”
“우리 이제 막 사귀기 시작했어. 꼭 그렇게 악담을 해야겠냐.”
“네가 그동안 한 짓을 생각해 봐라. 여자 친구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하는 놈이 왜 하필 순진한 신입생이랑 사귄다는 거냐고. 여태 그랬던 것처럼 그냥 너랑 비슷한 애나 만나지.”
사랑이 지우의 친구라 그런지 태훈은 더 흥분했다.
지금까지는 도한이 누구와 만나든 상관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친한 친구인 자신도 가끔 도한의 차가운 성격에 기분이 상할 때가 있는데 사랑은 오죽할까.
사랑에게 첫 연애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심한 말을 퍼붓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남자 친구를 사귀려고 대학에 왔다고 할 만큼 사랑은 연애에 대한 기대치가 큰 편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어려운 상대를 골랐는지, 착한 후배가 가엾기까지 했다.
태훈의 끝없는 투덜거림에 도한은 학생회관 계단 앞에서 발을 멈췄다.
옆에서 계단을 오르던 태훈도 그 자리에 서서 눈높이가 같아진 도한을 쳐다봤다.
워낙에 무표정한 얼굴이라 화가 난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이 좀 심했던 것 같아서 사과를 하려는데 도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쩌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뭐?”
태훈은 도한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두 눈이 슬퍼 보이긴 처음이었다.
“그 애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도한의 바람이기도 했다.
저주라도 걸린 듯, 사랑이라는 말을 내뱉지 못하게 된 건 열세 살이 되던 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채사랑이라는 여자를 찾았다.
잔뜩 꼬인 혀로 ‘사랑아, 채사랑’을 부르짖었다.
아버지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던 여자.
부모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던 여자.
그래서 어머니와의 결혼 후에도 잊지 못하고 애타게 부르던 이름.
그 목소리가 아무리 끔찍했을지언정 도한은 교과서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건 채사랑이라는 여자가 그의 새엄마가 된 순간부터였다.
어느 날 경철은 두 여자를 집으로 데려와 도한에게 새엄마와 여동생이라고 소개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도 되지 않았던 도한은 두 주먹을 말아쥐고 눈물을 참았다.
그때 새엄마가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내 이름은 채사랑이야. 만나서 반갑다.’
도한은 그 이름을 듣고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도 모른 채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 눈물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어머니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 내 엄마의 자리를 그 여자에게 내어주는 게 싫었다.
다른 여자도 아니고, 어머니를 그토록 아프게 했던 채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라서.
도한은 그 순간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약속했다.
절대로 이 여자한테 엄마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그것만이 그가 어머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날의 다짐이 ‘사랑’이라는 말을 내뱉지 못하는 저주로 바뀌어 버렸다는 걸 도한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태훈은 더 이상 도한의 연애에 초를 치지 않았다.
어쩐지 이번만큼은 그의 마음이 진심인 것 같아서 악담은 그만하고 그를 믿어 주기로 했다.
친구니까.
그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둘이 좋아서 사귄다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나서나 싶었다.
태훈은 조금 전까지 험한 말을 했던 걸 미안해하며 그만 학생회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 저기 사랑이다.”
오픈된 1층 카페 테이블에 사랑이 앉아 있었다.
도한은 태훈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랑과 정윤재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책을 같이 보면서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언제 봐도 둘은 참 잘 어울렸다. 짜증이 날 정도로.
도한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난 지우가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것만 봐도 기분 나쁘던데 넌 참 쿨해서 좋겠다.”
태훈은 질투라고는 한 적도 없을 것 같은 도한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자신은 너무 감정적이라 문젠데 도한은 이럴 때조차 이성적이었다.
때로는 도한처럼 여자 친구를 믿어 줄 필요가 있었다.
정말 믿어서 질투를 안 하는 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태훈이 사랑에게 인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도한도 따라나섰다.
그들이 카페 앞에 다다랐을 때 사랑은 그제야 둘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이제 점심 드시러 오시는 거예요?”
“응, 수업이 늦게 끝나서. 지우는?”
오늘은 지우가 사랑과 점심을 먹는 날인데 함께 있지 않자 태훈은 의아했다.
“잠깐 은행에 갔어요.”
“아, 밥은 먹었고?”
“네.”
태훈은 사랑에게 남자 친구를 사귀게 돼서 축하한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옆에 친구가 있어서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이제 그만 가 보려는 찰나, 도한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수업 마치면 도서관으로 와.”
“네? 도서관은 왜…….”
“데이트하자고.”
모두의 시선이 제게 꽂히는데도 도한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사랑이 당황한 눈빛으로 윤재와 태훈을 힐끔거렸다.
“……네.”
그런 말은 전화나 메시지로 해도 되는데,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해야 하나 싶어 부끄러웠다.
더군다나 제게 고백까지 했었던 윤재가 바로 옆에 있는데.
사랑이 시선을 떨구고 조용히 대답하자 도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사랑아.”
태훈도 얼른 인사를 하고 그를 쫓았다.
카페를 벗어나자 태훈이 피식거렸다.
“지독한, 너 뭐냐.”
“뭐가.”
도한도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우스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윤재에게 자신이 사랑의 남자 친구라는 건 알려야 했기에 유치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괜히 식당 게시판을 보며 오늘의 메뉴가 뭔지 확인하자 태훈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웬 질투야.”
“내가 언제. 도서관에서 만나자고 한 것뿐인데.”
“그게 질투라는 거다.”
도한도 결국 똑같구나 싶어 태훈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괜한 걱정을 했다.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여자 친구를 보며 질투가 날 정도면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 맞네.
태훈은 앞으로 도한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가 됐다.
천하의 지독한이 신입생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꼭 한 번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