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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너만 만날래 (22/63)


#21화. 너만 만날래
2023.03.13.


연애를 시작하고 첫 주말을 맞이했다.

어젯밤부터 사귀기로 했으니 눈뜨자마자 그렇게 돼 버렸다.

날씨도 좋았다.

새로운 커플 탄생을 반기기라도 하듯 하늘이 맑았다.

사랑은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했다.

도한과 만나기로 약속한 것도 아닌데 혼자서 데이트를 준비했다.

마음이 들떠서 가만히 있기엔 집이 너무나 좁았다.

하늘이라도 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라 어디라도 나가고 싶었다.


“지우야, 넌 태훈 오빠랑 주말에 만나면 뭐 해?”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데이트 코스가 궁금했다.

<연애와 결혼> 과제 때문에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를 많이 알아보긴 했지만, 정작 자기 일이 되고 나니 어려웠다.


“뭐 특별한 게 있나. 영화 보고 밥 먹고. 그냥 여기저기 걸어 다니다가 살 거 있으면 사고 그러지.”

오후에 태훈을 만나기로 한 지우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 영화를 봐서 오늘은 어딜 갈까 찾아보는 중이었다.


“너 지금 나가려고? 도한 오빠가 나오래?”

“아니. 아직 연락 없어. 원래 늦게 일어나거든.”

밤에 잘 못 자는지 월요일 아침에 모닝콜을 할 때면 도한은 대부분 자고 있거나 겨우 일어난 상태였다.

오늘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8시가 넘었는데 전화 한 통, 메시지 하나 없는 걸 보면.

분명 어제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은 도한이었는데 왜 또 저만 안달이 나 있는지 사랑은 씁쓸했다.

혹시 충동적으로 고백한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마음의 크기가 달라서일 수도.

사랑은 혼자서 그를 좋아하고 있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벌써부터 연애가 어려웠다.


“주말인데 만나자고 하겠지. 아니면 우리랑 같이 놀래?”

“같이?”

“그래. 둘이 사귄다고 하면 태훈 오빠 엄청 놀랄 텐데. 아마 상상도 못 했을걸?”

사랑은 귀가 솔깃했다.

어제의 키스로 도한과 단둘이 만나면 어색할 게 뻔한데, 지우와 태훈과 함께라면 자연스럽게 데이트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태훈에게도 연애 사실을 알려야 하니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럼 그럴까?”

도한에게 연락이 오면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할 찰나에 정말로 그에게 전화가 왔다.


“도한 오빠야?”

“응.”

사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만 봐도 떨리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도한과 처음으로 전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두근거리는지.

적응이 됐다 싶었는데 다시 원점이었다.


- 뭐 해?

“그냥 있어요.”

- 몇 시에 만날까.

“네?”

그가 마치 오늘 만나기로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자 사랑은 당황했다.

어제 정신이 없어서 듣고도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 오늘 나 안 만날 거야?

“아. 만나자고 얘기 안 하셔서.”

- 다른 약속 있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 그럼 준비하고 나와.

사랑은 옆에서 지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넷이서 만나자고 물어보라는 것 같았다.


“저기, 지우랑 태훈 오빠도 오늘 만난다는데 같이…….”

- 싫어.

그는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단번에 거절했다. 사랑이 놀라서 지우를 쳐다보았다.

지우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왜’냐고 묻고 있었다.

사랑이 도한에게 같은 질문을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대답했다.


- 너만 만날래.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말에 사랑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지우가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고개를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키스할 때 만큼이나 얼어붙었다.


- 듣고 있어?

“아, 네. 드, 듣고 있어요. 들었어요.”

또렷하게 들어서 문제라고요.

사랑은 도한을 만나기도 전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어 큰일이었다.

이 상태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틸지.


- 나 이제 씻을 거니까 천천히 준비해도 돼. 이따 보자.

“네. 알겠어요.”

전화를 끊은 사랑이 핸드폰을 든 손을 툭 떨어뜨렸다.


“도한 오빠가 뭐래?”

“어?”

“오늘 너 안 만난대?”

사랑이 당황하는 걸 보고 지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제 사귀자고 했으면 오늘 당연히 만나는 거지, 애한테 또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도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건 아닌데.”

“그럼 같이 만나겠대?”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대체 뭐냐고, 지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사랑은 자기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러워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나하고만 만나겠대.”

“……뭐?”

“그런다네, 오빠가.”

도저히 지우를 쳐다볼 수 없었던 사랑은 시선을 피하며 멋쩍게 웃었다.

지우 딴에는 어색할 우리를 생각해서 함께 만나자며 배려해 준 거였는데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사랑은 지우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둘이서만 만나고 싶다는 도한의 마음이 그녀를 설레게 했다.

나 혼자만 좋아하는 건 아니었구나.

그게 그렇게도 안심이 됐다.

반면 지우는 사랑의 대답에 헛숨을 터트렸다.


“의외네, 도한 오빠.”

다 같이 밥이나 먹으며 두 사람의 연애를 축하해 주려고 했는데 조금 황당했다.

사랑이 좋아한다고 할 땐 상처만 줘 놓고선, 갑자기 왜 사귀자고 하는 건지 그의 마음이 의심스러웠는데 진심이긴 한가 보다.

다행이었다.

둘이서만 만나고 싶을 정도로 사랑을 좋아해서.

지우는 도한의 한마디에 얼굴에 꽃이 핀 사랑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 * *

천천히 준비하라는 말은 소용없었다.

도한의 전화를 받기 전부터 어느 정도 외출 준비를 마쳤던 사랑은 가볍게 화장만 하고 집을 나섰다.

첫 데이트 과제 때 원피스를 입었던 것처럼 차려입진 않았다.

오히려 진짜로 사귀게 되니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가 민망했다.

사랑은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리며 심호흡을 했다.


“조금 이따가 나올 걸 그랬나.”

그가 준비를 마치면 연락을 할 텐데 괜히 일찍 나왔나 싶었다.

빨리 보고 싶어서 나왔다는 걸 들킬 것만 같았다.

이제부터는 그런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잘되진 않겠지만 노력이라도 해야지.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나한테 금방 질릴 수도 있으니까.

도한처럼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필요한 말만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신비주의 콘셉트. 신입생답지 않게.

그녀가 가슴 깊이 새기는 사이 도한이 나왔다.


“왜 먼저 나와 있어. 이제 전화하려고 했는데.”

도한은 그녀가 집 앞에 서 있자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멈췄다.


“저도 방금 나왔어요.”

쿨해 보이고 싶었는데 시작부터 꼬였다.

남자 친구가 언제 나오나 집 앞에서 기웃거리는 건 전혀 신비롭지 않았으니까.

사랑은 지금부터라도 잘해 보자며 다시 의지를 다졌다.

표정부터 차갑게 바꾸고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도한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입꼬리가 마구 올라가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다음부터는 전화하면 나와. 기다리지 말고.”

“네.”

사랑은 그를 슬쩍 올려다봤다.

뭔가가 좀 다른 느낌이었다.

분명 무표정한 얼굴에 툭 내뱉는 말투는 평소와 같은데, 좀 더 다정하게 들린달까.

기분 탓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들어서 그런 거겠지.


“가자.”

역시나 딱딱한 말투라 사랑은 자신이 잘못 느낀 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오른손이 갑자기 따뜻해졌다.

깜짝 놀라서 내려다보니 도한이 제 손을 잡고 있었다.

사랑이 우뚝 멈춰 서서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

“아, 아니에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그의 눈빛에 사랑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손이 저릿할 정도로 긴장되고 맥박이 빠르게 뛰었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표정을 관리했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너 해장하러.”

“네?”

“어제 술 많이 마셨다며.”

사랑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서 아침부터 만나자고 한 건가?

왠지 그를 빵에 비유하자면 바게트와 비슷했다.

겉은 바삭한데 속은 촉촉한.

말은 툭 내던지듯 까칠하게 하지만, 알고 보면 부드럽고 다정한 뜻이 담겨 있었다.

그게 그의 매력인 것 같았다.

사랑은 도한에게 한 번 더 반하고 말았다.

어느덧 식당에 도착한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주문한 음식은 금세 나왔다.


“밥 먹고 뭐 할래.”

“글쎄요.”

“영화 보러 갈까?”

“그래요.”

사랑은 뜨끈한 해장국을 먹으며 일부러 무심하게 대답했다.

너무 좋아하는 티 내지 않기!

이것저것 하고 싶다고 연애 초보자처럼 굴지 말기!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고개를 숙인 채 밥 먹는 데만 집중했다.

도한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싫으면 다른 거 해도 되고.”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도한은 눈도 마주치지 않는 사랑이 조금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배가 고파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며 식사를 마저 했다.

식당을 나온 둘은 영화관을 찾았다.

도한이 무슨 영화를 보겠느냐고 물었고, 사랑은 가장 빨리 시작하는 영화를 보겠다고 했다.

방금 밥을 먹고 와서 팝콘은 생략했다.

영화는 액션 장르였는데, 그런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랑이 보기에도 꽤 재미가 있었다.

1편을 찾아보고 싶을 만큼 흥미진진했다.

3편은 언제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여전히 도한과 사귀고 있어서 함께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사랑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영화 별로였어?”

“아니요. 재미있었어요.”

영화관을 나서며 그녀가 시간을 확인했다.

지우도 지금쯤 태훈 오빠 만나고 있겠네.

태훈 오빠한테 우리 얘기했겠지?

얼마나 놀랐을까.

소개팅까지 시켜 줬는데 도한과 사귀는 걸 알면 얼마나 황당할까.

학교에서 마주치면 조금 창피할 것 같아 사랑은 벌써부터 마음속에 근심이 생겨났다.


“이제 뭐 해요?”

첫 연애다 보니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게다가 도한은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들과 학교 근처에서 데이트를 많이 해 봤을 게 아닌가.

가급적이면 그가 가 보지 않은 곳으로 가고 싶어서 그에게 묻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예쁜 카페라도 데려갔다가 도한이 전에 여자 친구와 왔었던 곳이라면 난감할 테니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연애 경험이 없는 신입생이라서 그런가 싶어 사랑은 시무룩해졌다.

점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만 집에 가자.”

벌써요?

저녁에나 들어갈 줄 알았던 사랑은 당황해서 미처 물어보지 못했다.

도한이 앞서 걸어가는 바람에 그녀는 멍한 얼굴로 서 있다가 그를 따라가 발을 맞췄다.

사랑은 초조했다.

아까는 손도 잡아 주더니 지금은 다시 선후배 사이가 된 것만 같았다.

뭐가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첫 남자 친구와 첫 데이트를 한 그녀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내내 침묵하던 도한이 사랑의 집 앞에 도착해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뭐 실수했어?”

“네?”

“아니면 강지우랑 태훈이랑 넷이 만나자는 거 내가 싫다고 해서 그래?”

사랑은 도한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두 눈만 깜빡거렸다.


“그것도 아니면, 막상 나 만나 보니까 별로 재미가 없나.”

그가 미간을 좁히며 조금 화가 난 듯한 얼굴로 읊조렸다.


“웃지도 않고 내내 조용하고. 나하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것 같고. 지루한지 시계만 보더라, 너.”

그제야 사랑은 도한이 하는 말을 이해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숨긴다는 게 그에게는 그렇게 비친 모양이다.

오늘의 데이트가 별로였다고.

사랑은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곤란했다. 그때 도한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랑 사귀겠다고 한 거 후회하는 것 같은데, 그렇…….”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사랑이 두 손을 휘저으며 재빨리 외쳤다.

지금이라도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할 것만 같아서 마음이 급했다.


“저도 선배님하고 단둘이서만 만나고 싶었어요. 해장국 정말 맛있어서 속이 확 풀렸고 영화는 너무 재밌어서 1편도 꼭 찾아봐야지 했어요. 아, 맞다! 그리고 손잡았을 때 좋아서 기절할 뻔했고 나란히 걸으면서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 참느라 힘들었어요. 너무 좋아하는 티 내면 나한테 금방 싫증 날까 봐, 내가 너무 연애 초짜처럼 굴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잘 안 웃었던 것뿐이에요. 선배님하고 사귀는 거 절대 후회 안 해요. 꿈에서도 키스할 만큼 어제도 너무 좋았고 또…….”

사랑은 생각나는 대로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이대로 그를 놓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서 두 눈에 눈물까지 맺혔다.

또 좋았던 게 뭐가 있었는지 그녀가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도한이 그런 사랑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전 끝내지 못한 자신의 말을 이어붙였다.


“그렇대도 무를 생각 없으니까 꿈도 꾸지 말라고.”

“……네?”

사랑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머리가 울려서 방금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단번에 알아듣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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