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나하고 해, 연습
(20/63)
#20화. 나하고 해, 연습
(20/63)
#20화. 나하고 해, 연습
2023.03.10.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내가 귀엽다니.
사랑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워서 입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신경 써서 입고 왔는데. 이 정도면 돼?”
“네?”
사랑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멍한 표정으로 묻자 도한이 자신의 옷차림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사랑은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고백을 거절하겠다고 말했더니, 이번엔 제대로 차려입고 나온 것이다.
물론 운동화까지 갖춰 신고.
진짜 날 좋아하는 건가.
사랑은 도한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뭐, 예쁘네요……. 옷이.”
잘생겼다는 말은 질리도록 들었을 테니 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관심 없다는 듯 대충 훑어보자 도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하면 진심이 되는 건가?”
“아니요.”
“왜 또. 뭐가 문젠데.”
도한은 고백의 늪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긴장감에 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 상태가 미치도록 답답했다.
게다가 어젯밤 키스까지 했으니 그녀를 향한 마음이 폭주하고 있었다.
사랑이 도망치는 바람에 미처 끝내지 못한 아쉬움까지 더해져, 도한은 지금 한마디로 안달이 났다.
다만 워낙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편이라 아무도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랑은 침착한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 볼까요?”
“해 봐.”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듯한 그의 어투에 사랑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러곤 앞을 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지도한이 갑자기 내가 왜 좋다는 거지?”
도한은 그녀의 독백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욕이라도 안 나오면 다행일 것 같았다.
“윤재가 나 좋아한다고 하니까 아쉬워졌나? 남 주긴 아까우니 자기가 갖겠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자기 좋다고 정신 못 차리니까 불쌍했나? 그렇게 좋다고 하는데 한번 만나 주지, 뭐. 그런 생각인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이 중에 뭐가 정답이냐며 사랑이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도한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다 틀렸어.”
“그럼 뭔데요?”
“너랑 있으면 편해서.”
마음이 안정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늘 어둡고 가시 돋친 가슴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기분.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비정상적으로 뛰는 심장과는 별개의 느낌이었다.
도한은 사랑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따스함에 조금씩 평온을 찾았다.
“아. ‘내가 만만해서’를 빼먹었네.”
“왜곡하지 마. 그런 뜻 아니야.”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편하다는 게 말이 돼요? 저는 선배님 엄청 불편해요. 지금도 가슴 떨려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겠는데.”
“나도 떨려.”
“거짓말. 누가 보면 여동생이랑 있는 줄 알겠는데. 너무 편안하셔서.”
“여동생한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진 않잖아.”
사랑은 제게서 눈을 떼지 않고 살짝 미소를 짓는 도한을 보며 그만 입을 다물었다.
키스라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입술이 괜히 간지러웠다.
바로 어제 그의 입술이 가져다준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 잠깐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번 고백도 거절이야?”
“그, 글쎄요.”
“생각할 시간 같은 건 못 줘. 지금 결정해.”
“뭐, 뭘요.”
“나랑 사귀는 거.”
“뭐가 그렇게 급해요? 나는 몇 달을 기다렸는데.”
“말했잖아. 키스하고 싶다고.”
사랑은 아까부터 계속 아무렇지 않게 키스 얘기를 꺼내는 그가 황당했다.
“그러려고 사귀자는 거예요? 단지 스킨십 때문에?”
그녀의 오해에 도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적절한 비유를 떠올렸다.
“너, 드라마 보다가 중요한 순간에 정전이 되면 기분이 어때.”
“그야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미치죠.”
“지금 내가 그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일까 싶어 사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어제 도망쳐서 중간에 그만뒀잖아. 그래서 미치겠다고.”
그가 입술을 노골적으로 바라보자 사랑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고백도 아직 받아들이기가 어려운데 금방이라도 키스를 퍼부을 것 같은 눈빛이라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 이런 남자와 사귈 수 있을까.
연애 경험만 가지고 위치를 따지자면 그는 재벌이고 나는 하층민인데.
그야말로 수준 차이가 심각했다.
“어제는 선배님이 절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또 사귀기도 전이었잖아요. 도망치는 게 당연하죠.”
“그래. 미안해. 어젠 내가 여유가 없었어. 네가 정윤재 찾아가겠다고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사랑은 왜 또 그 얘기냐며 눈을 흘겼다.
왠지 앞으로도 이 문제로 이따금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무슨 말을 하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
그녀가 막 생각을 하려는데 도한이 알려 주었다.
“좋아해. 진심으로. 우리 사귀자.”
그의 깔끔한 정리에 사랑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도 모자라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아프기도 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결국 사랑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 순간 도한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저를 보게끔 시선을 맞춘 뒤 천천히 입술로 다가갔다.
사랑은 그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왔을 때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러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손부터 잡아야 해? 그런 거면 맞춰 주고.”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피하지 마.”
그가 다시 입술을 찾자 사랑이 급히 말했다.
“제가 아직…….”
제게 할 말이 남은 것 같아 도한은 행동을 멈추고 기다렸다.
그녀가 머뭇거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연습을 못 해서요.”
“연습?”
“네. 윤재한테 부탁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 걸 누구한테 부탁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좀 난감한 부분이다 보니.”
“무슨 말이야, 그게.”
“키스요. 연습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저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어떻게든 배워 올게요. 연습만 하면 저도…….”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창피해서 사랑은 고개를 조금 더 옆으로 틀었다.
하지만 도한이 말을 끊고 그녀의 얼굴을 제게 돌려 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그가 입술을 한 번 쪽 빨아 당기고 놓아주자 사랑의 두 눈이 잔뜩 커졌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
“나하고 해, 연습. 질리도록 해 줄 테니까.”
더는 안 봐주겠다는 듯이 도한은 그녀의 입술을 제 입에 단단히 가뒀다.
다시는 피하지 못하도록.
어제처럼 눈앞에서 놓치는 일이 없도록.
사랑은 입술에서 느껴지는 강한 흡입력과 마찰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귓가에 전해지는 끈적거리는 소리 또한 그녀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농밀한 키스였다.
어제도 적응하지 못했던 사랑이 지금의 그를 받아들이기란 역부족이었다.
온몸이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잠시 입술을 떼고, 아니 입술을 붙인 건지 뗀 건지 알 수 없는 밀착된 상태에서 속삭였다.
“눈 감아.”
눈을 뜨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사랑은 다정하게 들리는 그 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부끄러움에 사랑의 몸이 더욱 경직되었다. 도한은 그녀의 뒷머리를 손으로 받치고 고개를 조금 틀어 부드럽게 입술을 머금었다.
사랑은 뻣뻣하게 굳은 채 그가 주는 황홀경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처음과 달리 도한의 입술은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몸에 힘을 빼지 못했다.
그가 입술을 놓아주고 나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그만 가요.”
사랑은 최대한 도한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어제는 중간에 도망이라도 쳤지.
지금은 끝까지 붙잡혀 키스 실력을 고스란히 들켜 버리고 말았다.
실력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바보같이 입술 한번 움직여 보지 못했으니까.
빨리 집으로 들어가서 숨어 버리고만 싶었다.
도한은 걸음을 서두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자신이 먼저 연습시켜 주겠다고 사랑을 괴롭힐 것만 같았다.
그만큼 그녀와의 키스는 좋았다.
* * *
집에 들어온 사랑은 불을 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전 집 앞에서 도한과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봐도 선배한테 깍듯하게 인사하는 후배처럼 고개를 숙였던 것 같다.
그럼 안녕히 가시라는 말만 남기고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도대체 키스는 어떻게 했을까.
“하긴 뭘 해. 자기 혼자 다 했지.”
직접 해 본 경험은 없어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숱하게 봤는데 이렇게까지 못할 수가 있을까.
사랑은 스무 살이 되도록 뭐 했나 싶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스로가 참 한심스러웠다.
도한의 실력이 대단해서 더 굳어 버린 탓도 있었다.
질리도록 연습시켜 주겠다는 그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키스를 잘할 수 있을까.
오늘 내가 느꼈던 아찔함을 그에게도 전해 줄 수 있을까.
사랑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도한이 저를 좋아한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사귀자마자 키스 걱정을 한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부끄러움에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데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너 왜 전화도 안 받아!”
지우가 대뜸 소리를 지르고 들어와 불을 켰다.
“불도 안 켜고 뭐 해. 너 괜찮아?”
지우는 어제도 술을 마셔서인지 피곤한 얼굴로 먼저 가겠다고 나선 사랑을 계속 걱정했다.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궁금해서 몇 번이나 전화를 해 봤다.
그런데 받지를 않아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서둘러 집으로 왔다.
“지우야. 나 있잖아.”
“왜. 너 뭐.”
사랑이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놀란 지우가 사랑을 살폈다.
불현듯 아까 도한이 제게 모임이 끝났냐고 보내 온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랑의 촉촉한 눈이 왠지 그와 상관있을 것 같았다.
강의실 앞에서도 도한이 사랑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자세히는 몰라도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내가 말이야…….”
떨리는 사랑의 목소리에 지우는 바짝 긴장했다.
도한이 또 상처 주는 말을 했겠지 싶었다.
“남자 친구가 생겼어.”
“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지우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정윤재가 정말 너 좋아한대? 둘이 사귀기로 했어?”
“아니, 윤재 말고.”
“그럼 누구…….”
이번엔 지우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너 설마.”
“도한 오빠하고 내가 오늘부터 사귄대, 지우야.”
사랑은 이게 정말 사실일까 싶어 남의 일처럼 얘기했다.
지우에게 알리고 나니 이제야 실감이 나서 눈물이 맺혔다.
“그게 정말이야? 도한 오빠가 너한테 고백했어?”
사랑이 자랑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지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입을 열면 안 좋은 소리만 가득 쏟아질 것 같았다.
기뻐서 눈물까지 차오른 애한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동안 사랑이 도한 때문에 마음고생 한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본 친구로서 오늘만큼은 조용히 있기로 했다.
“축하해. 드디어 소원 이뤘네, 이사랑.”
“응. 고마워.”
사랑에겐 첫 남자 친구이니 지우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부디 두 사람의 연애가 순조롭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