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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언제부터 그렇게 귀여웠냐 (19/63)


#19화. 언제부터 그렇게 귀여웠냐
2023.03.06.


사랑은 멍한 얼굴로 두 눈만 깜빡거렸다.

방금 도한이 제게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직 술이 덜 깼나.

아니면 지금 이거 꿈인가.


“왜 대답 안 해.”

뭘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건데요.

사랑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술만 달싹였다.

도한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열심히 생각을 마친 사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아직도 신입생이에요.”

“알아.”

“어제 그게 첫 키스고요.”

“미안해. 첫 키스를 그런 식으로 망쳐 놔서.”

“첫 남자 친구, 첫 연애, 첫 키스. 이런 제가 부담스럽다고 하셨잖아요.”

“지금도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야.”

“그런데 왜…….”

윤재에게 고백을 받았을 땐 좋아해 줘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도한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데 당연히 기뻤다.

그렇다고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연애도 안 해 보고 키스도 할 줄 모르는, 신입생에 불과했으니까.

그가 좋아할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었기에 그의 마음이 의심스러운 게 당연했다.

도한은 불신을 담고 있는 사랑의 두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예외를 두고 싶을 만큼 네가 좋아.”

사랑의 눈빛이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었다.


“신입생이든, 첫 연애든, 첫 키스든, 그런 거 다 상관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널 좋아해.”

이내 그녀의 두 눈이 촉촉해졌다.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이 안 되잖아.

윤재를 좋아하라고 할 땐 언제고.

태훈의 후배와 소개팅을 할 때도 가만히 있더니.

설마 그때 소개팅에 나가지 말라고 한 게 그래서였나? 날 좋아해서?

그랬으면서 지금껏 마음을 감추고 있었던 거라면 분명 미워야 하는데 사랑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절대로 감동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도한 때문에 속상했던 날이 얼만데, 고작 고백 한 번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굴긴 싫었다.

게다가 지금 그는 너무나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반팔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까지는 그렇다 쳐도 슬리퍼는 너무한 거 아닌가?

마치 편의점에 가려다가 우연히 마주쳐 생각났다는 것처럼 툭 던지듯이 하는 고백이라니.

물론 얼굴에선 빛이 났지만 이건 예의가 아니었다. 성의가 없었다.

사랑은 괘씸한 마음에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냈다.


“그래서요?”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도한은 당혹스러웠다.

왜 이제야 고백을 하느냐고 원망을 하거나, 결국 이럴 거면서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느냐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아무 감정도 없는 ‘그래서’라니.

밤새 준비한 말들은 여기까지였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미안한데 나는 그런 게 상관있어졌어요.”

“뭐?”

“첫 연애고 첫 남자 친구라서, 이렇게 자고 일어난 옷 그대로 하는 고백은 못 받아 주겠다고요. 전혀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거든요.”

도한은 무슨 말인가 싶어 자신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내가 왜 이러고 나왔지?

9시 수업이 있는 사랑이 일찍 집을 나선다는 걸 알기에 그에 맞춰 샤워를 하고 기다렸다.

머리를 말리면서 수도 없이 고백을 연습하다 보니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잊어버리고 집에서 나오고 말았다.

월요일 말고는 이 시간에 밖으로 나올 일이 없어 저도 모르게 평소처럼 슬리퍼를 신었나 보다.

미치겠네.

이러고 좋아한다고 했으니 진심으로 느껴질 리가 있나.

처음으로 해 보는 고백이라 아침부터 긴장해서 이런 실수를 낳았다.

그가 자책하는 사이 사랑은 그의 손에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가져가 그만 자리를 떠났다.

뒤에서 도한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랑은 조금 전 당황하는 그의 표정이 마음에 들어 학교에 가는 내내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루아침에 그녀의 세상이 달려져 있었다.


 

* * *

사랑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강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제는 혜리를 업고 집에 데려간 도한이 원망스러워서 그랬다면 오늘은 그 반대였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날 좋아했을까.

사랑은 자신의 입꼬리가 시도 때도 없이 올라가서 당황스러웠다.

나라는 애는 정말 자존심도 없는지.

지독한 말을 그렇게 듣고도 저를 좋아한다는 한마디에 기분이 하늘을 나는 듯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가 정말 사귀는 건가?

손도 잡고 어제처럼 키스도 하고, 또……

사랑은 한참이나 앞서 나가는 자신의 무한한 상상력에 놀라 얼른 고개를 저었다.

당장 손을 잡는 것부터도 못할 것 같은데 무슨.

생각만으로도 손이 떨려 왔다.


“나가자, 사랑아.”

“어? 어. 그래.”

어느새 강의가 끝나고 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사랑은 수업을 통째로 날려 버린 자신이 한심했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날이 많을 것 같아 한숨이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이 강의실을 나서자 복도에 서 있던 도한이 다가왔다.

여기서 그를 보는 건 처음이라 지우가 놀란 눈으로 인사를 했다.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물어보려는데 도한이 대뜸 사랑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수업 다 끝난 거지?”

“네.”

사랑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강의실 앞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편한 차림새였던 아침과 달리 눈앞의 그는 멀끔하게 차려입고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날 좋아한다고 했던 사람이 맞는 건지.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있을까.

나는 그를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가 좋아한다는 것과 자신이 좋아한다는 것의 의미는 다른 게 분명하다며 사랑이 눈썹을 찌푸렸다.


“얘기 좀 해.”

“하세요.”

“여기서 말고.”

“저 약속 있어서 가 봐야 해요.”

둘의 대화가 심상치 않자 지우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사랑이 어제 혼자 술을 마신 것도 그렇고, 둘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랑의 대답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도한이 아무 말도 않자 지우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오늘 동기들끼리 만나기로 했거든요.”

약속이 진짜였다는 걸 확인한 도한은 다시 사랑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럼 끝나고 전화해.”

“늦을 거예요.”

“괜찮아.”

“술 마실 거라서 많이 늦을지 몰라요. 다음에 얘기하세요.”

“상관없으니까 연락해.”

사랑은 연락하겠단 말은 끝까지 하지 않은 채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공대 건물을 나와서야 지우가 다급하게 물었다.


“뭐야, 뭐야. 둘이 분위기가 왜 이래?”

“뭐가.”

“도한 오빠가 너한테 매달리는 것 같은 이 분위기 뭐냐고.”

“어딜 봐서 매달리는 거야.”

“너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렸잖아, 도한 오빠가.”

“지나가는 길이었나 보지.”

“그건 그렇다 치고. 오빠가 너한테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건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까 피하는 거 아니었어?”

사랑은 고백받은 사실을 아직은 지우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또 다른 걱정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결정이 난 후에 알릴 생각이다.


“피하는 거 티 났어?”

“너 그런 거 못 속이잖아. 얼굴에 다 나타나면서.”

“나 좀 재수 없었나?”

“그 정도까진 아니고. 암튼 뭐냐고, 둘이.”

“나중에 얘기해 줄게. 지금은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까.”

“치사하게.”

“미안.”

사랑이 어색하게 웃자 지우는 삐죽 나온 입을 집어넣고 기다려 주기로 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친구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 *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은 시끌벅적했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내내 수다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어제도 취했던 사랑은 이틀 연속 술을 마시려니 체력이 따라 주질 않았다.

어제와 거의 비슷하게 마셨는데 밤새 잠을 못 잔 탓에 취기가 더욱 빠르게 올라왔다.

이대로 있다간 이 자리에서 잠이 들 것 같아 그녀는 먼저 가 보겠다며 인사를 하고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학교 정문을 지났다.

잠깐 쉬었다 가고 싶어서 정문 안으로 들어가 작은 정원 내 벤치에 앉았다.

조용한 분수대 근처에 은은한 조명이 깔려 있었다.

사랑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도한에게 전화를 할까 망설였지만 그만두었다.

취한 상태로 만나고 싶진 않았다.


“내일 하지, 뭐.”

내일은 주말이니,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서 천천히 연락하면 되겠지.

그녀가 핸드폰을 가방에 넣으려는데 진동이 길게 울렸다.

지우가 잘 들어갔냐고 전화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도한이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내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사랑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전화하라고 했잖아.

내가 나온 걸 어떻게 알았을까, 놀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도한이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안 끝났는데요.”

목소리만으로 거짓말인지 알 수 없을 테니 사랑은 시침 뚝 떼고 말했다.

겨우 그 정도로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 강지우한테 확인했어.

이런. 치밀하기도 하지.

그녀가 난감함에 얼굴을 찌푸렸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 어디야, 지금.

“……학교 정문이요.”

사랑은 여기서 더 거짓말을 했다간 왠지 크게 혼이 날 것 같아 사실대로 말해 버렸다.


- 기다려. 거의 다 왔으니까.

“네?”

그녀가 당황하며 물었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졌다.

지우에게 확인했다더니 곧바로 집에서 나온 건가.

내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전화를 안 받았으면 어쩌려고.

원래 그렇게 충동적인 성격인가.

그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낯설게 느껴졌다.


“말 참 안 듣는다, 너.”

사랑은 도한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뛰어왔는지 거친 숨소리를 내며 그가 옆에 앉았다.


“끝나면 전화하라고 했잖아.”

“그러겠다고 대답한 적 없는데요.”

도한은 숨을 고르면서 피식 웃었다.

연락이 안 올 것을 예상했던 그는 지우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사랑이 먼저 집으로 갔다는 답을 받았다.

길이 엇갈릴 수도 있었지만 도한은 무작정 걸어 나왔다.

못 만나면 할 수 없고.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랑에게 전화를 해 본 것이다.

학교 정문에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도한은 전화부터 끊고 뛰었다. 그녀가 또 도망가 버릴까 봐 걱정됐다.

오늘 꼭 만나야 했다.

엉망이 되어 버린 아침의 고백을 다시 제대로 하려면.


“술 많이 마셨어?”

“네.”

“근데 왜 집에 안 가고.”

“내 마음인데요.”

사랑이 불퉁하게 말하자 도한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왜요. 뭐요.”

술만 마시면 용기가 솟는 건지, 사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대꾸를 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서 그런가.

처음보다 그가 편해진 것도 이유인 것 같았다.

사랑은 도한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기에 왜 이렇게 불량스러워졌냐는 말을 예상했다.


“너 언제부터 그렇게 귀여웠냐.”

“……네?”

귀도 술에 취했나.

사랑은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의심되었다.

‘너 언제부터 그렇게 까불었냐’가 맞는 것 같은데, ‘너 언제부터 그렇게 귀여웠냐’로 들렸다.

이래서 술이 위험한 거다.

사랑은 정신 좀 차리자며 두 손으로 귀를 톡톡 두드렸다.


“몰랐네. 이렇게까지 귀여운 줄은.”

또다시 귀엽다는 말이 들렸다. 사랑은 손을 내리고 도한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가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고 있는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안 그래도 술 때문에 붉어져 있던 사랑의 얼굴은 불이라도 난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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