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아깐 하고 싶다며
(18/63)
18화. 아깐 하고 싶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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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아깐 하고 싶다며
2023.03.03.
느닷없는 손님의 방문에 도한은 문을 닫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제멋대로 남의 집에 들어와선 이곳저곳을 들추는 사랑이 어이가 없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책상 위를 뒤적거리고 침대 이불을 들어 올리고.
베개 아래까지 확인하며 그녀가 핸드폰을 찾고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라고 막 들어와.”
“어디긴 어디예요. 내 물건 가져간 나쁜 놈 집이지.”
막 나가기로 하니 사랑의 눈엔 보이는 게 없었다. 거침없이 대꾸하며 집을 뒤지는 손길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도한은 문을 닫고 들어와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디다 숨긴 거야.”
설마 가지고 있나?
도한이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았으니 바지 주머니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를 수색할 생각으로 침대 앞에서 뒤로 홱 돌았다.
“깜짝이야.”
어느새 가까워진 도한이 딱 버티고 서 있었다. 놀란 사랑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당장 나가.”
“핸드폰 주면 나갈게요.”
“내일 줄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지금 주면 너 정윤재한테 전화할 거잖아.”
“그게 선배님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술 취한 후배가 후회할 짓을 하겠다는데 막아야지. 선배로서.”
“윤재가 부탁할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단 말이에요.”
강의실에서 처음 윤재를 만났을 때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면서 그렇게 말했다.
사랑은 그때를 떠올리며 어서 핸드폰을 달라고 도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한은 점점 화가 나는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리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래서 키스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겠다고?”
“모르는 사람한테 부탁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윤재는 날 좋아하니까 어쩌면 들어줄 수도 있겠죠.”
“뭐? 정윤재가 널 좋아한대?”
“네. 선배님은 알고 있었으면서 뭘 그렇게 놀라요? 암튼 빨리 달라고요, 좀. 술 깨기 전에 전화해 보게.”
윤재가 부탁을 안 들어주면 술김에 헛소리한 것 같다고 잡아뗄 수라도 있으니까.
누가 봐도 정신 나간 짓이었지만 사랑은 지금 윤재의 도움이 절실했다.
키스도 할 줄 모르는 여자라는 게 자존심 상하고 창피했다.
아무나 붙잡고 가르쳐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었다.
“절대 못 줘.”
도한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윤재가 정말로 사랑을 좋아하고 있을 줄이야.
아니길 바랐는데, 벌써 고백까지 했다는 말에 심란하기만 했다.
사랑은 뭐라고 대답했을까.
남자 친구 사귀려고 대학에 왔다고 했으니까 기뻐했으려나.
내 거절로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 자신을 좋아해 준다는 말을 들었으니 위로가 됐으려나.
이대로 짝사랑은 접고 정윤재한테 가 버리자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도한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이라도 사랑을 잡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녀와 어울리는 남자에게 보내야 하는 건지.
제게 오면 상처받을 게 뻔하고, 정윤재한테 가면 적어도 아프진 않을 텐데.
도한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일단 사랑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었다.
이렇게 한 공간에 있는 상태로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그가 문을 열어 주려고 걸어가는데 사랑이 쫓아와서 앞을 가로막았다.
“주머니에 있는 거 맞죠.”
사랑은 도한의 바지 주머니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거 내 핸드폰 맞잖아요.”
그가 대답하지 않자 사랑이 무작정 그의 바지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을 것처럼 다가오자 도한은 기겁하고 물러섰다.
“뭐 하는 거야, 너.”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가면 억울하잖아요.”
“그러게 누가 오래? 겁도 없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도한이 큰소리를 치자 사랑은 기분이 나빴다. 지금 화낼 사람이 누군데 적반하장으로 나오나 싶었다.
“좀 들어오면 어때서요. 어차피 나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뭐?”
“선배님은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할 텐데, 내가 이 집에 들어오는 걸 왜 겁내야 하냐고요.”
입을 맞추고 싶다는 도발에도 당황하긴커녕 할 줄은 아느냐고 여유롭게 받아쳤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집에 단둘이 있다고 손끝 하나 건드리겠는가.
사랑은 오히려 자신이 그를 덮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혜리가 도한의 동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구질구질하게 저 혼자 상처받고.
그런데도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쉽게 포기가 안 되고.
이러다 무작정 입이라도 맞출까 봐 무서워진 사랑은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주기 싫으면 말아요. 윤재한테 직접 찾아가면 되니까.”
더는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 그녀가 돌아섰다.
하지만 도한에게 손목을 붙잡혀 다시 그를 마주했다.
“제정신이야?”
“제정신 아니니까 윤재한테 간다는 거예요.”
“가서 뭐 어쩔 건데. 그 집에도 쳐들어가려고?”
“남의 집엘 어떻게 들어가요.”
“그럼 여긴 어떻게 들어왔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 집이니까요!”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는 눈빛으로 사랑이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고백을 몇 번이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말을 꺼내야 가슴속이 텅 비는 걸까.
아직까진 수북이 쌓여 있어 겨우 이 정도로는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날 좋아하는 건 맞는 거지?”
“뭐라고요?”
“확인을 좀 해야 해서.”
“하, 내가 언제쯤 선배님을 포기할지 궁금해요?”
“아니.”
“그럼 뭐 때문에 그딴 걸 확인해요,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자길 좋아하냐고?
그거 알아서 뭐 할 건데!
사랑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술기운까지 더해져 온몸에서 열이 날 지경이었다.
진짜 진짜 나쁜 놈.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붓는데 도한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걸 알아야 키스를 하니까.”
“뭐, 뭐, 뭐라고요?”
뭐를 해? 키스?
사랑의 두 눈이 쏟아질 듯 커졌다.
“키스하면 피할 거야?”
“……네.”
“왜. 아깐 하고 싶다며.”
도한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자 사랑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이렇게 됐더라.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딱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지금 그와 키스를 하면 안 된다는 것.
“키스 못 하는 여자 별로라고…….”
사랑은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도한이 그대로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을 삼켜 버린 것이다.
물컹거리면서 부드러운 느낌이 생경했다.
입술이 그에게 빨려 들어갈 때마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다리가 휘청하자 그가 그녀의 두 팔을 가볍게 잡았다.
그러면서도 입술은 놓아주지 않고 좀 더 진득하게 빨아당겼다.
도한의 능숙한 키스에 사랑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입술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움직여도 되는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 무서워졌다.
나는 키스를 할 줄 모르는데.
키스 못 하는 여자는 별로라고 했으니 실망할 게 뻔한데.
사랑은 도한의 반응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힘껏 밀치고 도망쳐 버렸다.
사랑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리자 도한은 잠시 당황했다.
“먼저 입 맞추고 싶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도한은 입술을 말아 물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그가 입술을 매만졌다.
그녀의 입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달콤했다.
사랑이 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키스하고 싶었다.
아니, 그녀가 공원에서 제게 입 맞추고 싶다고 먼저 도발했을 때부터, 어쩌면 그보다 오랜 어느 날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오늘은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랑이 혜리와 자신의 사이를 의심하며 비뚤어진 마음으로 정윤재를 찾아가겠다고 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기껏 핸드폰을 빼앗았더니 직접 그를 보러 가겠단다.
그러니 안 돌고 배기겠나.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키스를 배워 오겠다는데, 어느 미친놈이 얌전히 보내 줄 수가 있을까.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막아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순서는 바뀌었지만 지금은 고백보다 키스가 먼저였다.
그녀를 볼 때마다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순수함에 다가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고백도 거절했고 다른 남자와의 소개팅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는 폭주하는 심장을 막을 길이 없었다.
안간힘을 쓰며 붙잡고 있던 브레이크는 이미 망가져 버렸다.
게다가 누군가를 향해 마음이 내달리는 게 처음이라 감당되지도 않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고백하면 받아 주긴 하려나.”
지금껏 제가 한 짓이 있으니 영 자신이 없었다.
도한은 침대에 털썩 누워 천장을 멀뚱히 바라봤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사랑뿐이었다.
키스하면서 긴장해 보긴 오늘이 처음이었다.
* * *
아침에 일어난 사랑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제 마신 술도 술이지만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첫 키스였다.
그것도 무려 도한과의 키스라니.
나한텐 전혀 관심도 없어 보였던 그가 먼저 내게 입을 맞췄다.
왜 그랬을까.
대체 나한테 왜 키스를 한 걸까.
사랑은 도한과의 키스로 기쁜 것보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상대는 지도한이다.
도망치지 않았다면 키스가 끝난 후에 역시 넌 안 되겠다고 할 것만 같은 지독한 사람.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하아. 그나저나 얼굴을 어떻게 보냐.”
금요일이라 도한과 같은 수업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공대 건물에서 마주칠 수도 있었다.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그렇게 도망쳐 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이런 나는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닌 거겠지.
그동안 도한을 혼자 좋아하면서 그와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할 줄도 모르면서 그의 입술만 보면 감촉이 어떨지 궁금하고 그랬다.
그런데 막상 하고 보니 다시는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것 같다.
좋고 나쁘고를 느낄 여유도 없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미치겠네, 정말.”
아무리 피해 다녀도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도 모자라, 바로 옆 건물에 살고 있으니 마주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래도 주말까지는 버틸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오늘도 강의실에 가장 먼저 도착하겠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선 사랑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흠칫 놀랐다.
“속은 괜찮아?”
도한이 그녀의 집 앞에 서 있었다.
9시에 수업도 없는 그가 여긴 왜 있는 건지.
방금 씻고 나왔는지 머리카락이 조금 덜 마른 도한은 흰색 반팔 티셔츠에 회색 추리닝 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완벽하게 소화해 섹시함을 풍겨 대자 사랑은 못마땅했다.
편의점에 가는 길인가.
타이밍도 참 안 맞게 하필 지금이냐고. 우연한 만남이 야속했다.
“네.”
사랑은 눈도 맞추지 못한 채 조용히 대답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곧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돌려세웠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는 건 어제의 키스 때문일까.
사랑은 자연스레 그의 입술에 눈길이 가 얼른 바닥으로 고개를 내렸다.
아침부터 심장이 심하게 요동쳤다.
“이거 가져가야지.”
도한이 핸드폰을 건네자 사랑은 그제야 그가 밤새 자신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가 핸드폰을 가져가려고 하자 도한이 손을 뒤로 물렸다.
“그 전에 대답부터 해.”
“무슨…….”
사랑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정윤재한테 전화 안 하겠다고.”
난 또 뭐라고.
어제 부렸던 진상이 모두 기억나는 사랑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안 해요. 어젠 제가 취해서 실수했어요.”
“키스 가르쳐 달라고 부탁도 하지 마.”
“안 한다고요. 어젠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봐요.”
“좋아해.”
“아, 글쎄 안 한다니…… 네?”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든 사랑에게 도한이 다시 말해 주었다.
“좋아한다고.”
처음으로 해 보는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