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키스하고 싶어져요
(17/63)
17화. 키스하고 싶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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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키스하고 싶어져요
2023.02.27.
사랑은 집으로 가는 길에 공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먼저 가세요.”
도한과 어쩔 수 없이 같이 걷고 있었지만 더는 지우와 태훈이 보이지 않아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고 싶었다.
“너는.”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요.”
“같이 가. 어두운데 술 취해서 혼자 어딜 가려고.”
언제부터 내 걱정을 이리도 했을까.
술 취한 사람 챙기는 게 취미인가.
사랑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삼키고 싱긋 웃었다.
“윤재 만나러 갈 건데요.”
“뭐?”
도한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들리자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었다.
“잠깐 보고 가려고요.”
“내일 맨정신에 가.”
“가세요, 그럼.”
그녀가 도한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사랑은 상관하지 않고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벤치에 앉았다.
술이라도 깨고 갈 생각이었다.
윤재를 만나러 간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나도 이제 너 말고 다른 남자를 좋아할 거라는 걸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지도 못할 주제에. 유치하게도.
“나쁜 놈.”
도한을 떠올릴 때마다 욕부터 나오는 걸 보니 정말 그가 싫어졌나 보다.
그게 아닌가. 애증인가.
미움이 섞인, 결국은 사랑인 건가.
사랑은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야?”
어둠 속에서 들리는 낮게 깔린 음성에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바로 했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도한이 제 앞에 서 있었다.
* * *
도한은 사랑의 옆에 앉았다.
정말 정윤재를 만나러 가는지 확인하러 따라온 건 아니었다.
저녁 시간에 술까지 마시고 여자 혼자 공원을 걷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냥 여자도 아니고 이사랑이니까 더 그랬다.
계속 신경 쓰이고 걱정되는 그녀라서.
정윤재를 만날 때까지만 조금 떨어진 채로 쫓아가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 후엔 그 친구가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
그런데 사랑이 우뚝 멈추더니 벤치에 앉았다.
여기서 정윤재를 만나기로 했나.
아니면 자신과 함께 가기 싫어서 핑계를 댄 건가.
이대로 그냥 돌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그녀가 내뱉은 ‘나쁜 놈’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후자라는 걸 알았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왜 안 가셨어요.”
“정윤재가 너 좋아하는 거 같다고 해서 그래?”
“그냥 가세요.”
“아니면 내가 다른 여자한테 고백받아서 기분 나빠?”
“제가 갈게요.”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건지 사랑은 도한이 짜증스러웠다.
그의 옆을 겨우 벗어났는데 또다시 이렇게 만나다니.
그를 보지 않으려면 집으로 가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사랑은 도한의 질문은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한 채 일어났다.
그런데 취기 때문인지 순간 어지러워 다리가 휘청거렸다.
넘어질 것 같은 그녀를 도한이 재빨리 붙잡아 벤치에 앉혔다.
“도대체 뭐냐고.”
사랑은 도한에게 잡힌 팔에 시선이 갔다.
그의 손길이 닿은 것에 놀란 것보다 혜리를 만졌을 그 손으로 자신의 팔을 잡고 있다는 게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뿌리치고 싶었지만 그의 목소리에 먼저 반응했다.
“말해.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왜 나쁜 놈이 됐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선배님은 원래 저한테 나쁜 놈이었어요. 제 고백 거절했을 때부터.”
“아니, 어제부터인 거 같아. 근데 그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어. 그러니까 말 좀 해 달라고. 답답해 죽을 것 같으니까.”
어제부터인 건 어떻게 알았을까.
도한에게 사귀자고 했던 어제의 그 여자 말대로 나는 정말 얼굴에 감정을 다 드러내 놓고 다니는 건가.
사랑은 그를 좋아하고 나서부터 스스로가 점점 싫어졌다.
“알면 뭐 어쩌실 건데요.”
그녀가 두 눈에 원망을 가득 담아 도한을 바라보았다.
“뭘 어쩔지는 듣고 나서 생각해 볼 테니까 말해. 왜 그렇게 나한테 화가 났는지.”
“팔부터 놔주세요.”
도한은 그제야 자신이 사랑의 팔을 잡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넘어질까 봐 붙잡았던 것뿐인데 부드러운 감촉에 저도 모르게 놓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
그가 손을 놓자 사랑은 잠시 침묵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면 곧바로 들켜 버릴 것 같았다.
이럴 땐 솔직한 성격이 불편했다.
사랑은 결국 어제 본 걸 얘기하기로 했다.
다 듣고 나서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해졌다.
당황하는 모습이라도 보면, 어쩌면 짝사랑이 쉽게 포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언니랑 같이 집에 들어가는 걸 봤어요.”
역시나.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다행히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가슴이 쓰렸다.
“동생이니까 그럴 수 있다는 거 아는데. 그 언니가 전에 오빠랑 깊은 사이라고 해서 저는 두 사람이 남매로 보이지 않아요.”
무슨 말이라도 해 봐요.
듣고 싶다며.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알고 싶다며.
사랑은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어제 나는…….”
“됐어요. 해명할 필요 없어요. 내가 뭐라고 그런 것까지 일일이 얘기해요. 하지 마세요.”
도한이 오해라고 해 주길 바라면서도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사랑의 가슴속에 공존했다.
실은 듣기가 겁이 났다.
“나는 해야겠어. 그러니까 들어.”
도한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명령하듯 말했다.
“어제 나는, 친구 집에서 잤어.”
똑똑히 들으라는 것처럼 그가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사랑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진실에 두 눈이 커다래졌다.
“혜리한테 전화가 와서 가 보니까 이미 취해 있었어. 혜리가 집에는 친구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연락해 놓은 상태라 내 방으로 데려갔던 것뿐이야. 버리고 올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난 친구 집에서 잤고.”
도한은 말을 마치고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밤새 사랑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었을지 생각하니, 처음부터 이런 일을 만든 혜리에게 화가 났다.
더 나아가서 자신과 혜리의 관계를 이 모양으로 만든 아버지가 증오스러웠다.
“혜리가 너한테 했던 말은 무시해. 앞으로도 뭐라고 떠들든 무시해 버려.”
“어떻게 그래요. 깊은 사이라는데. 그렇게 예쁜 언니가 선배님이랑 깊은 사이라는데.”
사랑은 평소였다면 하지 못했을 속마음을 술기운을 빌려 원 없이 쏟아부었다.
아무리 친남매가 아니더라도 어떻게 가족인 오빠를 상대로 깊은 사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건지.
술에 취해 오빠에게 업힌 것까진 이해하겠는데 왜 눈이 마주쳤을 때 보란 듯이 웃었는지.
누가 봐도 혜리는 도한을 가족이 아닌 남자로 대하고 있었다.
사랑은 이런 오해를 일부러 만든 혜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밤새 엄한 상상을 하느라 잠도 못 자고 온종일 번뇌에 휩싸였던 게 억울해서 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도한을 좋아하고 나서부터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내가 취해서 전화하면 나도 업어 줄 거예요? 선배님 방으로 데려갈 수 있냐고요.”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사랑은 멈출 수가 없었다.
도한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업어 주긴 하겠지만 내 방으로 데려가진 않겠지. 바로 옆집에 사는데.”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만약에 내가 멀리 살면 그럴 수 있겠느냐고요.”
도한은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와, 진짜 대단한 후배 사랑이네. 오빠가 이렇게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인 줄 미처 몰랐네요.”
“그럼 버리고 갈까.”
사랑은 왜 나만 버리고 가냐는 눈빛을 하고선 도한을 노려보았다.
“어쩌라는 건데.”
이래도 화를 내고 저래도 화를 내는 그녀가 귀여워서 도한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지 말아요.”
“이젠 내가 웃는 것도 싫어?”
아예 꼴도 보기 싫다는 건가 싶어 도한은 조금 서운했다.
그런데 엄청난 대답을 듣고 말았다.
“키스하고 싶어져요.”
“……뭐?”
“선배님이 날 보고 웃으면 그 입술에 입 맞추고 싶다고요.”
이건 정말 술 때문이다.
사랑은 맨정신일 땐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도한이 어제의 일을 자세히 설명해 줬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팔을 잡는 것조차 불쾌했는데, 어느새 그의 입술을 탐하고 싶었다.
오해가 풀리자 마음도 풀어졌는지 꽁꽁 감춰 두고 있었던 진심이 흘러나와 버렸다.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사랑은 이렇게 된 거, 오늘 아예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자 싶었다.
윤재가 그랬던 것처럼 거절당할 각오하고, 나만 생각하면서 미련이 남지 않게 내지르고 훌훌 털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다짐하니 용기가 솟았다.
사랑이 두 주먹을 불끈 쥐는 동안 도한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당하면서도 가슴이 떨려서 뭐라고 맞받아쳐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이내 헛숨을 터트렸다.
“할 줄은 알고?”
연애 한번 안 해 봤다면서 감히 키스를 운운하다니.
어디서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고 있어.
그것도 내 앞에서.
그렇게 질투에 눈이 먼 얼굴로.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정곡이 찔린 사랑이 뒤늦게 창피함이 밀려와 입을 꾹 다물었다. 도한은 저야말로 그 입술을 삼키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키스 못 하는 여자는 별로라.”
도한은 오늘 내내 영문도 모르고 그녀 때문에 답답했던 게 억울해서 조금이라도 갚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라도 빈정대지 않으면 정말로 그녀에게 키스해 버릴 것 같았다.
“연습해 오면 돼요?”
“뭐?”
오늘 이사랑은 예측 불가였다.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몰라 도한은 넋이 나가 버렸다.
“그깟 키스 배우면 되지, 뭐. 배워 올게요.”
사랑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주소록을 열어 누군가를 찾았다.
도한이 미간을 좁히고 그녀와 핸드폰을 번갈아 쳐다봤다.
“너 지금 뭐 하는데.”
“윤재한테 전화해 보려고요.”
“갑자기 왜.”
“가르쳐 줄 수 있나 물어보게요.”
윤재의 이름을 찾은 사랑이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도한이 재빨리 핸드폰을 낚아챘다.
“어! 뭐예요. 남의 걸 왜 가져가요? 빨리 줘요.”
“싫어.”
“빨리 달라니까요.”
사랑이 아무리 손을 뻗어 봐도 소용없었다.
도한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그녀를 몸으로 막아섰다.
“내일이면 나한테 고맙다고 할 테니까 그만 일어나. 집에 가게.”
그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먼저 일어나 걸어갔다.
“핸드폰 내놔요.”
사랑이 그를 쫓아가며 종알거렸다.
“전화 좀 하게 달라고요.”
“내 말 안 들려요?”
“야! 지도한!”
그녀가 소리를 빽 지르자 도한이 멈췄다.
뒤를 따라가던 사랑은 그의 등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사랑이 아픈 이마를 매만지는데 도한이 그녀 쪽으로 뒤돌았다. 서로의 간격이 한 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라 사랑은 흠칫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도한이 그만큼 앞으로 다가왔다.
다시 좁혀진 간격에 사랑은 숨을 참았다.
숨을 쉬면 그에게 술 냄새가 전해질 것만 같았다.
심장이 터질 듯했다. 숨을 참아서가 아니라 도한이 바로 앞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 댔다.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사랑의 두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일 찾으러 와. 그때 돌려줄 테니까.”
남의 핸드폰을 가져간 주제에 뭐가 그리도 당당한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는 도한의 모습에 사랑은 기가 막혔다.
그러면서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 그가 고개를 숙여 제게 키스하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미쳤다, 이사랑.
기대한 건 뭐고, 왜 아쉬워하는데.
사랑은 그런 자신이 황당해 헛숨을 터트렸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도한의 뒤를 쫓아 뛰었다.
그새 집으로 들어갔는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진짜 갔네.”
사랑은 그의 집을 한 번 노려보고서 자신의 집 현관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다 멈칫하더니 그녀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성큼성큼 걸어 도한의 원룸 건물로 향했다.
3층까지 올라가서는 그의 집 앞에서 벨을 사정없이 눌렀다.
다섯 번쯤 연속해서 누르자 도한이 문을 벌컥 열었다.
“뭐야, 너.”
그가 짜증을 내는 사이, 사랑은 문을 열어젖힌 그의 팔 아래로 파고들어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