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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애틋해 보이는 남매 (16/63)


#16화. 애틋해 보이는 남매
2023.02.24.


사랑은 윤재와 학교 앞 식당을 찾았다.

당구장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지만 더는 배울 필요가 없었다.

도한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배우려고 했으나, 데이트 과제 장소로는 별로라는 말에 그만두었다.

낮에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가 어떤 여자에게 고백받는 걸 들은 것도 한몫했다.

더는 그를 위해 뭔가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사랑은 대학생이 되면 꼭 남자 친구부터 사귀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도한에게 자신은 그저 고백해 오는 많은 이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좋아한다, 사귀자고 말하면 그 자리에서 거절당하는 여자 중 하나.

아무런 의미도 없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가치 없는 기억.

사랑은 다 알고 있는데도 그를 향한 마음을 접는 게 어렵기만 했다.

이쯤 되면 그가 싫어야 정상인데 어떻게 된 게 가슴속의 그는 점점 더 커졌다.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윤재는 이따금 작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당구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더니 갑자기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도 수상했다.


“시험 끝나서 그런가 봐. 그냥 다 귀찮고 재미없고 그러네.”

같이 밥을 먹자고 해 놓고 딴생각에 잠겨 있었던 게 미안했는지 사랑이 얼른 미소를 지었다.

윤재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놀랄 만한 얘기 해 줄까?”

“뭔데?”

사랑도 식사를 마저 하며 눈을 조금 빛냈다.

그가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했다.


“나 너 좋아해.”

일상의 평범한 소식을 전하듯 윤재가 툭 말을 내뱉었다. 사랑은 그만 손에 들고 있던 수저를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놀랄 만하지?”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윤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사랑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만 했다.


“어, 정말 놀라긴 했는데……. 근데 윤재야. 그거 정말이야?”

이런 말을 농담처럼 할 애는 아니었다.

주위에서 다들 윤재가 제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했기에 사랑은 방금 들은 말을 간단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고백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잘 아니까.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누구보다 잘 알아서 함부로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언제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언제까지 안 할 수도 없어서 그냥 오늘 해 버리자 했어.”

윤재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얼굴을 조금 붉혔다. 사랑은 난처한 듯 대답을 망설였다.

저만 모르고 있었던 게 맞았다.

도한을 눈에 담고 있어서 윤재의 마음이 보이지 않았나 보다.

어떻게 말해야 그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고심하며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뗐다.


“저기 윤재야. 나 좋아해 줘서 고마운데…… 실은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알아.”

“뭐?”

“알고 있다고.”

사랑은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고백한 거야. 지금 아니면 영영 못 할까 봐. 네가 그 사람이랑 잘되면 나는 내 마음 전해 보지도 못하고 접어야 하잖아. 너한테는 부담일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럼 내가 좀 억울해서. 차라리 속 시원히 고백하고 거절당하는 게 낫겠더라고. 그래야 내가 널 편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았어.”

윤재의 얼굴이 아까와는 달리 편안해졌다.

정말 속이 시원한지 밝게 웃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가? 너, 나 때문에 불편해?”

“아니야, 나는 괜찮아. 네가 걱정이지.”

“나도 괜찮아. 차이려고 고백한 거니까. 더 마음이 커지기 전에. 난 너랑 계속 친구 하고 싶거든.”

사랑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

남자한테 차였다고 밥맛도 잃은 자신과 달리 윤재는 씩씩했다.

그의 말대로 아직은 좋아하는 마음이 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고마워. 나 고백 처음 받아 봐.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

“다행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 아니라.”

사랑은 이 순간에도 도한을 떠올렸다.

그에게 나의 고백은 어떤 추억으로 남아 있을까.


“그만 일어날까? 너 오늘 피곤해 보여.”

“응, 그러자.”

다시 친구로 돌아간 그들은 가슴 한편에 따뜻한 기억을 남기고 식당을 나섰다.

윤재가 사랑의 집까지 함께 걸었다.


“나 혼자 가도 된다니까.”

“여기 저녁엔 어둡잖아. 가로등이 너무 없어.”

사랑도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은 좋은데 밤길이 무서워서 웬만하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들어가는 편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데려다줘서 고마…….”

인사를 전하던 사랑이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래?”

그녀가 뭔가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윤재는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남자가 술에 취한 것 같은 여자를 부축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제대로 걸음을 못 걷는 여자는 남자한테 안기듯이 기대 있었다.

여자가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지려 해서 남자는 결국 여자를 등에 업었다.

남자의 목을 끌어안는 여자의 두 팔이 애틋해 보였다.

사랑은 그 남자가 자신의 집 옆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자연스레 여자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고, 여자는 사랑에게 마치 보란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남자의 목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랑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남자와 여자는 도한과 혜리였다.


 

* * *

사랑은 온종일 강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교수님 말씀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가끔 멍해졌다.

책을 펼치면 글씨가 아닌 어젯밤 목격했던 도한과 혜리의 모습이 보였다.

여동생이 취했는데 오빠가 업어 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뭔가 개운치가 않았다.

자신도 오빠가 있지만, 아무리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황이어도 안기듯 기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상상하는 것조차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오빠가 저를 업는다고 해도 애정을 담아 두 팔로 오빠의 목을 끌어안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닌가. 인사불성이 되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려나.

사랑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한에게서 혜리가 동생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오해할 만한 장면이었다.

두 사람이 사귄 적은 없다고 태훈이 말했을 때, 지우가 그게 더 이상하다고 얘기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 둘은 충분히 연인으로 보일 터였다.

하필이면 혜리가 도한과 깊은 사이라고 해서 더욱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매 사이.

혹시 혜리는 도한을 오빠가 아닌 남자로 보는 건가.

그렇다면 도한은?

다른 여자들한테는 지독하게 굴어도 혜리에게만은 그렇지 않던데.

단순히 동생이라 그런 걸까.

순간 사랑은 제 생각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녀가 마지막 수업을 들으러 터덜터덜 복도를 걸었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힘없이 걷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앞 좀 보고 다녀.”

고개를 들자 도한이 앞에 서 있었다.


“이쪽에 강의실 없는데 어딜 가는 거야.”

도한은 교수 연구실에 다녀오는 길에 사랑을 마주쳤다.

어제는 교양 수업이 있는 건물 복도에 혼자 앉아 있더니, 오늘은 또 왜 공대에서 혼자 넋을 놓고 돌아다니는지.

지우와 태훈이 연애를 해서 사랑이 혼자인 것만 같아 괜히 두 사람이 못마땅했다.


“아. 잘못 왔네.”

사랑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고 반대쪽으로 걸어왔다는 걸 알아챘다.

그나마 강의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서 다행이었다.


“얼굴은 왜 그렇게 창백해. 어디 아파?”

도한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열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사랑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순간 사랑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그의 손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그 손으로 혜리를 만지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머릿속에 펼쳐지면서 그를 가까이하고 싶지가 않았다.


“괜찮아요. 저 수업 있어서 가 볼게요.”

사랑은 이런 자신이 낯설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녀가 거의 뛰다시피 하며 복도를 벗어나자 도한은 기분이 이상했다.

저를 보는 사랑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고백을 거절하고 계속 밀어내도 보이지 않았던 어떤 감정이 그녀의 두 눈에 비쳤다.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어서 도한은 더 불안했다.

* * *

겨우 수업을 마친 사랑은 지우와 식당을 찾았다.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어제 잘 못 자는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어?”

사랑의 안색이 좋지 않아 지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밤에 계속 뒤척이더니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아니. 그냥 잠이 안 왔어.”

안 그래도 도한을 싫어하는 지우에게 어제의 일을 얘기할 순 없었다.

마침 주문한 칼국수가 나왔다.

각자 앞접시에 덜어서 지우가 막 한 입 먹으려는데 사랑이 소주를 시켰다.


“갑자기 웬 술?”

지우가 크게 뜬 눈으로 물었다. 집에서 둘이 맥주를 마셔 본 적은 있었지만 단둘이 식당에서 소주를 마신 적은 없었다.

직원이 소주 한 병과 잔 두 개를 가져다주자 지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 이따가 태훈 오빠랑 영화 보러 가기로 했는데.”

“그래? 그럼 나 혼자 마시지, 뭐.”

“미안해.”

“뭐가. 내가 마시고 싶어서 시킨 건데.”

사랑은 잔에 소주를 따라 한 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너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지우가 따라 주겠다는데도 사랑은 됐다면서 연거푸 스스로 잔을 채우고 비웠다.


“칼국수나 얼른 먹어. 태훈 오빠 만나러 가야 한다며.”

“천천히 가도 돼.”

사랑은 빈속에 술을 마셨더니 속이 조금 쓰렸다.

어차피 도한 때문에 속이 말이 아니라 이 정도쯤은 참을 만했다.

차라리 술로 아픈 게 나을 것 같아 취하고 싶었다.

얼마나 마시면 업혀 갈 만큼 취하는 걸까.

도한 앞에서 취하면 나도 업어 주려나.

사랑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짝사랑이 점점 집착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이 추하게 느껴져 넌더리가 났다.


“어? 오빠.”

지우가 식당 문을 보고 놀란 듯이 말했다. 사랑은 아는 사람이 왔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하필이면 태훈과 도한이었다.


“뭐야. 사랑이 혼자 마시는 거야?”

태훈이 지우 옆에 앉아 도한은 할 수 없이 사랑의 옆자리에 앉아야 했다.


“지도한, 너라도 좀 같이 마셔라.”

태훈은 지우가 치워 놓은 잔을 들어 도한에게 건네고 소주를 따랐다.


“영화 예매만 안 해 놨어도 같이 마시는 건데 아쉽네. 사랑아, 다음엔 넷이 마시자.”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사랑은 그냥 집으로 가고 싶었다.

칼국수고 뭐고. 술이고 뭐고.

지금까지 같은 강의를 들으며 도한의 옆에 앉은 날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지금은 도망치고 싶었다.

그의 손이 다가왔을 때 뒷걸음질 쳤던 것처럼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한만 보면 이젠 혜리가 먼저 떠올랐다.

사랑이 술을 한 잔 더 마시자 도한이 빈 잔을 채워 주었다.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제가 뭘요.”

“평소랑 다른 것 같다고.”

“그러니까 제가 뭘 어쨌는데요.”

사랑의 짜증스러운 말투에 다들 흠칫 놀랐다.

지우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감지했다.

사랑이 안 마시던 술을 마시는 것도 그렇고, 밤새 잠을 못 이룬 것도 그렇고.

분명 뭔가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태훈은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랑이 벌써 취했다고 생각하고 편을 들어 주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술 마시고 싶은 날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너는 뭐 안 그러냐.”

지우가 따로 저녁을 먹고 만나자 한 것도 이래서였나.

어쩐지 사랑의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 태훈은 눈치 없이 끼어든 게 아닌가 싶었다.

곧 추가로 주문한 칼국수가 나와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그사이 사랑은 혼자서 소주 한 병을 다 비웠다.

도한의 잔에 있는 술은 그대로였다.

그는 술도 마시지 않고 칼국수도 거의 먹지 않고서 사랑만 주시했다.

어제부터였던 것 같다.

사랑이 자신에게 화를 냈던 게.

친구가 제게 사귀자고 한 걸 들은 건가.

그래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건지.

도한은 가슴이 답답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술만 마시는 사랑을 지켜보자니 속이 타들어 갔다.


“다 드셨으면 일어날까요?”

“어, 그래. 그러자.”

사랑이 먼저 말을 꺼낸 게 반가웠던 태훈이 얼른 대답했다.


“내가 계산할게.”

“아니에요. 같이 내요.”

“됐어. 다음에 사.”

기분이 안 좋은 사랑을 집으로 보내고 지우와 영화를 보러 가야 하는 태훈은 미안했다.

밥값이라도 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럼 그럴게요. 잘 먹었습니다.”

네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해가 져 어둑했다.


“안녕히 가세요. 지우야, 영화 재밌게 보고 와.”

“응. 가서 쉬고 있어. 영화만 보고 금방 갈게.”

“천천히 와. 나 잘 건데, 뭐.”

사랑은 웃으며 태훈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도한도 같은 방향이라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지우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영화 다음에 볼걸 그랬나. 혼자 보내려니 마음이 안 놓이네.”

“집 가까운데, 뭐. 도한이도 있고.”

태훈이 지우의 손을 잡고 걸었다.

지우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도한 때문인 것 같은데, 그와 사랑이 함께 가게 돼 더 신경이 쓰였다.

잔뜩 힘주어 걸어가던 친구의 모습이 곧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불안해 보였기에 지우는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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