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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아까우면 자기가 좀 갖지 (14/63)


#14화. 아까우면 자기가 좀 갖지
2023.02.17.


도한은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을 찾았다.

다음 주부터 중간고사라 그만 놀고 시험공부를 해 볼 작정이었다.

자퇴를 한 대학에서 이미 다 배운 내용이라 며칠만 투자하면 성적은 문제없었다.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친 지 얼마쯤 지났을까.

머릿속이 누구로 꽉 찬 바람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제저녁 재성을 만난 후로 이 모양이었다.

괜찮다고 여겼던 재성이 사랑에 대해 떠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사랑도 너 같은 애한테 관심 없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사랑이 어떤 마음으로 그 소개팅에 나갔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태훈이 소개팅을 시켜 주겠다고 했을 때, 아무런 감흥도 없이 그러겠다고 한 얼굴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려 소개팅에 나가지 말라고 미친 소리를 지껄였지만, 한편으로는 상대가 좋은 사람이었기에 그녀에게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재성을 만나며 제게서 받은 상처를 다 잊었으면 했다.

그렇게 질투와 응원이 뒤엉킨 채로 태훈과 술 한잔을 하고 있었는데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자기 스타일이 아니야?

착한 여자는 별로라고?

멋대로 떠드는 그 입을 한 대 치고 싶을 정도로 온몸의 피가 끓어올랐다.

도한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리고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책상에 집어 던졌다.

조용한 공간에 울려 퍼진 큰 소리에 그제야 이곳이 도서관이라는 걸 깨달았다.

주위에서 따가운 눈길이 쏟아지자 그가 잠깐 밖으로 나왔다.

도한은 2층 휴게실로 올라가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았다.

테이블마다 사람이 가득해서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빈 벤치를 찾던 그의 눈에 사랑이 들어왔다.

마지막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도한은 멈칫했다가 그곳으로 다가가 그녀 옆에 앉았다.

인기척에 무심히 고개를 돌린 사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녕하세요.”

“안녕.”

그녀가 인사를 하고 조금 전 자판기에서 뽑아 온 탄산음료를 마셨다.


“강지우는 어쩌고 너 혼자야.”

“방금 태훈 오빠랑 나갔어요. 데이트하고 온다고.”

“의리 없네.”

“시험 기간 때 여자 친구랑 팔짱 끼고 도서관 광장 돌아다니는 게 태훈 오빠 소원이었대요.”

“별게 다 소원이다.”

“태훈 오빠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선배님은 늘 그랬다고.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던데요?”

“뭐?”

사랑이 그를 쳐다보며 ‘너요, 너.’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도한은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그건 어떤 기분이에요?”

“뭐가.”

“남들은 공부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 여자 친구랑 데이트하는 기분 말이에요. 일부러 도서관 앞에서 팔짱 끼고 다니는 거예요? 부러워하라고?”

“별생각 없었어.”

“아, 여자 친구랑 있으면 다른 생각은 안 드나? 너무 좋아서?”

도한의 얼굴에 ‘얘가 오늘 왜 이렇게 깐족거리나’라고 쓰여 있어 사랑은 어설프게 웃었다.


“제가 잘 몰라서요. 연애를 못 해 봐서.”

도한은 지은 죄가 있으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사랑도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근데.”

정적은 깬 건 도한이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사랑은 자신이 너무 나댔나 싶어 바짝 긴장했다.

살살 눈치를 보는데 그가 말했다.


“왜 태훈이는 오빠고 나는 선배님이야.”

나이도 같은데 왜 사람 차별하냐는 눈빛에 그녀가 당황했다.

고백할 땐 오빠라고 하더니 왜 다시 선배님이냐고 묻던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오빠라고 불러 주길 바라는 건가.

저한테서 오빠 소리 듣고 싶으면 고백이나 받아 줄 것이지.

사랑은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어 퉁명스럽게 굴었다.


“그게 편해서요.”

“내가 불편해. 깍듯하게 선배님 소리 듣는 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네가 불편하든 말든 내가 왜 상관을 해야 하냐는 말에 도한은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반면 사랑은 그의 황당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순간 웃음이 나오려 해서 입술을 말아 물고 도한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벤치 앞 난간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1층 로비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시험 기간이라는 게 실감 날 정도로 도서관이 북적거렸다.

손을 잡고 함께 공부하러 온 커플들도 간간이 보였다.

어제 만났던 재성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저 어제 소개팅 나갔었어요.”

“알아.”

“잘 안 된 것도 알아요?”

“……어.”

사랑은 옅게 웃고는 탄산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벌써 다 들었구나. 제가 왜 마음에 안 든대요? 그것도 들었을 거 아니에요.”

그녀가 도한에게 시선을 옮겼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랑은 표정만으로 그가 이유를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저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가 봐요. 벌써 두 번이나 차인 거 보면.”

그 두 번 중에 첫 번째가 자신이었기에 도한은 가슴이 뜨끔했다.

안 그래도 사랑을 볼 때마다 미안한데 재성의 일까지 더해져 죽을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한재성 취향이 이상한 거야.”

“언제는 괜찮다더니.”

“1학년 땐 괜찮았는데 2학년 되더니 애가 이상해졌어.”

어울리지 않게 험담을 하는 그를 사랑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한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앞만 보며 커피를 마셨다.


“너하고 안 어울리기도 하고.”

그가 사랑에게 눈길을 주며 어렵게 입을 뗐다.


“네가 아깝다고.”

도한은 뭐라고 위로를 해 줘야 할지 몰랐다.

남자한테 두 번이나 차였다고 기운 빠져 있는 사랑이 보기 싫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 그 남자들이 문제라는 걸 말해 주고 싶었다.

착하고 맑고 순수한 이사랑은 너 그대로 예쁘다고.

하지만 뱉고 나니 후회스러웠다.

이런 말조차 상처가 될 것 같아서.

도한은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겨 괜히 커피만 마셔 댔다.


“아까우면 자기가 좀 갖지.”

그런데 그녀의 중얼거림에 그가 입에서 커피를 뿜었다.

여기저기 흘린 커피를 어쩔 생각도 못 하고 도한은 계속해서 괴롭게 기침을 해 댔다.

사랑은 그런 그를 내버려 두고 일어나 쓰레기통에 다 마신 음료수 캔을 버렸다.

그가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혼잣말이었어요. 못 들은 거로 하세요. 그럼 먼저 가 볼게요.”

도한은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랑의 뒷모습을 넋이 나간 채 지켜보았다.

아직도 기침이 나왔다.


“어딜 봐서 곰이야.”

사랑이 곰 같아서 별로라는 재성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무슨 곰이 저렇게 당돌해.

여우도 저런 여우가 없는데.

사랑에게 제대로 홀린 도한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 *

도한과 태훈은 시험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왔다.


“하아. 어제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했는데.”

태훈은 마지막 시험이라 그런지 아쉬움이 남았다.

방금 중간고사를 보고 나왔는데 벌써 기말고사를 대비해야 할 것만 같았다.


“공부가 아니라 데이트였겠지.”

좋은 학점 받기는 틀린 것 같아 어깨가 축 늘어진 태훈은 도한의 빈정거림에 눈을 치켜떴다.


“지독한 놈.”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왜 욕이야.”

“너도 사람이었냐?”

“뭐?”

도한은 시험 못 본 불똥이 왜 자신에게 튀는지 황당해서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도저히 여자 친구를 옆에 두고 책이 눈에 안 들어오던데 넌 대체 뭐냐고. 그동안 끊임없이 연애한 네가 어떻게 나보다 더 성적이 좋을 수가 있냔 말이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여자 친구 있어서 시험을 못 봤다는 건 핑계일 뿐이야.”

“사람이라면 그게 당연한 거라고. 이 지독한 놈아.”

“뭐가 당연한 건데.”

답답하긴 도한도 마찬가지였다.

여자 친구와 도서관에 함께 있다고 해도, 쳐다보는 건 책인데 공부가 안 될 건 또 뭔지.

옆에 누가 있든 말든 집중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 도한은 태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태훈은 그런 그에게 천천히 설명을 해 보기로 했다.


“네가 사귀는 사람이 옆에 있잖아.”

“그래서 뭐.”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고.”

“그러니까 그게 뭐.”

차라리 벽에다 대고 말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태훈이 버럭 소리를 쳤다.


“만지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험한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삼켰다.

이게 정말 남자가 맞나 싶어 속이 터졌다.


“손 안 잡고 싶어? 그냥 데리고 나가서 사람 없는 데로 가고 싶지 않아? 온통 여자 친구가 머릿속을 돌아다니는데 글씨가 눈에 어떻게 들어오냐고.”

지우와 사귄 지 얼마 안 된 태훈은 특히나 더 괴로웠다.

시험이고 뭐고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게 정상 아닌가?

내가 이상한 거야?

나만 변태인 거냐고.

태훈은 억울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네가 무슨 고등학생이냐. 여자 친구 손 잡고 싶다고 공부도 못 하게.”

“뭐?”

“김태훈 순진하네.”

지금껏 모르고 있던 친구의 순수함에 도한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훈은 그게 더 약이 올랐다.


“하.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한 번도 여자 친구한테 진심이었던 적이 없는 도한을 붙잡고 아무리 떠들어 봤자 소용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누군가와 헤어져 슬프고.

그러한 인간의 감정이 뭔지 알기나 하는 건지.

도한은 연애한다고 행복해한 적도 없고 이별을 했다고 힘들어한 적도 없었다.

특별히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그렇게 메말라 있었다.

태훈은 친구로서 그러한 도한이 늘 안쓰러웠다.

어떨 때 보면 정이 많은 것도 같은데, 그렇게 느낄 찰나에 다시 차가워져 있어 좀처럼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됐다. 시험도 끝났는데 당구나 치러 가자.”

더 말해서 뭐 하겠냐며 태훈은 그만 시간을 확인했다.

당구장에 가서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저녁을 먹으면 딱 맞을 것 같았다.


“여자 친구한테 달려갈 것처럼 굴더니 뭐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애와 공부의 상관관계에 대해 열변을 토했으면서 갑자기 무슨 당구.

도한은 어이가 없어 헛숨을 터트렸다.


“지우 아까 시험 끝나서 집에 간다고 했어. 어제 밤새웠다고 저녁도 안 먹고 잘 거래.”

“아쉬워하는 거 같다?”

“그래. 사람은 이럴 때 아쉬워하는 거다.”

이젠 아예 대놓고 사람 취급을 안 하자 도한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가.”

도한은 군말 없이 대답했다.

여기서 안 간다고 했다간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는 일장 연설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덕분에 기분이 조금 누그러진 태훈은 학교 정문을 나서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근데 사랑이 말이야.”

도한은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이상하게 반응했다.

죄인처럼 괜히 뜨끔했다가 이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무래도 소개팅 다시 해 줘야겠지?”

“해 달라는 것도 아닌데, 뭘.”

“너 주위에 괜찮은 사람 없냐?”

“없어.”

생각해 보지도 않고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에 태훈이 인상을 구겼다.


“재성이는 왜 하필 여우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고 난리야.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안 어울려.”

“뭐야. 전엔 그렇다며.”

“다시 보니까 아니야.”

“그럼 사랑이한테 어떤 남자가 어울릴 거 같은데?”

왜 또 변덕이냐며 태훈이 입을 비죽거렸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당구장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안쪽 당구대에 사랑의 모습이 보였다.


“어? 저기 사랑이다.”

여기서 보게 돼 의외라 태훈은 사랑이 누구랑 함께 왔는지 궁금했다.

시선을 옆으로 옮기자 체격이 좋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지우에게 들은 적이 있는 체육학과 친구인 것 같았다.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소개팅 안 해 줘도 되겠네.”

신입생들이라 그런지 둘 다 풋풋해 보기 좋았다.

흐뭇하게 지켜보는 태훈과 달리 도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윤재와 함께 있는 사랑을 본 순간부터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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