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착한 여자는 별로 (13/63)


#13화. 착한 여자는 별로
2023.02.13.



“정말 안 가실 거예요?”

사랑은 주위를 둘러보며 도한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다른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혼자였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침대 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도한의 얼굴을 살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왔을까.

도한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걱정에만 치우쳐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집, 그의 침대. 그리고 제 앞에 누워 있는 남자.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른 탓에 사랑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 나가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그를 흔들어 깨울 수도 없고.

그대로 가만히 도한이 자는 얼굴을 감상하고 있는데 그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모닝콜 그만하는 거 아니었어?”

“네?”

훔쳐보다 들킨 사람처럼 사랑이 당황했다.

도한은 그런 그녀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일어나 앉았다.


“그만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는 게 좋으시겠어요?”

“어.”

아니라고 해 주길 바랐는데 그렇다고 하는 대답이 곧장 돌아왔다. 사랑은 다리에 힘이 빠졌다.

애써 감정을 숨긴 그녀가 다시 물었다.


“제가 불편하세요?”

“조금.”

사랑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도 마음이 아팠다.

고백한 걸 후회한 적은 없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그랬다.

도한은 상처받은 그녀의 얼굴을 외면하며 조금 전 자신의 말을 책망하듯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후회할 말을 내뱉었다.


“소개팅은 정말 나갈 거야?”

“나가지…… 말까요?”

이 와중에도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도한은 저도 모르게 솔직한 마음이 나오고 말았다.


“나가지 마.”

순간 사랑의 두 눈이 잔뜩 커졌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에 섬뜩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내가 소개팅을 나가는 게 싫다는 건가.

사랑이 뒤엉켜 버린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도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술이 덜 깼나 보다. 못 들은 거로 하고 그만 가. 수업은 갈 테니까.”

그가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문이 닫히자 사랑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는 버티고 서 있을 힘이 없었다.

그의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이미 들었는데 어쩌라고.”

가슴까지 전해져 깊게 박혀 버린 말을 무슨 수로 못 들은 거로 하라는 건지.

잠깐이나마 그가 제게 마음이 있어 붙잡는 줄 알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쁜 놈.”

사랑은 욕이 절로 나왔다.

내가 여길 대체 왜 왔을까.

그가 아프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정말 나란 여자는 자존심도 없는 건가.

자기 말고 다른 남자를 좋아하라는 인간이 대체 뭐가 이쁘다고 생사를 확인하러 집까지 쳐들어왔는지.

사랑은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두 다리가 원망스러워 주먹으로 툭툭 내쳤다.

그때 욕실 문이 벌컥 열려 그녀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아악!”

도한의 벗은 상체에 놀라 사랑이 재빨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찰나였지만 탄탄한 근육을 보고 말았다.

직접 만진 것도 아닌데 그 단단함이 손에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바지를 입고 있었음에도 잡지 속 남자 속옷 모델이 떠오를 정도로 균형 잡힌 상체였다.

못 볼 거라도 본 듯이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도한이 미간을 좁혔다.


“누가 보면 네 집에 내가 들어온 줄 알겠다.”

“뭐, 뭐예요. 옷은 왜 안 입고 나와요?”

“너 간 줄 알았지. 안 가고 내 침대에서 뭐 하는데.”

“가요, 가. 지금 가려고 했어요.”

사랑은 눈을 가린 채 일어나 주춤주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무사히 문을 열고 집을 나가자 도한은 옷장에서 속옷을 꺼냈다.

욕실에서 샤워를 하려고 티셔츠를 벗었는데 속옷을 안 가져온 게 생각났다.

당연히 사랑이 나갔을 줄 알고 거리낌 없이 나왔는데 아직도 있어서 그 역시 놀랐다.

그렇다고 소리를 지를 것까지야.

홀딱 벗고 나온 것도 아닌데.

도한은 사랑이 앉았던 자신의 침대로 눈을 돌렸다.


“여러 가지로 불편하게 하네.”

이젠 침대에 누울 때마다 그녀가 생각나게 생겼다.


 

* * *

사랑과 지우는 도서관 앞 광장 벤치에 앉아 봄바람을 맞았다.

벚꽃이 한창이었다.

이 좋은 날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태훈 오빠 안 만나?”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사랑이 물었다.


“아까 잠깐 봤는데, 뭐. 내일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기로 했어.”

“나 신경 쓰지 말고 만나. 너 나 때문에 주말에 집에만 있었잖아.”

사랑과 매일 붙어 다니다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혼자 나가기가 미안했던 지우는 지난 주말에 외출을 하지 않았다.

사랑이 얼마 전에 아프기도 했고, 도한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한 일까지 겹쳐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 마음을 잘 알기에 사랑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주었다.


“뭐가 너 때문이야. 비 와서 나가기 귀찮으니까 그랬지.”

지우는 변명을 하며 화제를 돌릴 겸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일어나면 되겠다.”

이제 30분 후면 사랑이 소개팅을 한다.

친구가 소개팅을 하는데 지우는 본인이 더 설렜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니까 잘해 봐. 알았지?”

사랑도 연애를 하면 좋겠어서 진심으로 오늘 소개팅이 잘되길 빌었다.


“전엔 윤재랑 잘 어울린다더니.”

“윤재랑 잘돼도 좋고.”

“도한 오빠만 아니면 되는 거야?”

사랑의 흐린 미소에 지우는 가슴이 답답했다.

곧 있으면 소개팅에 나갈 애가 긴장감도 없고 기대감도 없었다.

이럴 거면서 왜 한다고 했을까.


“너 솔직하게 말해 봐.”

“뭘.”

“그때 도한 오빠 있어서 보란 듯이 소개팅하겠다고 한 거지? 다른 사람 만날 생각도 없으면서?”

사랑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 부정하지 않았다.


“보란 듯이는 아니고 도한 오빠 때문은 맞아.”

“뭔 소리야 그게.”

“내가 연애를 안 해 봐서 부담스럽대.”

“뭐?

“남자를 안 만나 봐서 뭐든 처음일 테니까…….”

지우는 기가 막혀서 헛숨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오빠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어렵게 고백한 애한테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지우가 손부채질하며 속에 난 천불을 삭였지만 얼굴에 오른 열기는 식지를 않았다.

생각할수록 열이 뻗쳤다.

자기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사람 마음을 그딴 식으로 무시해.

지우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서 소개팅을 하겠다고? 다른 사람 만나고 나면 도한 오빠가 네 고백 받아 줄 것 같아서?”

“그래도 나는 안 된다고 하더라.”

“와, 진짜 지독하다 지독해. 넌 그런 인간이 왜 좋은 거야, 대체!”

큰소리를 안 낼 수가 없었다.

지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사랑도 그만 몸을 일으켰다.


“가자. 이러다 늦겠다.”

“소개팅은 뭐 하러 가? 잘해 볼 생각도 없으면서.”

“만나 보고 괜찮으면 잘해 봐야지.”

“거짓말하네.”

“거짓말 아니야.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보다 보면 내가 왜 도한 오빠 같은 인간을 좋아했을까, 후회할 수도 있잖아. 그래서 하는 거야, 소개팅. 더 좋은 사람 찾아보려고.”

그래서 그를 잊어 보려고.

어차피 나는 안 된다고 했으니까.

아직까진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지만 노력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을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포기가 되겠지.


“그래. 도한 오빠보다 성격 안 좋은 사람 찾기가 더 힘들다는 걸 네가 빨리 깨우치길 바란다.”

지우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본격적으로 도한을 흉보기 시작했다.

소개팅 얘기가 나왔을 때 그가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아서 더 괘씸했고, 자기 때문에 사랑이 아팠는데 걱정도 안 했다며 욕을 퍼부었다.

게다가 태훈이 소개팅 상대인 후배를 칭찬할 때는 고개까지 끄덕였다며 상종도 못 할 인간이라고 치를 떨었다.

사랑은 지우의 거친 모습을 보며 오늘 아침에 그의 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선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상처를 준 도한이 소개팅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는 걸 지우가 알게 되면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갈 것 같았다.

* * *

어제 밤늦도록 술을 마셨으면서 도한은 오늘도 한잔하자고 태훈을 불러냈다.

사랑이 재성과 소개팅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혼자 집에 있자니 자꾸만 두 사람의 모습이 상상돼 미칠 노릇이었다.

정윤재하고도 잘 어울렸던 그녀는 재성과도 그럴 것 같았다.

재성은 붙임성이 좋고 착해서 선배들이 특히나 좋아했다.

도한이 그를 알게 된 건 태훈을 통해서였다.

태훈이 동아리 후배라며 술자리에 자주 불러내다 보니 어느덧 친해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재성은 다른 이들과 달리 직설적으로 말하는 도한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재수 없게 굴어도 웃으며 살갑게 다가왔다.

도한도 사람인지라 밝은 성격의 재성을 어느 순간 가까이했다.


“재성이랑 사랑이 잘 만나고 있겠지?”

태훈은 소개팅 주선자인 만큼 두 사람의 만남이 신경 쓰였다.

사랑이 지우의 친구이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


“둘이 성격이 비슷해서 얘기 잘 통할 것 같은데. 안 그러냐?”

태훈이 얼마 전 재성과 함께 밥을 먹을 때였다. 갑작스레 소개팅을 해 달라고 조르기에 태훈은 바로 사랑이 떠올랐다.

둘 다 순수한 면이 있어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잔을 비운 도한은 술이 쓴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좋은 시간 보내고 있을 것 같다.”

“너한테 잘하는 것만 봐도 재성이는 인간이 된 거지. 그렇게 정떨어지게 말하는데도 너한테 깍듯한 거 보면 나중에 크게 될 상이다.”

“어. 재성이 괜찮은 애지.”

그래서 오늘따라 술이 썼다.

도한이 혼자서 술을 따르고 마시자 태훈이 술병을 가져와 빈 잔을 채워 주었다.


“너 어제도 마셨다며.”

“내일은 안 마실게.”

또다시 잔을 비우던 도한은 가게 문을 열고 재성이 들어오는 걸 보았다.

도한의 눈이 커지자 이상하게 여긴 태훈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어? 뭐야, 너.”

한창 소개팅을 하고 있을 애가 여긴 어떻게 온 건지.

재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인 두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곤 태훈 옆에 앉았다.


“아직 여기 계셨네요? 혹시나 하고 와 봤는데.”

소개팅하러 가면서 태훈과 통화했었던 재성은 도한과 함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혹시나 싶어서 한번 들러 봤는데 다행히 둘이 있어서 반가웠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재성은 직원이 가져다준 잔을 들고 태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태훈은 일단 술부터 따랐다.


“왜 이렇게 일찍 헤어졌어?”

도한이 물어보고 싶은 걸 태훈이 먼저 물었다.

재성은 잔을 비우고는 안주까지 입에 넣은 후에야 대답했다.


“형한테는 미안한데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네 스타일이 뭔데.”

일부러 비슷한 성향을 소개해 줬더니 뭔 소리냐며 태훈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여우 같은 여자요.”

“뭐?”

“오늘 만난 애는 그런 쪽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전 착한 여자는 별로거든요.”

“의외네. 여우 같은 여자 안 좋아하게 생겨서는.”

“곰보다는 여우가 낫죠. 통통 튀는 매력도 있고.”

조금 전 안주로 먹은 꼬치가 맛있어서 재성이 하나를 더 집었을 때였다. 도한이 술잔을 테이블에 탁 세게 내려놓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먹으면 안 되는 건가 싶어 슬쩍 꼬치를 내려놓는데 도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가려고?”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자 태훈이 물었다.


“집에.”

“지금? 갑자기?”

“어.”

“왜요, 형. 저 방금 왔는데.”

평소 도한을 좋아하고 잘 따르는 재성은 이만 간다는 그에게 서운함을 비쳤다.

그를 보려고 소개팅도 일찍 끝내고 왔는데 얼굴을 본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도한은 아쉬워하는 재성을 매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너 보기 싫어서.”

무표정한 얼굴로 살벌하게 말을 내뱉은 도한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태훈과 재성은 서로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형. 제가 뭐 잘못했어요?”

“글쎄.”

“도한이 형 저한테 화난 것 같은데.”

울상을 한 재성이 안타까워 태훈은 그에게 술을 따라 주고 꼬치를 손에 쥐여 주었다.


“지독한 저러는 게 뭐 하루 이틀이냐.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오늘은 또 뭐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지 알 수가 없었다.

사춘기도 아니고.

태훈은 요즘 들어 변덕이 심해진 친구 걱정에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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