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소개팅 안 할래?
(12/63)
12화. 소개팅 안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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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소개팅 안 할래?
2023.02.10.
“안녕하세요.”
“안녕.”
사랑이 먼저 고개를 숙였고 도한이 인사를 받았다.
하필이면 공대와 체대의 갈림길이었다.
여기서부터 사랑은 윤재와 헤어지고 도한과 함께 공대로 걸어가야 했다.
그녀가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을 내려 윤재에게 돌려주었다.
“잘 입었어. 다음 주에 보자.”
“그래. 주말에 잘 먹고 잘 쉬어.”
“응.”
인사를 나눈 그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도한과 함께 걷는 내내 사랑은 어색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평소와 똑같이 대하자고 며칠 동안 수도 없이 다짐했지만, 막상 그를 마주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행히 그가 먼저 침묵을 깼다.
“아팠다며.”
사랑이 도한을 힐끔거렸다.
죄인 같은 얼굴이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선배님 때문에 아팠던 거 아니에요.”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는 뜻이었는데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혹시라도 제 고백 거절해서 미안해하실까 봐요. 원래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못 그런다잖아요.”
“내가 때린 놈이면 나 때문에 아팠던 거 맞네.”
당황한 사랑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냥 조용히 있을 걸 괜한 말까지 꺼냈다고 후회했다.
“그날 좀 추웠잖아요. 4월에도 독감 많이 걸린대요. 그러니까 선배님 탓 아니라고요.”
사랑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도한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왜요?”
꿰뚫릴 것 같은 시선이 부담스러워 사랑이 눈을 피했다.
고백을 했고 거절을 당했으니 이젠 단념할 차례인데, 그의 눈길 한 번에 뛰는 심장이 야속하기만 했다.
“왜 다시 선배님인가 해서.”
“네?”
“오빠라며.”
몇 번 눈을 깜빡인 사랑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고백을 할 때 ‘저 선배님 좋아해요’라고 하기엔 거리감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오빠라고 불렀다.
그땐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현실로 돌아오고 나니 입에 담기가 민망했다.
물론 4학년 선배들에겐 오빠라고 부르지만 어쩐지 도한에겐 쉽지 않았다.
사랑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행히 공대 앞에 다다라서 그와 갈라질 수 있는 길이 나왔다.
“저는 이쪽으로 가야 해서. 그럼 안녕히 가세요.”
사랑은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났고, 도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조금 전 윤재와 함께 있는 사랑을 봤을 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처음엔 그녀가 반가웠고, 핼쑥한 얼굴이 안쓰러웠다.
그다음엔 윤재에게 웃어 주는 모습에 화가 났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어깨에 걸쳐진 다른 남자의 옷을 봤을 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뜨거운 뭔가가 치솟았다.
참 웃기는 일이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라고 했으면서, 그녀가 정말로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될까 봐 두려운 이 마음은 뭘까.
정윤재랑 잘 어울린다고 한 건 자신이면서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분노가 이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일까.
누군가에게 진심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주제에.
마치 그 감정이 뭔지 아는 것처럼 사랑을 볼 때마다 가슴에 열이 오르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작게 한숨을 내쉰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맞은 놈이 나였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제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 문을 열고 싶어진다.
* * *
태훈은 수업을 마치고 도한과 함께 강의실을 나섰다.
“저녁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다음에.”
윤재의 옷을 입고 있던 사랑 때문에 영 기분이 별로인 도한은 입맛도 없었다.
밥이고 뭐고 잠이나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싫으면 할 수 없고. 그럼 오늘은 사랑이만 사 줘야겠다.”
“갈게.”
“어?”
“나도 간다고.”
“뭐야, 갑자기.”
지우에게 전화해서 사랑과 나오라고 하려던 태훈이 손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울리지 않게 변덕이었다.
“학교 앞에 새로 생긴 가게 가자고 해야겠다. 거기 파스타 괜찮대.”
“거기 말고 다른 데 가.”
“왜. 분위기 좋다던데.”
“나중에 강지우랑 둘이 가고.”
“그럼 그 옆에 삼겹살은 어때?”
“거긴 시끄러워.”
“너 먹고 싶은 게 뭔데.”
얘기하는 것마다 싫다고 하는 거 보니 먹고 싶은 음식이 따로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나 비싼 걸 얻어먹으려고.
어디 들어나 보자며 태훈이 눈을 흘겼다.
“갈비탕.”
“웬 갈비탕?”
“그냥.”
도한은 독감으로 고생한 사랑에게 힘이 되는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며칠 새 창백해진 얼굴이 안쓰러워 밥이라도 사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이젠 선배로서 그런 호의를 베풀기도 어색했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녀에게 함부로 친절할 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넷이 함께 만날 기회가 생겨 다행이었다.
태훈은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해 보니까 갈비탕이 좋겠다. 사랑이 아팠으니까 파스타나 삼겹살보다는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어.”
지우한테 물어보겠다며 태훈이 전화를 하자 도한은 내내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
이렇게라도 사랑에게 몸에 좋은 걸 먹일 수 있게 돼 다행이었다.
* * *
“사랑아, 많이 먹어.”
주문한 갈비탕 네 그릇이 테이블에 오르자 태훈이 사랑에게 말했다.
“네. 잘 먹겠습니다.”
사랑은 뜨끈한 국물을 한 입 먹고 맛있다며 눈을 크게 떴다.
태훈이 저녁을 사 주겠다고 해서 지우와 함께 와 보니 갈비탕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식당이었다.
메뉴가 참 뜬금없다고 생각했는데 국물만으로도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지우가 자신의 갈비탕에서 고기를 꺼내 사랑의 그릇에 넣어 주었다.
“더 먹어. 잘 먹어야 다신 안 아프지.”
“이것도 많아.”
“일단 먹어 둬. 너 아프고 나서 살 빠진 것 같아.”
사랑은 적게 먹고 많이 자서인지 정말 몸무게가 준 느낌이었다.
결국 알겠다며 국물에 밥을 말아 맛있게 먹었다.
사랑이 잘 먹는 모습에 만족한 도한은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다들 말없이 먹기만 하다가 태훈이 고개를 들어 대각선에 앉은 사랑에게 물었다.
“사랑아, 너 소개팅 안 할래?”
“네? 소개팅이요?”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던 사랑은 반사적으로 앞에 있는 도한을 힐긋거렸다.
“응. 남자 친구 사귀려고 대학 왔다며.”
사랑이 당황하자 지우가 대신 나섰다.
“누구하고 해 줄 건데요?”
“건축과 2학년인데 정말 괜찮은 애거든.”
“사진 없어요? 궁금한데.”
지우가 적극적으로 물어보자 태훈은 핸드폰으로 후배의 SNS에 들어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오, 잘생겼다. 착할 것 같아요.”
“맞아, 진짜 착해. 성격이 정말 좋아. 그렇지, 도한아?”
도한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골라도 가장 괜찮은 놈을 골라서 심사가 뒤틀렸지만 표시를 내지는 않았다.
“사랑아, 어때?”
지우가 태훈의 핸드폰을 들고 사랑에게 보여 줬다.
태훈에게 들은 대로 착하고 성격이 좋다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이제 그만 도한은 잊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자는 뜻이기도 했다.
사랑은 사진을 잠깐 보더니 먹던 밥을 마저 먹었다.
“괜찮네.”
툭 던진 한마디에 도한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심장에 얼음이 닿은 것처럼 시리고 차가운 느낌이 들어 그의 얼굴이 굳었다.
태훈이 핸드폰을 돌려받고 흡족해하는데 사랑이 다시 말했다.
“근데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일순 정적이 흘렀다.
그녀의 고백에 태훈은 놀랐고, 지우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 당황했으며, 도한은 두 번째 고백을 들은 셈이라 가슴이 요동쳤다.
“그래? 지우도 알고 있었어?”
“아, 아니요. 몰랐는데요.”
알고 있다고 하면 나중에라도 누군지 캐물을 것 같아서 지우가 모른 척을 했다.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다행히 태훈은 사랑에게 관심이 쏠려서 지우가 거짓말한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고백해 봐. 그 사람도 너 좋아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나도 지우한테 고백 안 했으면 지우가 나 좋아하는 거 몰랐을걸?”
태훈의 진지한 조언에 사랑은 가볍게 웃었다.
“했어요, 고백.”
갈비탕을 떠먹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사랑의 모습에 지우가 입을 떡 벌렸다.
대체 언제?
아파서 집에만 있었던 애가 도대체 언제 고백을 했다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지만 참아야 했다.
고맙게도 태훈이 대신 질문을 해 줬다.
“정말?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 남자가 뭐래?”
“자기 말고 다른 사람 좋아하래요.”
지우와 태훈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 남자의 단호한 거절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들도 기분이 나쁜데 직접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싶어 위로도 못 했다.
지우는 도한을 몰래 노려보았다가 사랑에게 홱 고개를 돌렸다.
“너 그거 때문에 아팠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진짜 아니야. 독감이랑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지우는 사랑이 아팠던 게 다 도한 때문인 것만 같아서 속상했다.
이럴 줄 알고 말렸던 건데.
왜 하필 저 지독한 오빠한테 빠져서 마음고생을 하는지, 화가 났다.
“차라리 잘됐다. 다 잊어버리고 소개팅하자. 그 사람 말처럼 다른 사람 좋아하면 되지, 뭐.”
지우가 흥분하자 사랑이 피식 웃었다.
“그럴까?”
“어, 그러자. 오빠, 아까 그 후배한테 당장 연락해요.”
“정말 연락해? 진짜 소개팅할 거야, 사랑아?”
태훈이 핸드폰을 들었다.
사랑이 그러겠다고 하면 바로 전화할 기세였다.
사랑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도한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태훈에게 말했다.
“네. 할게요.”
그녀의 승낙에 지우는 잘 생각했다며 좋아했고 태훈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사랑은 남의 일처럼 다시 밥을 먹었으며, 도한은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를 좋아하는 마음은 고백과 함께 사라진 걸까.
다른 사람을 만나 보겠다는 걸 보니 이미 나를 정리했나.
원했던 바인데 사랑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소개팅을 하겠다고 하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금방 마음을 접을 거면서 고백은 왜 했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윤재 하나로도 모자라 이젠 다른 놈한테까지 질투하게 생겼으니.
도한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구질구질하다고 느꼈다.
“월요일 괜찮아?”
통화 중인 태훈이 사랑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월요일 5시로 한다?”
“그러세요.”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 중에서 도한만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말 내내 이 기분이 계속될 것 같았다.
갑자기 갈비탕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가 그만 수저를 내려놓고 사랑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우와 웃고 떠들며 맛있게 먹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 * *
주말엔 비가 내렸다.
독감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다시 감기에 걸릴까 무서웠던 사랑은 이틀 내내 집에만 있었다.
월요일 아침이 되자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날씨도 화창해서 봄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참! 모닝콜 해 줘야지.”
지난주에 아파서 하루를 빼먹었더니 잊고 있었다.
고백을 거절당했다고 해서 일상이 달라지는 건 싫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똑같이 생활하고 싶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이상 도한을 피할 수는 없었다.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저 혼자 좋아하고 말았을 거다.
사랑은 도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씻고 나와서 다시 하기로 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며 그녀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직도 꺼져 있네.”
옷을 갈아입으면서, 간단히 화장을 하면서도 전화를 걸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어디 아픈 건 아닐까.
집을 나선 사랑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발을 옮겼다.
아무래도 그에게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도한이 사는 원룸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3층인 그의 집 앞에 서자 벨을 누르기가 망설여졌다.
괜한 오지랖인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수많은 생각이 스쳐 선뜻 손가락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용기를 냈다.
혼자 있는데 아픈 거라면 어떡해.
사랑은 지우와 함께 응급실을 갔던 날을 떠올렸다. 도한도 그런 상황일 수 있으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벨을 눌렀다.
시간을 두고 한 번 더 누르자 곧 문이 열렸다.
“뭐야.”
도한은 방금 잠에서 깬 듯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아침부터 어떤 인간이냐는 얼굴로 문을 열어젖히더니 눈앞의 사랑을 보고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 또한 벌컥 열린 문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핸드폰이 꺼져 있어서요.”
“……그래서 나 깨우려고 왔어?”
“네.”
“지금 몇 신데.”
“8시 넘었어요. 지금 준비하셔야 지각 안 하시는데.”
“그냥 안 갈래.”
“네?”
도한이 들어가 버리자 사랑은 닫히려는 문을 재빨리 붙잡았다.
“아니, 저기.”
얼굴을 쏙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니 그는 벌써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황당해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도 아깝고, 그가 아픈 건지 아닌지 아직 확인을 못 해서 사랑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닫고도 철컥 하는 문소리에 사랑이 흠칫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