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나는 신입생은 안 만나
(11/63)
11화. 나는 신입생은 안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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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나는 신입생은 안 만나
2023.02.06.
도한은 쉴 새 없이 터지는 불꽃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었다.
‘저 오빠 좋아해요.’
그 맑은 음성이 귓가에 울리는 순간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여자들에게 수많은 고백을 받아 봤지만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생경했다.
가슴에 화살이 날아와 박히는 것 같았고, 심장이 폭신한 솜으로 바뀌는 것도 같았다.
아픔과 포근함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정이라 낯설고 불편했다.
자신이 틈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녀에게 기울었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저를 좋아하게 됐나.
도한은 자신이 그녀에게 일말의 여지를 준 탓이 아닐까 자책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아이의 마음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순수함이었다.
감히 물들일 수 없는 투명함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 기분을 누리고자 제 불행으로 그녀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도한은 사랑의 말간 두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좋아해. 정윤재 같은. 둘이 잘 어울려.”
자신에게 고백하기까지 얼마나 애를 태웠을지 짐작하자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거절을 하는 데 있어서 다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받아 주지 못할 거라면 나쁜 놈으로 남는 게 그녀를 위하는 길이었다.
사랑은 그의 거절을 예상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윤재를 언급하는 건 비겁하다고 느꼈다.
“그냥 제가 싫다고 하세요.”
“나 너 안 싫어. 좋아하지도 않고.”
“고백하면 다 받아 준다고 하던데 아니었어요?”
“맞아.”
“그런데 저는 왜…….”
“나는 신입생은 안 만나.”
“왜요?”
“마음이 여리잖아. 마음 여린 신입생은 나랑 사귀면 상처만 받을 거거든. 내 별명이 왜 ‘지독한’이겠어. 그리고 내가 첫 남자 친구일 수도 있고.”
“그게 싫으세요?”
“부담스럽지. 첫 남자 친구, 첫 연애, 첫 키스. 상대가 처음이면 부담스러워.”
사랑은 얼굴을 붉혔다.
순진하게 보이긴 싫었는데 그에게 저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녀가 잠깐 숨을 돌리고 다시 도한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럼 제가 다른 사람하고 연애도 하고 2학년이 됐을 땐…… 그땐 제 고백 받아 주실 건가요?”
그녀가 타협점을 선포하자 내내 반박하던 도한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거다.
눈물이라도 흘리면 어쩌나, 상처받았으면 어쩌나, 초조하게 지켜본 게 무색할 정도로 사랑은 당돌했다.
그래서 그녀가 더욱 아쉽고 아련했다.
도한은 그녀의 첫 남자 친구가 되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그녀를 가질 수 있는 첫 상대가 저였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욕심이 무섭게도 온몸을 휘감았다.
“그래도 저는 안 돼요?”
“어. 너는 안 될 것 같다.”
가슴 속 외침을 억누르느라 도한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다행히 사람들의 소음으로 인해 들키지는 않았다.
그의 최후통첩에 사랑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며 그녀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다 끝났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이렇게 예뻤었구나.
정말 아름답네.
도한에게 빠져 있느라 미처 몰랐던 화려한 빛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반대로 그는 더 이상 밤하늘을 보지 못했다.
불꽃보다 빛나는 존재가 가슴에 들어와 박혀 반짝이고 있었으므로.
* * *
사랑은 주말 내내 꼬박 앓았다.
얇게 입고 놀이공원에서 찬 바람을 맞아서인지 감기 몸살에 걸렸다.
이렇게까지 아파 본 건 오랜만이었다.
토요일에 병원을 갔어야 했는데, 쉬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가지 않았던 게 병을 키웠다.
다음 날이 되자 온몸이 뜨겁고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아무리 이불을 뒤집어써도 추위가 가시질 않아서 결국 지우와 함께 응급실을 찾았다.
독감이란다.
4월에도 독감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들은 황당했다.
사랑은 집으로 돌아와 처방받은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춥고 아파서 몇 번이나 깼지만 열이 조금 내리고 난 후에는 편히 잠들었다.
따뜻한 죽을 사 온 지우는 사랑이 일어날 때마다 조금씩 먹였다.
“너 목요일까지는 학교 못 가겠다.”
독감에 걸리면 5일은 단체 생활을 못 한다고 하니 집에만 있어야 했다.
지금까지 결석 한번 한 적 없는 사랑은 어쩔 수 없이 며칠씩이나 수업에 빠지게 생겼다.
“응. 의사 소견서 제출하면 출석 인정해 준대.”
“도한 오빠랑 데이트 잘하고 와서 이게 무슨 난리야.”
“그러게.”
사랑은 희미하게 웃기만 할 뿐 그에게 고백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아픈 거라고 불쌍히 여길 것 같았다.
거절당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충격은 받지 않았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했다.
손에 깊이 박혀 건드릴 때마다 따가웠던 가시가 쏙 빠진 것처럼 속이 다 시원했다.
더는 그로 인해 끙끙 앓을 필요가 없어서 개운했다.
하필이면 이때 독감에 걸려 오해하기 딱 좋았지만 고백을 거절당해서 아픈 건 결코 아니었다.
사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너한테 옮길까 봐 걱정이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낫기나 해.”
“응, 고마워.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네.”
“고생은 무슨. 그만 자. 불 끌 테니까.”
지우는 하루아침에 얼굴이 반쪽이 된 사랑이 안쓰러웠다.
그나마 같이 사는 덕에 조금이라도 살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랑을 데리고 응급실에 갈 때만 해도 무서웠던 지우는 자연스레 부모님 생각이 났다.
대학에 들어와서 마냥 좋기만 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고 나니 부모님의 보호 아래에 있을 때가 얼마나 안락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는구나 싶었다.
사랑이 깊이 잠들 수 있도록 불을 끄고, 사랑보다 늦게 잠든 지우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오늘부터는 사랑에게 죽 대신 밥을 먹이려고 콩나물국밥을 사러 가는 길이었다.
사랑이 일어나기 전에 얼른 다녀오려고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데 집 앞에 도한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우의 인사에 도한은 그녀가 방금 열고 나온 현관문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지우는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사실과 도한이 사랑과 함께 수업에 가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사랑이 당분간 학교 못 가요.”
“왜.”
“아파서요.”
도한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월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모닝콜을 해 주는 사랑이 오늘은 전화가 없었다.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으니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맑은 목소리를 듣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려니 도한은 먹구름이 잔뜩 낀 날처럼 기분이 흐렸다.
얼굴이라도 보고 나면 좀 나을 것 같아 일찍 집에서 나와 그녀의 집 앞을 서성이며 기다렸다.
그런데 아팠을 줄은 몰랐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웃으며 인사하고 헤어졌기에 상처받지 않은 줄 알았다.
그랬을 리가 없을 텐데, 바보같이 그녀의 미소를 믿어 버렸다.
도한은 사랑이 아픈 게 다 제 탓인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얼마나 아프길래 당분간이야.”
“독감이래요. 그래서 목요일까지는 집에 있어야 해요.”
학교 근처에서 과제를 하고 집으로 보낼걸.
그렇게 얇게 입고 나온 애를 데리고 밤까지 있었으니.
도한은 괜히 놀이공원 야간 개장에 데려갔다고 후회했다.
“그럼 저 먼저 가 볼게요.”
지우가 멀어지고 나서야 도한이 숨을 길게 내뱉었다.
고개를 들어 사랑이 있을 2층의 왼쪽 집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뛰어 올라가 보고 싶어 그의 두 발이 움찔했다.
전화라도 해 볼까 싶어서 핸드폰을 들었다가 헛숨을 터트리고는 손을 아래로 툭 내렸다.
“미친놈.”
지금 뭐 하자는 건지.
그녀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착한 선배 노릇이냐며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도한은 자신에게 욕을 지껄이고는 발길을 돌렸다.
* * *
일주일 만에 강의실에 온 사랑은 눈이 반짝거렸다.
그동안 아팠던 것보다 집에만 있는 게 더 힘들었다.
교수님의 졸린 목소리도 오늘은 새소리처럼 청아하게 들렸다.
그야말로 세상이 달라 보였다.
교양 수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공기마저 상쾌하게 느껴졌다.
다음 강의를 들으러 공대 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이사랑!”
사랑이 돌아보니 윤재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 멈춰 서 숨을 고른 윤재가 사랑의 얼굴을 조심히 살펴보았다.
“너 괜찮아?”
독감에 걸려서 <한자의 이해> 수업을 못 듣게 됐다는 연락을 받고 윤재는 일주일 내내 걱정을 했다.
지금도 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응, 이제 괜찮아. 오늘부터 수업 들을 수 있어.”
며칠 사이에 사람이 그리웠던 사랑은 윤재가 반가웠다.
그나마 지우랑 같이 살아서 다행이지, 혼자였으면 5일 동안 한마디도 못 했을 거다.
윤재는 사랑을 안쓰럽게 보다가 입고 있던 과 잠바를 벗었다.
“얼굴 많이 상했다. 이거 입고 가. 여기 그늘이라 추워.”
“아니야. 괜찮아.”
사랑이 손을 내저었지만 윤재는 기어코 그녀에게 옷을 걸쳐 주었다.
할 수 없이 사랑은 그대로 가야 했다.
“고마워. 근데 이 잠바 4월엔 좀 덥지 않아?”
체격이 큰 그의 옷을 입으니 마치 아빠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봄에 입기엔 두껍고 무거웠다.
“더워.”
“더운데 왜 입고 다녀?”
“멋있잖아.”
단순한 대답에 사랑은 웃음이 나왔다.
윤재도 피식 웃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중학교 때 수영 대회 연습을 하고 있는데 어떤 대학생이 우리 감독님을 찾아왔었어. 그날이 감독님 생신이었거든. 감독님 선물이랑 후배들 먹으라고 빵을 사 왔는데 그 형이 너무 멋있어 보이더라고. 그때 대학교 이름이 적힌 과 잠바를 처음 봤는데 체대생들의 특권처럼 느껴지더라. 나도 열심히 연습해서 수영 특기생으로 체대에 가야지, 가서 저 옷을 꼭 입어야지. 뭐 그랬어.”
사랑은 윤재의 말을 들으며 안타까웠다.
그날의 다짐대로 체대에 들어와 과 잠바는 입게 됐지만 부상으로 수영을 포기해야 했으니까.
“수영 그만둘 때 많이 힘들었겠다.”
“어린 마음에 많이 울었지.”
다 지난 일이라며 윤재가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환히 웃었다.
“그래도 수영을 그만두고 나니까 나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돼서 좋았어.”
“그게 뭔데?”
“내가 머리가 좋았더라고.”
“뭐?”
“그러니까 우리 학교에 들어왔지.”
사랑은 많이 울었던 만큼 힘들었을 과거를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윤재가 기특했다.
이 과 잠바를 볼 때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꿈이 떠올라 괴롭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친구지만 존경스러웠다.
덕분에 힘이 났다.
아닌 척했지만 남자한테 차였다고 내심 기운이 빠져 있었는데, 윤재가 겪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작 거절 한 번 당한 거 가지고 우울해할 필요는 없었다.
윤재처럼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이 몰랐던 스스로를 찾을 수도 있었다.
사랑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정윤재 정말 대단하다. 멋있다.”
“어? 내가?”
“아니. 과 잠바가.”
“뭐?”
멋있다는 말에 한껏 들떠 있던 윤재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재밌어 사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앞에서 걸어오는 도한을 보고는 그녀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