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저 오빠 좋아해요
(10/63)
10화. 저 오빠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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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저 오빠 좋아해요
2023.02.03.
두 번째 과제 일이 돌아왔다.
주말에 데이트를 했던 첫 번째와 달리 평일로 날을 잡았다.
금요일 오후 3시 30분.
수업을 마치고 조금 전에 집에 들어온 사랑이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도한과의 약속 시각까진 30분이 남았다.
“내일 만나자고 할걸 그랬나.”
혜리에게서 도한과 깊은 사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접으려고 했다.
두 번째 데이트 과제 약속을 평일 오후로 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주말보다 수업을 마치고 잠깐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지만 종이도 아닌 마음이 그렇게 쉽게 접어질 리 없었을뿐더러,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활짝 피우기만 했다.
가슴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자꾸만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해서 곤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지금 고백하면 그나마 잘 지내고 있는 선후배 사이마저 끝이라고, 사랑은 날마다 자신에게 경고했다.
“오늘도 무사히 돌아오자.”
가벼워진 가방을 들고 거울 앞에 선 그녀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고백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 꾹 다문 입을 노려보기도 했다.
지난번 과제를 하러 갈 때는 원피스까지 차려입고 한껏 멋을 부렸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름없는 청바지 차림이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까, 잠깐 생각을 한 그녀는 고개를 젓고 집을 나섰다.
학교 정문에 도착하자 도한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수업이 3시 50분에 끝난다고 하기에 늦을 줄 알았는데 그가 있어서 놀랐다.
“휴강이라서.”
“그럼 집에 갔다 오신 거예요?”
“아니.”
나란히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던 사랑이 도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어디에서 시간을 보냈는지 궁금했다.
“그냥 기다렸어.”
“저를요? 정문에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숨도 쉬지 않고 쏟아지는 질문에 도한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고도 없이 휴강이 되는 바람에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집에 갔다 오자니 번거롭고, 카페에 가자니 귀찮고.
무작정 정문으로 걸어온 그는 벤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핸드폰으로 음악도 듣고 기사도 보며 시간을 때우자 어느덧 약속 시각이 다가왔다.
도한은 누군가를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려 본 적이 처음이었다.
지루할 줄 알았는데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 언제쯤 오나 고개를 내밀고 찾아볼 땐 조금 긴장이 됐다.
무슨 옷을 입고 올지, 머리는 어떻게 하고 올지,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떠올리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첫 번째 데이트 때 잔뜩 차려입고 나왔으니 오늘도 그렇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래서 도한도 이번엔 꽤 신경을 썼다.
그래 봤자 바지에 티셔츠였지만 옷장에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좋은 옷으로 골라 입었다.
그런데 정작 사랑은 편한 차림이었다.
원피스 입은 모습도 예뻤지만 지금처럼 수수하고 단정한 옷이 그녀에겐 더 어울렸다.
“그럼 저한테 전화하지 그러셨어요. 수업 끝나고 바로 오게.”
사랑은 도한이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다는 말에 미안한 얼굴을 했다.
금요일에 약속을 잡은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너무 일찍 가도 안 되잖아. 야간 개장인데.”
맞는 말이었다.
가급적 짧게 만나려고 오후에 과제를 하러 가자고 했으면서 사랑은 그새 잊어버렸다.
막상 그의 얼굴을 보고 나니 반갑고 좋아서 주말에 만나자고 할걸 그랬다며 후회하고 말았다.
매번 볼 때마다 멋있었지만 오늘 도한은 더욱 그랬다.
평소와 다른 걸 모르겠는데 왜일까.
이런 주제에 무슨 마음을 접겠다는 건지.
사랑은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놀이공원에 도착하자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부터 먹자.”
“네.”
두 사람은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가 햄버거를 주문했다.
포장을 벗겨 낸 사랑은 생각보다 사이즈가 커서 당황했다.
데이트와 햄버거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방금 깨달았다.
먹는 모습이 예쁜 여자가 되기엔 틀려 버렸다.
이리저리 돌려 봐도 입을 크게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어쩔 수 없이 한 입을 크게 베어 먹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고, 먹다 보니 맛있어서 앞에 도한이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열심히 입을 벌렸다.
다 먹고 나서 고개를 들자 그가 저를 빤히 보고 있단 걸 알아챘다.
흠칫 놀라서 입에 햄버거를 가득 문 채 웅얼거렸다.
“왜 그러세요?”
“잘 먹어서.”
그가 냅킨을 건넸다.
“하나 더 시켜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
잘 먹어서 보기 좋다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사랑은 냅킨을 받아 입을 닦고선 음료도 마셨다.
언제는 이 남자한테 예쁘게 보였나 싶어 든든하게 배나 채우자 싶었다.
사랑은 저를 구경하느라 아직 다 먹지 못한 도한을 기다려 주었다.
먹을 땐 몰랐는데 둘 다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그녀가 적절한 주제를 떠올렸다.
“체대 식당 가 보셨어요?”
“아니.”
“거기 밥 정말 맛있어요. 나중에 한번 가 보세요.”
저녁을 먹고 있어서 그런지 사랑은 얼마 전에 갔던 체대 식당이 생각났다.
추천해 줄 정도로 맛있어서 말을 꺼냈는데 어쩐지 도한의 표정이 좋지가 않았다.
“넌 가 봤나 봐.”
“네. 며칠 전에요.”
“혼자?”
“아니요. 지우랑 다른 친구 하고요.”
“정윤재?”
“선배님이 윤재를 어떻게 아세요?”
“전에 네가 말했잖아. 태훈이랑 강지우랑 넷이 공대에서 밥 먹었을 때.”
“아, 기억력 좋으시네요. 이름까지 기억하시고.”
사랑은 그가 윤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도한 역시 자신이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체육학과 정윤재.
사랑과 같이 있는 걸 몇 번 봤던지라 얼굴까지 기억했다.
둘이 잘 어울린다고 태훈이 말했던 것까지도.
그가 햄버거를 다 먹고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많이 친해졌나 보네. 같이 밥도 먹고.”
“네, 뭐.”
“그래서 걔는 여자 친구 있대? 이젠 물어봤을 거 아냐.”
그가 시선을 내리고 음료를 마셨다.
괜한 말을 뱉었다는 생각에 사랑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자 이상함을 느낀 도한이 빨대를 문 채로 시선을 올렸다.
“혹시, 윤재한테 관심 있으세요?”
“뭐?”
순간 음료를 잘못 삼킨 도한이 크게 기침했다.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그가 살벌하게 인상을 구겼다.
“아니. 윤재 이름 기억하시는 것도 그렇고, 여자 친구 있는지 자꾸 물어보시는 것도 수상해서요.”
도한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사랑은 다행이라 여기고는 조금 전 그의 질문에 답했다.
“여자 친구 없대요.”
“전엔 안 궁금해서 안 물어봤다더니.”
“지우가 물어봤어요.”
“남자 친구도 있는 애가 왜.”
“제 남자 친구로 괜찮다고.”
도한은 말문이 막혔다.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구나 싶었다.
저나 태훈이나 지우나, 모두 사랑과 윤재를 보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못마땅한 마음에 그가 인상을 쓰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혜리에게서 온 전화였다.
도한은 그녀의 이름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차가운 한 마디에 사랑이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누구길래 저렇게 무뚝뚝하게 전화를 받나 궁금해하는데, 핸드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빠 혹시 지금 공대에 있어?
“아니.”
- 그럼 도서관?
“학교 밖.”
- 아, 그럼 몇 시쯤 돌아와?
“늦을 거야.”
사랑은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만으로 혜리라는 걸 알아챘다.
전화번호 아는 여자 후배는 나밖에 없다더니.
그녀의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두 사람의 통화는 이어졌다.
“무슨 일인데.”
- 친구랑 술 마시다가 아빠한테 전화 와서 걸렸거든. 오빠 차 타고 오라고 하셔서.
도한이 대답하지 못하자 혜리가 다시 말했다.
- 학교에 없으면 됐어. 택시 타고 갈게. 오빠가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고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 알았어.”
통화를 마친 그의 얼굴이 어두워 사랑은 말을 걸기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지난번에 집 앞에서 본 언니예요?”
도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랑은 질문을 바꿨다.
“그 언니, 좋아하세요?”
혜리를 데려다주지 않은 걸 경철이 알게 되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다고 생각하던 도한은 뜻밖의 물음에 사랑을 바라봤다.
뭐가 그리도 속상한지 먹던 사탕을 빼앗긴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질문을 던져 놓고 마음을 졸이던 사랑이 반짝 눈을 빛냈다.
아니라고 하니 용기가 조금 생겼는지 그녀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어떤 사이인지 물어봐도 돼요?”
“벌써 물어봐 놓고, 뭘.”
도한이 민망해하는 사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깐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동생이야.”
사랑의 두 눈이 잔뜩 커졌다.
혜리가 도한과 깊은 사이라고 했기에 둘이 사귀었던 사이가 아닐까 짐작했었다.
아니면 지우의 말대로 잠자리 파트너는 아니었을까 예상하기도 했는데 전부 다 틀렸다.
“친동생이요?”
지도한, 박혜리.
성이 다르니 친동생일 리는 없고 아버지가 다른 걸까.
사랑은 어떻게 가족으로 묶인 사이인지를 묻고 싶었다.
“아버지가 재혼을 하셨어. 혜리는 새어머니의 딸이고. 그래서 나한테는 동생.”
도한이 그녀의 궁금증을 말끔히 해결해 주었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쉽게 말이 나왔다.
이사랑에게만큼은 쓸데없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태훈 오빠도 모르는 것 같던데.”
사랑은 혼란스러웠다.
도한과 가장 친한 태훈도 혜리를 그의 아는 동생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너한테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왜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왜 제게만 알려 주는지 사랑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믿으니까.”
그 짧은 한마디에 그녀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어디 가서 얘기하진 않을 것 같거든, 네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사랑을 두고 그가 그만 일어섰다.
“다 먹었으면 나가자.”
도한이 멀어지자 사랑은 그제야 얼른 그를 따라나섰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가슴은 또 왜 이리 쓸데없이 두근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 * *
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아기자기한 건물과 놀이 기구에 조명이 켜져 운치를 더했다.
커플들에겐 더없이 좋을 분위기였다.
사랑은 다른 곳보다 튤립이 한가득 펼쳐진 길이 마음에 들었다.
노랑, 빨강, 보라, 그 외에도 많은 색의 꽃들이 빼곡한 정원은 그녀의 두 발을 붙잡아 세웠다.
사진을 남겨야 했다.
사랑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이곳저곳을 찍었다.
또다시 도한을 찍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의 사진을 간직하는 건 위험하다는 걸 지난 사건으로 뼈저리게 깨달았기에 그만두었다.
대신 리포트를 써야 한다는 핑계로 함께 찍는 건 성공했다.
퍼레이드를 관람한 두 사람은 불꽃놀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랑은 밤에 보는 화려한 퍼레이드와 깜깜한 하늘에 수놓은 반짝이는 불꽃놀이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도한만이 빛났다.
그가 퍼레이드와 불꽃놀이를 보는 동안 그녀는 오직 그만을 눈에 담았다.
“선배님.”
지도한이라는 빛에 홀린 사랑이 그를 불렀다.
하늘에서 펑 소리와 함께 터지며 흩날리는 불꽃을 보던 도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사랑은 지금이라도 자신의 입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면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 그러니 제발 하지 말라고 자신을 다그쳤다.
하지만 이미 흘러넘쳐 버린 마음은 고백이 되어 쏟아지고 말았다.
“저 오빠 좋아해요.”
상대가 거절할 걸 알면서도 내뱉을 수밖에 없는 건 그동안 이 말이 수백 번, 수천 번을 입에서 맴돌았기 때문일 것이다.
혜리와 깊은 사이라는 말에 그에게 다가가기를 멈추려 했던 사랑은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단순히 가족이라면 자신이 그를 갖고 싶었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점점 커지는 마음을 더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고백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나 살자고 결국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